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마음을 되울려 삶을 성찰하게 한 무대
권옥희_춤비평가

춤(순수무용이라고 하자)은 원칙적으로 특정한 관객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 관객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춤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다. 이 관객이란 곧 춤을 만들고 추는 주체로서의 안무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타협의 형식이 아니라 도전의 형식을 띤. 실천으로서의 춤은 하나의 세계상을 선택하고, 이 선택으로 관객이 결정되며, 이 결정으로 다시 작가의 주체가 확보된다.

황량한 세상의 상태와 신념과 고뇌에 사로잡힌 이육사의 심경을 안무자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와 심경이 일치되는 그 순간이 바로 김현태에게는 현실에서 고양된 감정 하나를 춤으로 추슬러 올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정신을 춤으로 풀어낸 정길무용단(예술감독 김현태)의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11월 24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춤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문득 넓어졌다. 이제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현실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아름다운 춤이 되고 또 다른 세계가 된다는 것, 위안이 되었다.

춤적 심미감이 확장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세련되었다는 뜻과 같다. 김현태(계명대교수)의 이 새로운 춤의 미감은 정신이 깃든 춤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될 더 큰 세계를 춤추는 몸의 감각 속에 펼쳐놓는가하면 이육사의 정신을 격조높게 구현해낸 무대미술은 춤의 외관에 모험의 길을 내며 춤들이 균형있게 자리를 찾아가도록 이끌었다. 춤을 본다.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1장, ‘광야’. 어둠 속, 첼로의 현을 날카롭게 뜯는가하면 활로 거칠게 문지르는 연주자, 그 옆에 남자(김현태)가 결기어린 자세로 좌정, 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자 이들의 뒤로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이들이 배경처럼 오간다. 마치 혼령인 듯, 그들이 외치는 소리 “민족, ...자주독립”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앞선 이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곳에 있지만, 지금 무대위 이들은 한 시대 한 공간의 정황이다. 에너지를 깊이 누른 뒤 추어올리는 김현태(이육사로 짐작)의 춤. 빛과 어둠의 광막함, 결여의 상태를 견디는, 춤은 마치 무거운 침묵처럼 보인다.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2장, ‘삶의 시작’. 40여개가 넘는 사각형 아크릴판의 이동과 겹침이 의미하는 시간의 흐름, 역사의 중첩은 역사와 개인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또는 관계를 설정하는 장치로 보인다. 시간을건너오는 듯, 장치 사이를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 두 명이 걸어나오자 이어 무대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남자(서상재)가 비틀, 흔들리는 춤을 추며 앞(역사)으로 나선다. 겹겹이 둘러쳐진 아크릴판에 어리는 빛. 그 앞에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의 느린 춤과, 통넓은 바지에 상의만 걸친 남자(서상재)의 흔들, 비척거리는 춤의 대비는 이 땅(조국)의 위태로운 상황을 그려보이는 듯하다. 서상재(이방인인 듯)가 잠시 멈춰 서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의 춤(삶)을 슬쩍 본 뒤, 곧 자신의 춤을 춘다. 이어 서상재를 가운데 두고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이 몸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다지는 듯 추는 춤. 춤은 이내 흰빛 덩어리로 무대에 일렁인다.

흰빛으로 춤이 어룽어룽 번지는 판이 이동, 무대 가운데 길을 낸다. 둘(서상재. 김정미)의 춤이 군무로 확장되는가 하면, 바닥에서 솟구치듯 몸을 일으키며 흔들, 덩실거리며 추는 춤은 밑바닥의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하는, 민중의 힘으로 읽힌다. 40여개가 넘는 아크릴판 무대장치가 일제히 무대가운데까지 내려온다. 가로로 잘린 무대 공간, 시간과 공간 저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내려앉고, 사라지고, 이별한 것이다.

벗어 든 두루마기로 바닥을 치고, 흔들며 모두 뒷걸음을 하니, 원무가 된다. 돌아오소, 돌아오소, 마치 초혼을 하듯 추는 춤.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결여의 상태, 광막한 어둠의 상태에서 시작되는 3장, ‘상실의 계절’. 남자(김현태)가 다듬이돌같이 생긴 것을 천천히 무대로 밀고 들어온다. 돌 위에 올라선다. 어둠속에 흩어져 있던 돌(땅)을 여자가 밀고와 이어붙이기를 반복한다. 김현태가 붙여놓은 돌 위를 건너다니며 춤을 춘다. 마치 땅을 다지듯, 발을 들고 굴린다. 이별을 감지한 듯, 춤이 위태롭다.

어둠속에서 스미듯 어느사이 돌 앞에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남자(서상재). 돌 위에서 춤추는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을 하나씩 떼어낸다. 공간이 끊어진다. 떼어내 조각으로 흩트리는 서상재의 꼿꼿하고 각진 움직임에서 읽히는 일본의 정서.

위태롭게 서서 끊임없이 아래로 눌렀다 다시 회복하는 김현태의 춤(몸)은 마치 이별한 이가 그 이별을 잊기 위해 일으키는 곡조같다. 조각난 돌 위에서 고통스럽게 상체를 뒤로 한껏 휘었다가 다시 아래에서 들어올리는,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춤. 춤인 듯, 아닌 듯. 춤은 이별의 곡조와 함께 출렁인다. 결여의 상태에서 감정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별이 미를 창조하기도.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땅과의) 이별로 알게 된 역사의 굴욕이 펼쳐지는 4장, ‘존재의 이유’. 남자(서상재)가 들어오면서 돌아서자 여자들이 무대로 달려 들어와 흩어져 있는 돌들을 하나씩 안아 든다. 돌과 바닥을 손으로 쓸고 가슴에 품는가 하면 바닥에 내려놓고 손으로 쓰다듬는다. 급기야 두 팔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바닥에 처박는다. 어떤 것을 향한 그리움이 이별을 이별되게 하고 결여를 결여로 느끼게 한다고, 머리를 땅에 파묻고 싶을만큼, 여자들이 이별에 바치는 슬픔에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몸짓이 들어있다. 그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남겨두는 것은 어리석은 나와의 이별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한 춤.

5장, ‘마지막 불꽃’. 정갈한 춤으로 밀고 들어오는 군무. 여자들이 관처럼 보이는 돌을 안아들고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어 네 명의 여자가 천을 펼쳐 툭툭 턴 뒤 돌이 놓여있던 바닥을 닦는다. 피의 역사를, 아니 누군가(초인이) 걸어나올 길을. 남자들이 걸어나온다. 이별한 이와의 기억을 제 속에서 끌어내어 미래에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몸짓으로 오래도록 길을 닦은 뒤, 천을 툭툭 털어 목에 두르고 들어간다.

어떤 것을 무한하게 드러내면서 또 가리는 어느 것들을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보여준, 화해하는 것같은 역사에 대한 회고적 쓰라림과 새로 건설해야 할 역사에 대한 실천의지를 그려낸 장.

아래로 아래로 몸이 내려앉는 김현태의 춤, 구음에 여자(김정미)가 어찌할까 묻는 듯, 두 팔을 위로 들고 그의 주위를 돈다. 한 명, 둘, 다섯으로 늘어난 춤은 이내 에너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응축, 확장된다. 항거 위에 이루어낸 저항의 정신처럼. 김현태가 달리고, 아크릴 판이 빛을 내며 내려온다. 어룽어룽 번지는 붉고 노을빛 아래에 선다. 역사를 은유하는 판이 맛물리고 물러나며 무대 가운데 길을 낸다. 김현태가 길 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가 돌아서 들어간다. 아름답고 근사하다.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는 이육사라는 인물의 정신을 통해 역사의식을 갈구하고 전망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감정이 춤적 서정과 다른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 무대미술 장치를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주제와 어떤 정신성을 띠는 춤들은 감각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고 그 춤이 이끄는 힘을 이해하기 위해 바쳤던 노력은 다시 춤을 보는 이의 마음을 되울려 보는이들의 삶을 성찰하게 한 무대였다. 모든 춤동작이 춤적 힘을 지니도록 춤을 배치, 안무한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조국이 처한 암담한 현실에서 초탈할 수 없었던 이육사의 행동과 사상, 그의 염원, 희구, 열정을 하나의 관념으로, 그것을 다시 춤으로 들어올리기까지 어느 한쪽도 제쳐놓을 수 없는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현태 〈큰 강물이 비로소 길(佶)을 열었다〉 ⓒ옥상훈



굴욕과 치욕, 압박의 역사를 춤으로 옮기며 이육사(시)를 알게 된 젊은 안무자는 그 역사를(현실을) 이제 몰랐던 나이의 자신감으로 건너게 된다. 하여 추론과 관념으로만 거기 있는 역사가 아니라 그것은 춤으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감동에 있다는 것을. 또한 그것은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나 식민지 의식의 극복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삶)의 실천으로 넓이와 높이로 그 의미를 확장, 자신(들)이 새로 써야하는 역사라는 것을. 이는 역사(이육사)에서 현재(안무자)의 삶을 이행하는 우리(춤)의 실천력과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온몸(춤)으로 추어올렸다.

결과 안무자가 무엇을 의도했건, 그의 마음속의 다른 힘들이 끼어들어와 작품을 그 의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수작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2025. 1.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