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언가를 좇는다고 속도를 붙이면 더 멀리 달아나는 시대다. 춤도 마찬가지. 좇는다고 무작정 한 걸음 발을 떼놓거나 한 걸음 밖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자신이 그리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더 빠른 세계가 있다.
부산, ‘현대무용단자유’. 1995년에 창단했으니, 올해 30주년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속도전의 세계에서 현대무용단‘자유’에 속한 이들이 진지하게 해야 할 질문이 있을 것이다. 단체가 추구하는 춤의 목표인 새로운 춤예술 형태의 창출과 소통에 관하여. 지금 이미지라도 그려놓지 못한 춤은 무용단‘자유’로 그려야 할 미래의 역사도 밟을 수 없기에 정기적으로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일. 만약 무엇을 좇아 춤을 내팽개친 이들이 있다면 돌아와야 할 자리로 남아있는 일. 그리고 또 …. 춤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자리에서 고독하고 가난하게 춤을 추고 있을 것, 그것이 춤을 대하는 ‘자유’의 또 다른 치열함일지도.
30주년(10월 12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무대를 기념하는 메시지 하나 없는 팸픔릿, 축하 꽃 한 다발 없는 휑한 극장 로비가 자못 쓸쓸했다. 대표를 맡은 이언주의 〈틈〉, 안선희가 안무, 솔로로 춘 〈몸〉, 하주은의 〈독거〉 세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하주은 〈독거〉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먼저 무대에 오른 하주은의 〈독거〉. 다섯 명의 무용수가 머리를 객석으로 나란히 두고 웅크리고 있다. 숨소리(음악)에 따라 몸(살덩이)을 부풀어졌다 짜부라지기를 거듭. 마치 몸안의 기관(장기)이 숨을 쉬는 것 같다. 사물(물체)이 아직 정신과 화합하지 못한. 하지만 숨이 붙어있는 한 어느 때 서로 하나로 연결되리라는 신호이자 약속으로 보이는 그런 움직임.
상수에서 등장한 하주은(안무자)의 춤. 소리에서 정신으로 전환되는 신호같기도 한 춤에 집중하는 사이, 흐린 그림자처럼 하수쪽에 서 있던 남자의 춤이 이어진다. 남자의 춤이 여자들을 불러낸 듯, 10여명의 여자들이 무릎을 바닥에 대지 않은 자세로 기어서 나온다. 하주은이 춤추고 있는 무대 가운데까지 이동한 뒤, 스윽 일어선다. 하주은이 가운데 갇힌 형태가 되어 같이 움직인다. 하주은이 주시하며 앞으로 나서면 따라 걷고, 뒤로 물러나면 하주은을 뒷걸음으로 같이 물러난다. 안무자(하주은)가 말하는 ‘혼자 살아가게 되는 시간은 모두 다르지만, 순간 같아지기도 하는’ 개인의 삶(춤)을 말하고 있는 듯. 혼자인 삶(독거)이 자신만의 일이라 생각했으나 결국 인간 삶의 형태 속 한 부분일 것이라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일 말이다.
하주은 〈독거〉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프릴이 잔뜩 달린 흰색셔츠를 입은 남자(황세민)가 이들을 바라보다 춤을 춘다. 툭툭 몸의 관절을 던지며 추는 무심한 춤. 하주은의 춤이 거울이 됨으로써, 또 다른 독거의 삶의 형태를 보여주듯. 하주은과 자신의 춤, 군무의 춤에 ‘독거’의 삶이 비친다. 군무진이 들어오던 자세로 물러난다.
다시 남자 듀오, 팔을 뒤로 맞잡고 들어오는 여자들. 근육이 드러나는 울긋불긋 화려한 의상에 허리춤에 팔을 얹고, 튀어나오듯 상체를 튀기며 튀어나오는 남자(염승훈). 무대에 누워있는 여자 군무진 가운데 서서 춤을 춘다. 자신 속(독거)으로 걸어 들어가는 춤으로 보인다. 스스로 걸어들어간 곳,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둠속에 숨어 지켜보는 눈들, 그 눈들이 보고 있는 나. 지켜보는 눈을 피해 자신만의 공간으로 춤이 파고 들어간다. 타인의 눈이 닿지 않는 그 곳. 잠시 춤을 멈춘다. 정염을 끊고 생각을 끊고 들여다 본 그곳, 특별하다. 그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누워있는 이들은 남자가 잠시 생각을 비웠기에 문득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문득 그 자리에 같이 있기에 제 마음을 비워 그것으로 하나의 심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자신을 찾아(독거) 들어가는 춤으로 읽히기도.
안선희 〈몸〉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안선희(안무자)의 〈몸〉. 무대 하수쪽, 디귿자 형태의 철제구조물, 강한 비트의 음악, 풀어헤친 머리칼에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 아래 맨발. 온몸을 흔드는 춤. 몸에서 신체기관이 분리될까 걱정될 정도의 강도다. 음악이 멈추자 항복하듯 두 팔을 위로 들면서 춤을 멈춘다. 안선희는 ‘행복과 절망’ 그 사이 ‘불안정한’ 시기를 겪고 있는 ‘몸’을 탐구한다.
유리조각을 매단 풍경소리와 명상볼 음악. 무대 바닥에 주저앉는다.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 숙인 채 느리게 철제구조물을 향해 엉덩이로 이동. 풀어헤친 머리칼과 웅크린 몸의 형체가 마치 검은 물체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기괴하다. 춤(몸)의 퇴행, 자아(몸)를 덮은 머리칼과 몸은 지극히 개인적인, 절망적으로 내면화된 형식으로 보인다. 춤을 내려놓고자 하는 춤. 어둠속으로 몸을 던진다. 상처가 깊다. 머리를 들지 (못)않는다. 구조물을 붙들고 발버둥을 치는 듯한 춤.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하는 이 갈등에 낯선 것은 없다. 앞의 무대 〈독거〉에서처럼 자아를 풀어놓게 하는 장치가 없다. 하여 위험하다. 손상되지 않았어야 할 자아와 손상된 자아 사이에 갈등이 깊다.
안선희 〈몸〉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어딘가에 갇힌 것이다. 구조물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가 다시 들어간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을 소리나게 짚으며 무대를 누빈다. 상수쪽, 구조물의 조각을 들고 원구조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 지붕을 덮듯, 밀어 넣는다. 빈 곳이 채워졌다. 손으로 머리칼을 하나로 빗어 모아 단정하게 묶는다.
그리고 춤. 음악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 같다. 물속에서 추는 듯한, 느린 동작의 춤이 이어진다. 물속을 헤집듯, 잠긴 듯. 조용하게 걷는다. 구조물 가장자리에 매달린다. 납작하게. 남자가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들어와 그녀의 등에 붓질을 한다. 등만 비추는 조명, 노랗게 떠오르는 등, 껍데기가 빛난다.
이언주 〈틈〉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틈〉 이언주. 흰 배경막이 내려온 무대. 세 명의 여자가 세로로 나란히 서 있다. 느리게 움직이는 동작과 동작사이, 그 틈. 그 틈과 사이에 빠르게 이어지는 동작. 정지, 포즈. 다시 느리게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나면서 또 다른 이에게 팔을 뻗는다. 잡기도, 잡히기도, 놓치기도, 빠져나가기도 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한 이가 다른 이를 자신의 골반에 얹어 안아올린 채 불편하게 걷는다. 그리곤 서 있는 다른 여자의 등에 안아온 여자를 얹는다.
세 여자가 만들어내는 춤, 동작, 관계, 그 사이와 사이. 누군가 팔을 잡으면 누군가 팔을 잡히고 이동하며 빠져나간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두 팔로 크게 원을 만들어 가두려고 한다. 멈춰 세우는가 하면 서로 밀치고, 다시 틈을 만들고 가두고 또 멈춰 세우는 동작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춤의 움직임은 연약한가 하면 거칠고,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한 이가 앉아서 발을 드니 다른 이가 그의 발바닥에 얼굴을 가져다 얹는다. 몸, 등과 얼굴을 타인에게 치대면서 춤을 추는 관계. 끈끈한 상처가 생긴다.
서로를 향해 팔을 뻗고 뿌리치고 무심히 지나가는 관계는 틈 속에는 인간들이 이제까지 생각해서 표현했던 것들이 모두 들어있다. 춤을 출 때는 이미 그 틀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조각들을 조합한다. 그 경우의 수는 무한한 것이겠지만, 안무자와 무용수의 춤적 역량은 조합의 한계를 지시하며, 그 가운데서도 한 무대에서 춤출 수 있는 동작의 조합은 제한되어 있다. 춤의 언어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 조합을 비껴서는, 말하지 않는 언어라는 뜻이며 분명하게 춤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추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언어라는 뜻이다. 여자가 팔을 뻗지만 잡고 말겠다는 의지가 없이 그냥 지나는 동작에 다른 이의 팔이 닿으면 잡고, 아니면 그저 공간을 지나는 동작일 수도 있기에 ‘잡고’가 아니라 ‘잡기도’로 보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애써 정확히 표현하려다 보면 깨져버릴 수도 있는 어렴풋한 것이다.
이언주 〈틈〉 ⓒ현대무용단자유/포디움스튜디오 |
속이 빈 작은 크기의 삼각형 구조물이 무대에 등장. 삼각형 빈 곳에 두 사람이 몸을 집어넣고 각각 얼굴과 다리를 내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그 사이에 겹쳐있는 몸, 각각 발과 얼굴을 보이고 있다. 뒤로 기어 하체가 길어 보이게 하거나, 앞으로 나와 상체가 길어 보이는 착시효과. 느닷없고, 유치하다.
어떤 생명과 사물도 홀로 운동하지 않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다. 목숨을 가진 것들은 서로 그 생명을 의존하고 서로 몸을 넘나들며 교통한다. 만약 안과 밖, 둘이 아닌 삶과 죽음을 얘기했더라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틈과 사이를 설명하기 위한 구조물로 인해 앞서 공들여 안무한 춤이 설득력을 잃었다. 안무자 자신과 관객의 수준을 믿지 못한 불안에서 비롯된 듯. 모서리를 위로 세우자, 생기는 작은 틈. 그 틈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또 누군가는 웅크리고 있다. 구조물 사이로 나가고 되돌아오는 이. 들고 나는 것의 반복으로 마무리 되는 춤. 장치의 단순한 배치, 아쉬운 부분이었다.
30주년, ‘현대무용단자유’의 세 작품은 다른 듯,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하주은의 〈독거〉가 한 사람만의 특별한 삶의 형태가 아님을 다른 이들의 삶에서 찾는가 하면, 안선희는 삶(춤)의 위기에서 몸을 결정화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이언주가 관계의 형태를 정돈하고 평면화하는 작업을 ‘틈’과 ‘사이’의 선을 통해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주제를 말하는 목소리의 톤이 높고 낮을 뿐, 같은 춤결을 가진 작품으로 각각 다른 춤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다른 말을 같은 춤언어로 하고 있었다.
현대무용단 ‘자유’에서 춤추고 사유하는 이들은 그들의 노력과 노력의 극치인 춤정신의 온갖 시도로 몸(춤)의 물리적 법칙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고 그것이 진정으로 극복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것을 춤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설혹 춤으로 그 순간을 실제로 경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춤으로 하는 말은 늘 어떤 경계의 시간에 솟아오른다는 사실. 치열하게 춤추길.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