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태초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아담의 언어가 태초의 언어라고 진지하게 주장된 시대도 있었다. 과연 그런 주장이 있었는지 물을 만큼 선뜻 믿어지지 않을 사실이지만, 그런 가설은 어느덧 가당찮은 주장으로 사라졌다. 아담의 언어 식의 태초의 언어는 없다. 그래도 태초에 언어가 어떠했는지 하는 궁금증은 뿌리쳐질 수도 없을뿐더러, 이는 언어학 분야의 난문제로도 지속되는 중이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의 〈랭귀지〉(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2. 22.)는 언어를 소재로 한 발레이며, 〈랭귀지〉의 공연을 이끄는 동력은 언어에 관한 원천적인 물음들이다. 그 물음들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류에게서 태초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태초의 언어와 태초의 춤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언어의 생성 소멸 속에서 앞으로 한글 언어(훈민정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공연작 〈랭귀지〉는 더블빌의 두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1의 〈Origin: 바디랭귀지〉, 프로그램2의 〈발레로: 훈민정음〉. 〈바디랭귀지〉는 인간이 지식과 욕망에 사로잡혀 언어의 바벨탑을 거듭 쌓으면서 몸의 위상이 추락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춤의 바디랭귀지가 소통에서 새로운 장을 가져올 것임을 상상한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역사 속 풍파를 이겨온 한글의 조형적 속성을 반복하여 묘파해내면서 한글이 언어적 소통 매체로서 지닌 효용성을 환기하고 한글의 미래를 향한 발원(發願)을 발레 난장으로 펼친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바디랭귀지〉 ⓒ김채현 |
〈바디랭귀지〉는 서두에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행태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이 무대 바닥에다 굵은 검정 테이프를 부착하고, 부착된 테이프로 그려낸 피라미드 도형이 무대 벽에 실시간으로 비춰진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일렁대는 모습과 문자들이 이 거대한 탑 도형에 덧붙여지자 바벨탑 이미지가 환기된다. 인간들 무리와 문자들이 뒤섞여 끊임없이 바뀌며 요동치는 바벨탑의 세계는 어수선하며 어지럽다가 무리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갑자기 붕괴한다. 부착된 테이프를 걷어내면서 바벨탑을 붕괴시키는 사람 역시 그 무리의 일원인 듯하나 그가 바벨탑을 붕괴시키는 동기는 분명치 않다. 바닥에서 거두어지는 테이프를 건네받아 자기 몸에 칭칭 감는 사람은 회색빛 스킨수트를 걸치고 로봇처럼 뒤뚱뒤뚱 움직이면서 점차 마비되는 증세를 보이며 퇴장한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바디랭귀지〉 ⓒ김채현 |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바디랭귀지〉 ⓒ백연 |
곧 이어 원시림 같은 초록색의 수풀 이미지가 레이저 광선으로 무대 바닥과 천장, 3면 벽 전체에 투사되는 속에서 살구색조의 짤막한 튜닉 차림의 인간들이 서서히 등장하여 무리를 이룬다. 그들은 앉기, 팔 휘젓기, 양다리 쿵쿵대기 부류의 단출한 움직임들을 바탕으로 서로 소통하는 집단을 형성해나간다. 그런 기본 움직임들에 바리에이션이 더해지는 데 따라 집단이 모여서 수행하는 움직임은 열기를 띠고 춤 구도도 늘어난다. 그런 다음 분위기가 일변하여 지구상의 수천의 언어들 가운데 살아남아 활발하게 쓰이는 언어들로 짐작되는 여러 언어들을 간략한 구어체로 읊조리는 음성들과 사운드에 맞춰 사람들은 다시 집단의 소통을 서로 나누는 움직임에 몰두한다. 그럴 동안 문자들로 모자이크된 대형 인체 이미지가 무대에서 그 집단과 더불어 난무하다가 인체 이미지와 집단은 갑자기 파열(破裂)되어 사라진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훈민정음〉 ⓒ김채현 |
〈훈민정음〉은 3부분으로 진행된다. 먼저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자음과 모음을 이 시대에 헤아려 살피는 연구자의 행동이 그려진다. 그리고 시조 가창조로 흐르는 훈민정음의 소리나 국악 타악 리듬에 맞추어 자음과 모음이 인체로 구현되는데, 여기서 출연자의 인체들은 이러저러하게 조합되면서 자음과 모음의 형체를 뚜렷이 드러내기도 한다. 끝으로 한글 자모들 중에서 지금은 쓰이지 않는 여린히읗(ᅙ), 반치음(ᅀ), 옛이응(ᅌ)과 아래아(ㆍ)의 디지털 이미지들이 크게 투사되는 무대 바닥 위에서 한 사람이 배회하다가 추가로 등장한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자모들의 형상을 마임을 곁들인 느린 듀엣을 추는 것처럼 구현하고 나면, 스킨수트를 착용한 여남은 명의 집단이 휘몰이장단의 가야금·거문고 산조 가락에 몸을 싣고서는 양손목에 부착한 한삼(汗衫)을 맘껏 휘날리며 집단의 난장에 돌입한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훈민정음〉 ⓒ백연 |
〈랭귀지〉는 전반적으로 기존의 국내 발레 어법과는 거리를 두었다. 언어라는 소재의 선택도 그러하지만 이를 구현하는 방법 면에서 주시해볼 바가 있다. 컨템퍼러리발레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레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안무자 나름의 새 어법을 추구하는 의지가 읽혀진다. 그 대표적 예로서, 〈훈민정음〉의 중반부를 보면 한글의 자모 부호가 몸 관절을 꺾는 동작에 바탕을 두고 여러 가지로 형상화될 동안 한글 특유의 미적 조형성과 동시에 한글 자모(字母) 낱글자들을 갖고 노니는 유희성이 도드라진다. 안무자가 발레의 라인을 적절히 활용한 덕분에 한글과 발레의 결합을 더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은 듯하고 발레의 강점을 살린 구성법이라 하겠다.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훈민정음〉 ⓒ백연 |
백연발레프로젝트와이 〈훈민정음〉 ⓒ김채현 |
이 공연작이 발레를 기본 움직임 매체로 하는 측면에서 더 재검토되어야 할 바도 있었다. 〈바디랭귀지〉에서 안무자가 추구하는 태초의 언어와 발레가 공유하는 점은 무엇일까. 〈랭귀지〉가 발레의 경직된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어도, 〈바디랭귀지〉에서 태초의 언어로 펼쳐진 춤 움직임들은 발레의 형체가 뚜렷하였다. 사실 발레 자체가 태초의 언어가 아니라 고도로 문명화된 언어라는 점을 잠시 상기해보면 발레를 더 해체시킨 상태에서 태초의 언어를 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 또는 문명인이 태초의 언어를 그려낸다고 한들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의 언어에 필적하는 나름의 방법과 형식은 더 고안되어야 할 사항이라 생각된다.
안무자 백연은 〈바디랭귀지〉에서 무대 위 움직임을 실황으로 비추어 보이고 〈훈민정음〉에서는 레이저 조명의 추상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배경으로 투사하여 조금 입체적인 무대를 선사하였다. 물론 레이저 조명의 디지털 이미지가 한글 자모의 이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더블빌의 두 프로그램 모두에서 상반신의 자유분방하며 즉흥적인 움직임과 연결되어 몸 전체의 굴신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부분들이 정점을 찍곤 하였다. 또한 〈랭귀지〉 전체에서 안무자는 서사의 면에서 굳이 러브스토리에 연연하지도 않은 채 언어라는 문화적 산물을 소재로 채택하였다. 이 대목에서는 흔히들 머무는 발레의 소아적인 취향을 탈피하여 인간과 세계를 보는 안무자의 성숙한 관점도 유추해보게 된다. 이를 토대로 안무자는 발레의 경직된 움직임 규칙과 전시적인 인체 라인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서는 전신의 굴신을 비롯하여 유난하게 상체 움직임의 확장을 기하는 데 적극적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랭귀지〉는 국내 창작발레의 일반적 경향을 벗어난 컨템퍼러리발레로서 주목할 공연작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