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지드현대무용단 〈2014 최후의 만찬_먹고 마시고〉
흥미로운 소재, 진정한 협업에는 의문
방희망_춤비평가

 안무가 정의숙의 아지드 현대무용단과 변혁 감독의 트랜스미디어 연구소는 2010년부터 협업하여 융복합 공연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있다. 그들이 제작한 <윤이상 2011>의 경우 2012년 <윤이상 볼쇼이>로 발전(브누아 드 라 당스 작품상 노미네이션)했으며, 2013년에는 <윤이상 LG아트센터>로, 올해는 통영국제음악제 폐막작인 <윤이상 통영>으로 매해 진화를 거듭하는 역사를 갖고 있어, 그 협업이 단기적이지 않고 꽤나 단단한 연대와 목적의식 속에 순항하고 있다 보인다.
 이번에 올린 <2014 최후의 만찬_먹고 마시고>(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8월26-27일)도 2012년 국립현대무용단 초청 안무가전(국립중앙박물관 용극장)에서 발표했던 것을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사건은 제자의 배신, 자신의 예정된 죽음을 뻔히 내다보고 있는 예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소 그 희생의식을 집행하였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소재로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왔다.
 이번 공연 제목 뒤에 붙은 ‘먹고 마시고’라는 부제(더 나아가 팜플렛 첫 장에 적힌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라는 표현)에서 그 거룩함 속에 대비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나약함을 더 조망하고 싶었던 연출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딱히 예수의 역할을 만들지 않은 채 열 두 제자를 상징할 열 두 명의 무용수로 풀어낸 것에서도 짐작되는 부분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발췌하여 작품 전체의 틀로 가져오되 융복합을 표방하는 만큼 음악 자체도 독립적인 감상 대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14인조 오케스트라(라퓨즈 플레이어즈)가 반주를 맡고 30여명의 칸타레 오페라 합창단, 네 명의 솔리스트를 무대 위에 직접 세운 형식은 신선하고 감각적인 시도였다.
 성악진들이 공연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무대 위를 활보하고 중간 중간 무용수들과 함께 사선으로 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키는 군무에 참여하는 등의 장면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만찬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서 뒤쪽에서 카펫을 굴리고 테이블을 나른다거나 후반부에 샤 막을 내려 가리고 다음 장면을 준비해야 할 때, 솔리스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아리아는 그 텀을 메워주며 장면 전환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도왔다.


 



 춤은 그렇게 음악이 씨실을 만드는 상태에서 큼지막한 무늬로 교직되었다. 박호빈, 예효승, 안영준, 이동원 등 쟁쟁한 무용수들이 포함된 열 두 명의 춤꾼들은 공연 전체로 보았을 때는 춤의 분량이 많았다고 할 수 없었음에도, 한껏 뒤틀고 꺾는 중첩된 동작들을 여유 있게 버무리며 세련된 미감의 안무를 과시하였다. 한 명, 두 명, 세 명씩 춤 단위가 늘어나고 서로 결합하면서 진폭이 커지는 동안에도 강한 구심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안무가 정의숙이 연출을 신뢰하고 집중하는 만큼 무용수들에게도 같은 자세가 반영된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식 장면에서는 발등이 굽고 뒤꿈치에 단단한 굳은살이 배인 무용수들의 고단한 발들이 모처럼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로 클로즈업되는 기회가 있었는데, 공연의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이 무용수들에게 하나의 선물로 기억 될 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여러 편의 영화 작업을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고, 영상과 음악을 매치하고 편집하는데 상당한 기술을 가진 변혁 감독의 현란한 수사법이 과연 주제를 진지하고 깊이 있게 전달하여 감동까지 이어지는 깊은 울림을 낳는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각 시퀀스들마다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호흡이 뚝 끊기곤 했던 것은 워낙 다양한 구성을 차려내느라 준비하는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이었다(공연 전 들은 러닝 타임은 70분이었으나 실제는 85분 정도). 회전무대가 불가능했던 것인지 계단배치를 고집했던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만찬 장면을 구현해내기 위해 카펫을 깔고 원형의 테이블을 들여오고 무대 뒤편에서 거나한 뷔페를 차려 출연자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무대에 가져오기까지의 과정들을 그대로 보여주었는데, 그것으로 인간의 일상적인 욕망을 들여다보기엔 거리가 있었다.
 테이블에 기대어서서 그것도 객석을 전면 바라보고 선 채 음식을 먹는 시늉은 이미 작위적으로 연출되어 편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고, 계단 상층부에 테이블들을 두느라 동선에 상당한 제한이 있어서 답답하게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객석에도 빵을 나누어주면서 공감각적인 체험에 동참하도록 한 시도는 좋지만, 유명 외식업체들의 협찬을 받아 진행할 수 있다는 네임 파워와 홍보기획력을 확인했을 뿐 번잡함에 비해 굳이 그 방식을 택해야 할 만큼의 효과를 찾을 수 없던 장면이었다.




 한편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의 아리아가 나왔던 것이라든지 내러티브와 큰 연관성 없어 보이는 영어 성경 자막, 수화 등 여러 가지 언어를 동원한 것은 팜플렛에 밝힌 대로 ‘동상이몽’의 혼란스런 상황 자체를 빗대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연이 원래 출발 지점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차원의 신앙고백처럼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활자화되고 일정한 형식 체계를 갖춘 언어(그것도 오랜 시간 배경을 축적해온 텍스트)가 새롭게 창조된 추상적인 춤 언어보다 관객에게 먼저 익숙하게 인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지한다면, 그 비율을 좀 덜어내 균형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춤은 좀 더 풍성하게 들어갔어야 끊임없이 ‘신성’(神性)을 주장하는 글과 노래의 압박을 이겨내고 인간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안무가 정의숙은 연출이 안무를 통째로 들어내는 경우라도 전체 그림을 위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하였는데, 연출가의 머릿속 구상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 같은 협업이 스타일의 통일 면에서는 우선 바람직하더라도, 서로의 의견이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협업이 되었는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2014. 09.
사진제공_아지드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