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주목댄스씨어터의 예정된 3부작을 보는 것은 이상한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보통 현대 안무가들의 의미심장한 3부작에 대한 묵직한 기대라기 보다는 흥행 영화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것에 가까운 좀 더 가볍고 흥미로운 기대다. 그것은 이 작업이 미래에 대한 상상에 근거한다는 것과 현재가 불안하고 변동이 심한 상태를 시차없이 다루고 있다는 그야말로 동시대적 담론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것과 더불어 관객을 공연에 심리적으로 강하게 끌어들이는 수행성이 강한 방식으로 공연되는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주목댄스씨어터 〈에즈라스〉 ⓒ2024SPAF/예술경영지원센터 |
야라스보다는 적은 인원인 4명의 출연자가 〈에즈라스〉(Ezras)로 대학로극장 쿼드 무대에 올랐다(2024. 10.11-13. 2024 스파프 국내초청작) 높은 힐을 신고, 긴머리를 날리며 도발적으로 무대를 횡단한다. 걸음의 태도와 눈빛이 야라스를 기억에서 소환한다. 에즈라족은 야라족에서 진화한 종족이라고 한다. 야라족이 전작에서 기계와 합성을 해서 진화해야 하는 상황을 단순히 긍정하고 받아들여 트랜스폼되기 보다는 무언가를 예감하고, 치를 떨고, 온몸으로 발악하고 쓰러지다가도 서로를 위로하면서 부대꼈었다. 그 야라족의 도발적이고 동물적 파워는 그대로 유전된 듯 야라의 후손들은 파워가 넘친다.
그리고 이들은 꽤 많은 시간을 몸의 전시와 몸이 태도를 통해 젠더리스, 성별없음을 보여준다. 이들 중 여성 퍼포머 1명은 짧은 가발을 쓰고 마른 중성적인 몸으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을 연기로 보여주었다. 실제 남성 퍼포머 1명과 여성 3명이었지만 1명을 중성적 내지 무성적으로 만듦으로 해서 성별없음에 대한 작품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작품 설명에 의하면 에즈라는 ‘도움, 보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자르 azar에서 유래했고, 그는 유대인 공동체를 재구성한 개혁자이자 제사장이 권위를 가진 지배자라고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 에즈라는 종교적인 의미는 제거하고 보호자 혹은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 속성을 부여해 이 가상인물은 에즈라, 이 집단공동체를 에즈라족이라 지칭하기로 한 것이다.
주목댄스씨어터 〈에즈라스〉 ⓒ2024SPAF/예술경영지원센터 |
무대에서 만난 에즈라들은 도발적이고 거칠고 괴력을 가진 것 같은데, 이들의 이름에 보호나 도움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부분은 야라족들이 인간에서 진화한 미래 종족이라고 볼 때, 이들이 인간적인 면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 인간이 맞게 된 혹독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통곡을 숨기지 않고 온몸으로 쏟아내며 속 시원하게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거나 깊은 속내를 거칠게 드러내 주면서도 결국엔 서로를 살피고 위로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놓치치 않았던 안무가의 일관된 어떤 관점으로 보인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3편이 나와야 퍼즐이 맞춰지면서 드러나겠지만 〈에즈라스〉의 이름에서 보여지는 힌트는 그들의 거친 속성과는 대조적인 더 깊은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작품으로 돌아오면 이런 상념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은 날뛰는 야생마 같다.
현재도 피핑탐의 일원으로 공연 스케줄을 갖고 있는 정훈목은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피핑탐의 표현 방식이 몸에 녹아있는 퍼포머다. 그런 그가 무대에서 퍼포머들이 무엇을 향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디렉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대는 힘이 있다. 퍼포머들이 무대위에서 보여주는 몸이 한계를 넘어가는 지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무릎에 보호대를 살짝하기는 했어도 이들은 일단 용감하게 몸을 사용한다. 몸을 스스로 던져 뒹굴게 하고 서로를 끌고 미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안무가가 “곡해”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몸을 구부리고 뒤틀고 각도가 위험할 정도로 늘리고 돌린다. 그런 움직임이 공연 내내 이어지는 지속성도 놀랍다. 그리고 그것을 익숙하게 연습했을 시간도 경이롭다.
주목댄스씨어터 〈에즈라스〉 ⓒ2024SPAF/예술경영지원센터 |
〈야라스〉 비평(24년 2월호. 춤웹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즈라스〉에서도 퍼포머의 수는 반 이상 줄었지만 이들의 끌고 가는 힘이나 폭발시키는 능력은 더 노련해졌다. 〈야라스〉에 출연했던 권미정, 윤명인, 서정빈, 최민욱이 이번에는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몸과 움직임을 구사한다. 그리고 훨씬 능숙하게 움직임의 한계에 도발한다. 그래서 보는 관객도 경계를 넘는 몸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한 몸의 힘으로 관객을 압도하면서 혹은 관객과 밀당을 하면서 끌고 가는 방식은 정훈목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작품이 몸만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에즈라스〉에서는 연작을 계속 함께 하고 있는 디지털 아트팀 VRUNCH의 영상이 돋보였다. 투사되는 위치 역시 뒷막과 바닥을 오가며 에즈라의 얼굴을 근접 촬영하고 그것을 딥페이크 기술로 늙어가고 이지러져 가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강렬했다.
올해 스파프 슬로건은 ‘새로운 서사, 마주하는 시선’(New Narratives: Returning the Gaze)이다. 이 작품은 바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가능한 설정과 이야기로 무대를 채운다. 그것이 주는 신선함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이 작품을 봐야 한다. 그 느낌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그것은 매우 낯설고, 어색하며, 답답은 하지만 안정감도 주었던 어떤 기댈 언덕이 날라가는 것처럼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불편했다면(물론 어느 작품이나 초연 때 드러나는 거칠음을 제외하고) 이 작업은 성공한 것이고, 이 작품을 초청한 축제도 슬로건을 체현시켰다는 의미에서 성공한 것이다.
다른 처지의, 다른 상황의, 다른 지정학의, 다른 성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것은 통증이 따른다. 누구의 말마따나 그 통증은 suffering이 아니고 pain이다. 무력하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을 벗어나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겪어내는 통증이다. 그리고 이 통증은 확장과 그것에 연이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주목댄스씨어터 〈에즈라스〉 ⓒ2024SPAF/예술경영지원센터 |
작년의 〈야라스〉가 창작산실에서 인큐베이팅 되었다면 올해의 ‘에즈라족’은 2024 스파프만을 위해 초연되었다. 첫째가 그래도 살림살이가 나았을 때 태어났다면, 둘째는 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셈이다. 미리 구상은 되어 있었지만 재원이 마련되지 않으면 제작을 미룰 수 밖에 없는 우리 환경에서 그나마 연이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을 각오한 제작진(안무 정훈목/ 무대감독 김인성/ 조명디자인 김재억/ 의상 배경술/ 사운드 에디팅 서주원/ 아트스틱 어시스턴트 양승관/ 프로듀서 박신애/ 프로덕션 매니저 서희지)의 결단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축제의 지원금이 여러 작품으로 쪼개지는 상황에서도 이 연작이 적은 예산으로 두 번 째 고개를 넘은 것에 응원을 보낸다.
이 글의 앞에 안무자가 무대 위의 퍼포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디렉션이 명확해서 이 작품의 무대가 힘이 있다고 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제작비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온갖 논리와 학설과 언술로 리플렛이 화려하고 두꺼워도, 공연 후 비평문이 매수된 비평가에 의해 훌륭하게 치장되어도, 공연은 안무자가 제사에 관심이 있는지 젯밥에 관심이 있는지를 그저 한순간에 드러낸다. 신비할 뿐이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