리뷰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불교의 참뜻은 언어나 문자로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는 없다.” “교외별전(敎外別傳). 경전에 의거하지 않는다. 진리는 글로 된 교리 외에 별도로 전해진다.”
중국 선종(禪宗)의 문을 연 육조혜능(六祖慧能)은 까막눈이었다. 혜능에게 한 비구니가 “글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아느냐”고 빈정대자 그는 대답했다. “진리는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의 두 사자언구(四字言句)나 혜능의 일화나 모두 불교의 참뜻은 텍스트에 의해 깨닫거나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즉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소통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언어가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춤이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춤이다. 춤이야말로 안무자와 무용수와 관객과의 이심전심이 이루어져야 하는 예술이다. 어쩌면 춤이야말로 불립문자인지 모른다.
부처님의 생애와 의미를 파사무용단의 황미숙이 안무해 춤으로 그린 <일곱 걸음의 꽃, 붓다>(10월 31일-11월 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현대무용으로 달을 보게 하려는 시도였고 상당 부분 그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무용으로 이루어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1973년, 일무와 한국무용에 바탕을 둔 창작춤 <공자>가 2004년에 탄생된 것과 비교할 때 이 작품 <붓다>의 2012년 초연(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은 뒤늦은 감이 있다.
작품은 붓다의 일생을 어떻게 보여줄까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예로부터 부처의 일생을 8가지 큰 일화로 정리한 석가팔상(釋迦八相)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작품은 팔상 순서를 따라 춤으로 형상화했다. 불교적인 독특한 이미지와 색채를 살리려 기울인 노력이 보였다.
서막(Opening)은 팔상의 첫 번째 일화인 붓다가 도솔천에서 인간세상으로 오는 이야기를 붓다를 추고 연기한 오창익이 무대에 등장했다가 오케스트라 피트로 내려가며 사라지는 것으로 그렸다.
‘장면(Scene) 1, 2, 3’은 붓다의 탄생(강생.降生), 네 개의 성문으로 나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게 되는 것(유관.遊觀), 드디어 성을 넘어 출가(出家)하는 일화를 따랐다. ‘장면 4’는 팔상의 다섯 번째 이야기인 설산에서의 수도(修道), 여섯 번째인 수행을 방해하는 각종 유혹을 물리치고 마라(악마)에게서 항복(항마.降魔) 받고 마침내 이르는 해탈의 경지를 그렸다. ‘장면 5’는 붓다 해탈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본래 팔상에는 없는 천수천안관음(千手天眼觀音)의 자비를 형상화했다. ‘장면 6’은 해탈 후 녹야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일화(전법.轉法)를, 마지막 ‘장면 7’에서는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는 궁극의 열반(涅槃)을 그렸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으나 한국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이기에 노장사상과 유교 등 중국적 사상이 많이 덧씌워진 불교일 수도 있다. 안무자의 의도였는지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갈색의 승복과 무대의상, 요가 비슷한 동작 등, 무대의 분위기가 본래 초기불교의 느낌을 갖고 있어 신선했다. 붓다로 나온 오창익은 동남아의 스님들 같기도 하고 부처님 고행상, 또는 고뇌하는 싯다르타 왕자를 표현한 반가사유상에 가까워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팔상 각 장면의 구체적 이야기를 다시 세세한 춤언어로 형상화하며 붓다 생애의 의미를 여러 모습으로 보여 주었다. 자비심으로 우주를 채운다는 천수천안관음의 의미를 그린 장면에서는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천개의 눈으로 보고 천 개의 손으로 보살핌을 여성의 군무로 안무하여 무용수들을 나누고 합하면서 변화를 주어 움직이는 큰 그림을 형성했다.
우람차고 신비스러워 티베트의 명상음악인 줄 알았는데 한국 스님들의 독경이었다. 70분 공연 내내 법당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 중간 출연한 사람들과 함께 선방에서 좌선하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초파일 연등을 달듯이 관객이 직접 적은 발원문을 무대에 걸면서 시작하며 관객과 소통을 시도하고 공연이 끝난 다음 발원문을 절에 가져가 회향하며 소원성취를 기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흥미로웠다. 작품의 끝에서 붓다는 무대 뒷면 단석에 올라 좌선을 하고 많은 출연자들이 무대 위에서 함께 좌선하는 장면은 월인천강을 떠올리게 했다.
붓다가 걸은 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여정이었다. 위로는 정각과 큰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파사무용단의 이름 파사(婆娑)는 소매를 나부끼며 춤추는 모양을 표현한 옛말이면서 또한 춤추며 제 올리는 모습을 명칭화 한 것이라는데 뒤집으면 붓다가 교화하는 세계를 이르는 사바(裟婆)가 된다. 상구보리 하와중생이 실현된다면 사바세계가 피안이 될 수 있다.
파사무용단의 <일곱 걸음의 꽃, 붓다>는 사바에서 피안을 꿈꾸는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