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춤예술과 커뮤니티를 넘나드는 그만큼 커뮤니티 댄스는 매력적이다. 춤 무대에 일반인이 출현(出現)하는 것은 이제 다반사이어서 그다지 생소한 일도 아니다. 2010년대에 춤이 거둔 하나의 성취로 보아 무방하다. 커뮤니티 댄스라 부르든 말든, 커뮤니티 댄스로 불리고 싶은 말든, 그러한 춤을 무용가들만의 공연작과 구분하는 편의상 커뮤니티 댄스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인들과 전문 무용인들이 함께 진행하는 커뮤니티 댄스에서 전문 무용가의 역할은 대개 안무나 연출 쪽이며, 드물게 어떤 경우에는 출연도 한다.
서울댄스프로젝트, 일부 교감 있었으나 장소특정성 못 살려
지난 봄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서 진행된 <서울댄스프로젝트>(서울문화재단 주최)는 일반인들의 참여로 광화문, 서울대교(마포대교), 선유도공원, 지하철 등지에서 진행되었고 10월 6일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폐막 프로그램 <서울무도회@태평로>로 이어졌다. 서울댄스프로젝트는 수십 명의 일반인들로 춤단을 꾸려 서울 곳곳에서 벌이는 게릴라춤판, 사람들에게 춤을 제공하는 춤워크숍 그리고 선유도공원의 춤야유회와 태평로의 서울무도회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관람한 것은 6월 하순의 서울대교 행사, 8월의 선유도 춤야유회 그리고 10월의 <서울무도회>, 3행사였고,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행사로 서울무도회가 꼽힌다.
버블 매트를 활용한 버블댄스, 댄스 퍼레이드, 컬러댄스카니발과 그루브로 진행된 서울무도회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 폐막제의 ‘별별 난장판’에 걸맞게 컬러 댄스와 그루브로써 난장판을 달성하였다. 그러한 단순 명쾌한 춤들에서 이심전심의 정서는 명확하였고 시민들은 ‘지금 그저 태평로에 함께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행복감 또는 흐뭇함을 느꼈음직하다. 2002 월드컵 이후 잠자던 환희용약(歡喜踊躍)이 일부 환생한 듯이 충만감은 춤에서 춤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파되었다. 서울무도회의 후반부를 비롯한 상당 부분은 컬러 연막이 등장하는 록콘서트의 분위기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록콘서트의 분위기를 방불케 하였어도 춤의 맥락에서 춤으로서의 가치를 달성하면 족하다. 록콘서트는 특정의 아이콘과 선율이 주도하는 가운데 집단의 열광이 표출된다. 이에 비해, 서울무도회에서 특정의 아이콘과 선율이 부재하는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버블댄스와 댄스 퍼레이드 그리고 더 핵심적으로는 록콘서트장이 아니라 태평로에서 함께 환희용약하는 어울림이었다. 다만 버블댄스와 댄스 퍼레이드는 서울무도회의 베이스로서 효과가 없지 않았지만 보다 정교하게 꾸려질 필요가 있었다.
이와 비교하여 서울대교 행사와 선유도 춤야유회는 전반적으로 밀도가 떨어졌다. 전문 무용가의 선도를 따르며 사람들이 춤을 펼치는 것으로 진행된 두 행사를 보면 무엇보다 참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심전심의 소통이 낮았으며 장소 특정적인 알맹이도 짚어지지 않았다. 이심전심 소통의 측면에서 참가자들, 즉 춤추는 사람들 사이의 교감(交感) 그리고 춤추는 사람과 춤을 수용하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 부진한 편이었다. 장소 특정적 알맹이 측면에선 서울무도회 역시 애매하였으나 난장판 상황에 힘입어 소통력을 얼마간 만회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예로서, 서울대교에서의 게릴라춤판은 장소 특정적 맥락이 가장 깊이 발휘될 만한 곳이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서울대교는 서울 한강의 대교들 가운데 자살이 가장 잦은 대교여서 서울댄스프로젝트의 한 장소로 선정된 듯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점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질 무렵부터 밤까지 두 시간 동안 전문 무용가의 선도에 따라 일반인들이 춤길을 따라 밟는 과정에서 그 같은 사실은 환기되지도 부각되지도 않았으며, 서울대교에서 그 춤들을 스쳐가는 행인들도 그 순간 서울대교의 장소 특정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 춤을 일반적인 거리의 춤으로 수용하는 데 머물렀을 것 같다.
서울댄스프로젝트는 프로젝트로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서울은 춤 활력으로 생기를 더 받아야 할 것이고 시민 참여도 더욱 확산될 필요가 있다. 공공의 장기(長期) 시민 춤 프로그램으로서 시민 참여, 시민 학습, 장소 특정성 환기 그리고 활력의 생성 같은 강점을 갖춘 프로그램은 올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서울댄스프로젝트는 특히 이심전심의 소통을 주목하면서 유연하면서도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바비레따, 안무자의 낮춤 역할로 배가된 교감
<바비레따>는 굳이 커뮤니티 댄스를 자처하지 않으나 커뮤니티 댄스로 분류된다. 여기서 전문 무용가들은 안무와 연출에 더해 일반인들과 함께 출연하는 방법을 취하였다(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 8~9월 8회 공연).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라는 긴 제목에서 바비레따는 무엇일까. 이번 공연 제작자들은, 늦여름과 초가을 무렵을 지칭하는 러시아말로서, 화창하며 뜨거운 날씨가 한여름보다 더 아름다워서 중년 여성을 높여서 은유하는 지칭이라 소개한다. 젊었을 때보다 더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중년여성...
일반인들의 안무와 일반인들의 출연으로 진행되는 춤 공연에 대해서는 관행상 전문 무대를 대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문 무대에 일반인들이 출연하자면 전문 무용가의 역할이 필요하며, 그 역할은 대개 안무나 연출이다. <바비레따>에서는 일반인들이 ‘출연’하지 않고 공연 처음부터 ‘참여’하였다. 일반인들의 비중이 매우 높고 일반인들과의 인터액티브한 순간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의 참여는 절대적이었고 그들의 참여 없이 공연은 성립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공연은 ‘관객 참여형 감성 치유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무용가의 자리에 일반인이 서도록 해서 진행되는 커뮤니티 댄스가 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무용가와 일반인이 서로를 필요로 한 공연이 <바비레따>였다.
이번 공연은 장은정, 최지연, 김혜숙의 중견 안무가와 중견 연극 배우 강애심이 공동으로 진행·출연하여 제작하였다. 공연 이전에 이미 제작진부터 ‘춤추는 여자들’이라 하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은 것으로 보이며, 지난 해에 이어 이번에 재공연되었다.
<바비레따>는 관객과 이야기 나누기, 여성의 자기 찾아가는 행로를 그린 춤, 관객과 춤으로 하나 되기의 3부로 진행된다. 이 과정 속에서 중년 여성의 회한과 고백이 주섬주섬 수다처럼 소개된다. 노래, 포크송, 합창, 드럼, 기타 반주, 이야기 대사 같은 음악적, 연극적, 오락적 장치를 춤은 하나로 묶어내었다. 대사 중에 “여행을 감히 하지도 못하고” “벌써 알았더라면”, “있는 그대로를 사랑했으리라, 사랑의 결말을 덜 걱정했으리라,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와 같은 자각적 독백들은 그것이 인생의 굴곡을 거친 여성의 그것으로서, 그리고 삶에 대한 질문으로서 노출된다.
감성 치유 프로젝트답게 공연 진행은 격의 없었다. 각자 마음 한켠에 굳게 품은 취약점을 제작진 자신들부터 돌아가며 털어 놓는 여러 모습들은 객석의 공감을 이끄는 장치로서 매우 유효하였다. 상대가 감성을 열어보도록 그들은 자신부터 내려놓았고, 그럼으로써 객석에서도 얼마간 자발적인 독백을 이끌어내었다. 객석의 독백들까지 더해지면서 <바비레따>에서는 젠더의 경계는 점차 희석되고 상당 시간 펼쳐지는 출연진-관객의 집단무 역시 격의 없는 어울림과 일체감을 향해 고조되었다. 끝 부분에서 그들은 모두 어둠 속에서 누워 잠시 명상에도 젖는다.
바비레따는 추상적 공간이자 꿈으로서 바비레따에 사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고, 현실적으로 그러기를 소망하는 여성도 흔하다. <바비레따>는 감성을 위한 일종의 해방구였다. 지나온 삶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성찰하면서 공연은 객석 사이사이에서 이런저런 깨달음을 환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중년 여성들에게서는 그리고 인생 초년 여성들에게서까지 무언의 용기를 일깨웠을 것으로 관찰된다. 그들이 나눈 격의 없는 집단무가 이 점들을 시사한다.
장은정, 최지연, 김혜숙이 출연진으로서 독백을 선도하고 중반부에 들어서는 회환이 어려 있는 상당히 표현적이면서 내면을 표출하는 춤으로써 감정을 전달하였다. 관객 참여형 공연을 풀어내는 방법 면에서 그들은 자신들부터 참여(출연)하였다. 관객을 대상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거리를 최소화하거나 거의 없앰으로써 공연을 성립시켜 나가는 방식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바비레따>는 커뮤니티 댄스에서 무용가의 역할과 위치를 다시 묻고 있다. 드러나지 않는 커뮤니티 댄스가 많아 단언할 순 없다지만 커뮤니티 댄스와 관객 참여, 전문인 참여를 동시에 달성하는 춤 공연은 흔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