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상식이 알려주는 대로, 춤에 비해 서커스는 유연성 면에서 탁월하다. 서커스에서 몸은 일단 연체동물의 그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반면에, 가령 춤이 인체 골격(骨格)의 지형을 벗어날 때 가질 호소력은 얼마나 될 것이며 과연 호소력이 있기라도 할까. 그렇더라도 몸의 예술로서 서커스와 무척 인접한 춤은 서커스를 동경하는 심리가 없지 않다. 서커스가 서커스에 독특한 시·공간의 논리를 갖는 저변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몸의 유연성이라 생각된다. 서커스만의 판타지도 궁극적으로는 몸의 유연성에서 연유할 것이고, ‘태양의 서커스’가 강렬하게 구축하는 판타지 또한 마찬가지다. 서커스와 춤의 만남을 주목할 이유는 대체로 이러하다.
코리아댄스어브로드는 무용인들의 해외 진출을 기획하고 지원하는 민간단체다. 이 단체는 해외 예술기관들과 국내 춤 단체 및 개인들의 공동 제작, 투어, 워크숍 등 예술적 협업 작업을 지속해왔었고, 2024년에 단체 설립 10주년을 맞아 기획 공연 〈Struggle〉(투쟁, 11월 23~2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마련하였다. 〈투쟁〉은 벨기에의 서커스 단체 페트리디쉬컴퍼니의 안나 닐슨이 예술감독을 맡아 이번에 한국에서 초연하였다. 여기에 주빈컴퍼니(대표 김주빈)가 협력 안무로 참여하여 두 단체의 단원들과 국내의 폴댄스 전문인이 함께 출연하였다. 해외 서커스의 페트리디쉬컴퍼니와 한국무용 계열의 주빈컴퍼니를 결합하는 기획으로서, 국내 춤계에서 아직은 서커스와의 융합이 시도되지 않은 동향에 비해서 조금 특이한 편이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김채현 |
여남은 명의 젊은 여성들이 속옷 차림으로 공중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 〈투쟁〉의 막이 오르자 눈에 들어오는 첫 순간은 이렇다. 상당히 지속되는 이 장면의 후경(後景)으로서 그 뒤쪽의 낮은 스탠드 위에서 어느 중년 여성이 화장을 하고서는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는다. 〈투쟁〉 공연 전체에 걸쳐 이 중년 여성은 그 젊은 여성들을 독려하는 행태를 보인다. 〈투쟁〉에서 투쟁은 이 같은 주종(主從) 관계에서의 투쟁인 동시에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각자의 몸부림이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김채현 |
〈투쟁〉에 등장하는 서커스는 폴댄스로 구성되었고 2개의 폴이 무대에 가설되었다. 중년 여성이 채찍이나 올가미를 들고 젊은 여성들을 훈련에 전념하도록 독려하고 감독하는 상황이 공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2개의 폴을 오르내리며 젊은 여성들이 폴댄스의 테크닉들을 다양하게 구사하며 순응, 경쟁, 낙오, 포기가 연상되는 몸짓들을 재현하는 장면들도 수시로 등장한다. 채찍과 올가미가 서커스에서 독려하기나 분위기 맞추기의 용도로 흔히 쓰이는 반면에서 〈투쟁〉에서는 그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중년의 여성 감독자는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젊은 여성들을 압도하지만 그에 더하여 채찍과 올가미는 권력을 강조하는 도구인 한편으로, 또 그것들은 어느 감독자의 자기도취적인 편집광 마인드를 구체적으로 상징한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김채현 |
빅브라더처럼 지령을 내리고 자기 판을 멋대로 끌어가던 감독은 어느 순간 젊은 여성들에게서 끌어내려진다. 쓰러진 젊은 여성들을 올라타다 끌어내려진 감독을 젊은 여성들이 함께 쓰러지고서는 에워싸는 동안에 들려오는 1970년대 빅히트 대중가요 ‘낙엽이 가는 길’(내 몸이 떨어져서 어디로 가나 / 지나온 긴 여름이 아쉬웁지만 / 가지에 맺은 정은 식어만 가네 / 울어도 울어봐도 소용이 없네...)은 사랑가를 단숨에 넘어 편집광적 권력의 자멸가(自滅歌)가 된다. 감독과 여성들이 뒤엉킨 속에서 어느 여성이 감독의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겨서는 자신이 착용하고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이 여성의 내심은 헤어 행인 연기로 확연해지는데, 목 부위 위의 머리통을 줄로 매달아 몸 전신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이 아크로바틱 기법은 국내 서커스에서는 좀체 접하기 힘든 기법이다. 헤어 행인의 전신 연기로 공중을 휘젓듯이 나르면서 좌우로 부유하는 데 몰입하며 자기도취적인 행각을 보이는 이 여성은 새 감독이자 새 권력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새 권력자의 출현을 두고 뜬금 없어 하는 여성들이 무언의 항변으로서 무대를 뿔뿔이 떠나는 행동들을 감행하자 막은 내려진다. 이로써 투쟁은 일단 마무리된 듯한데, 과연 투쟁이 종식되었다고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김채현 |
공연작 〈투쟁〉에서 춤이 서커스와 어떻게 얼마나 융합되었는지 판별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춤으로 식별될 만한 부분이 공연에 굳이 설정되어야 한다면 단순한 발상이자 구태의연하다 하겠다. 그보다는 서커스적 움직임과 춤적 움직임의 만남이 어느 점에서 상승효과를 일으켰는지가 필자의 관심사이다. 특히 한국무용에 아마도 익숙치 않을 예술감독이 한국무용 출연자들과 협력하면서 춤의 서커스적 변용을 구현한 정도는 더욱 관심사가 된다. 아무튼 춤의 서커스적 변용 그리고 서커스의 춤적 변용, 이 둘 가운데 예술감독과 협력안무가 이번 공연에서 어느 측면을 염두에 두었는지 다시 자문해볼 일이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김채현 |
이번 공연의 주제는 표제대로 투쟁이다. 이에 대해 공연의 첫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여남은 명의 젊은 여성들이 속옷 차림으로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그 상태에서 몸들은 마치 푸줏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를 연상하도록 한다. 비가시적인 거대 권력에 내맡겨지고 갇히며 관리되는 인간, 오늘날 자주 혹은 묵시적으로 말해지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다름없는 인간들을 보는 듯이 선명하다. 조르조 아감벤이 생명정치적 권력에 의해 배제되어 심지어 벌거벗은 생명이라 지칭했던 정치적 신체가 호모 사케르이다.
페트리디쉬컴퍼니 〈Struggle〉 ⓒPetridish-김주빈 |
그들이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기실은 벌거벗겨져 있다. 벗겨진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존엄까지. 그래서 호모 사케르는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아무렇게나 대해져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일상적이다. 그들이 공연 초장부터 대롱대롱 매달린 것은 이례적이지도 않다. 그런 상태를 가짜 뉴스나 허위의 과장된 묘사로 여기는 시각이 오히려 이례적일 것이다. 단원들을 그렇게 다루다가 감독은 후반부에 콘플레이크를 한 통 들고서 와작와작 씹어대며 콘플레이크를 젊은 여성 입을 표적으로 조롱하듯이 던져보다가 급기야 그 여성 머리 위에다 쏟아버리는 만용까지 부린다. 생명이 감독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되는 것은 물론 인격조차 능멸당하는 호모 사케르의 그런 상황이 공연작 〈투쟁〉의 배경이자 투쟁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투쟁〉은 내심 매우 직설적이며, 세상 도처에서 신음하는 호모 사케르를 대변하였다.
판타지가 서커스와 폴댄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투쟁〉은 말한다. 그리하여 〈투쟁〉은 매우 현실적인 시각으로 서커스와 폴댄스가 응용될 만한 폭을 더 열어 보였다. 춤이 서커스와 만나려 할 때 ‘태양의 서커스’ 류의 세계에 고착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창의적이지도 못하다. 이런 고정적인 관점을 횡단하면서 서커스를 폭넓고도 유연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어느 면 〈투쟁〉에서 짚어볼 투쟁이 아닌가 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