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일소당 음악회
전승자들의 육성으로 듣는 춤이라는 유산(遺産)
이지현_춤비평가

창덕궁과 종묘는 현재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보자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체감되지만 실제로는 북악산 줄기가 흘러내려 창덕궁으로 이어지다 종로쯤에서 마치 둥글고 길쭉한 주머니 모양으로 맺어져 그 안에 종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줄기라 해도 엄연히 용도가 다른 두 공간은 사이에 도로를 두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으며, 그 도로에 위치한 돈화문 국악당은 앞으로는 창덕궁을 마주하고 있고 뒤로는 종묘로 등에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왕의 현실 정치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죽은 왕의 공간의 경계’에 놓여 있다.

2016년 개관한 돈화문 국악당은 공연 공간으로는 왜소한 편이지만 ‘일소당’(佾韶堂)을 우리에게 소환함으로써 조선 예악의 중심이 ‘이 자리’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각인시키는 힘으로는 전혀 작지 않다. 조선에서 궁중음악과 춤을 보존, 교육하던 ‘장악원’은 일제하에서 이왕직아악부(1911)로 축소되었는데(약 700명에서 50명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왕직아악부를 일소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왕직아악부의 운니동 신청사의 소극장이 일소당이었고, 자체 발표회나 환영회 공연으로 1945년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들고 났던 궁중음악 활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전쟁 전란 중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이 53년에 서울로 돌아와 당연히 이왕직아악부, 거슬러 올라 장악원을 기억하였을 것이고 그 안에 다시 ‘일소당’을 복원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라의 음악으로 제례와 연회를 담당하는 국악사를 키우고, 공연을 하는 동시에 일반인을 위한 강습회나 국악감상회를 여는 등 예전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그 이후 외적인 변란은 없었지만 우리는 과거를 중히 여기고 보존하기보다는 발전과 확장을 위해 달리던 시절을 경과하면서 기존의 건축적 흔적을 쉽게 버리고 낯설 정도의 새 건물로 지금을 살고 있다. 그나마 장악원, 이왕직아악부, 국립국악원의 좌표가 겹쳐지는 일대에 돈화문 국악당이 둥지를 튼 것은 우리에게 조선의 음악과 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축적된 장소, 조선의 음악과 춤의 행위가 흩어지지 않고 쌓여 있는 장소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되는 큰 다행으로 여겨진다.



일소당 음악회, 동희스님과의 대담 ⓒ서울돈화문국악당



2022년부터 시작된 ‘일소당 음악회’(예술감독 송현민/ PD 전호정)는 매년 연초에 4명의 명인을 모시고 주로 명인들이 간직한 옛 사진을 놓고 이야기와 공연을 가볍게 이어가는 토크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다. 국악이 중심이 되는 극장이다 보니 주로 국악 명인들이 출연하였고, 작년에야 채상묵선생과 올해 영산재 전승교육사 동희스님과 종묘제례 일무 전승교육사 김영숙선생이 춤의 명인으로는 귀하게 초대되어 춤과 음악이 공존하는 단어인 ‘춤 일(佾)’과 ‘궁중 음악 소(韶)’의 균형을 맞춰 격을 갖춰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입춘이 지났건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한창이던 2월 5일, 동희스님이 단아하게 일소당 음악회의 첫 번 째 무대를 여셨다. 무대가 열리자 도량 정화를 위해 돌듯이 스님들과 악사들이 대형 화문석이 깔린 무대를 한 바퀴 돌고,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동희스님의 영축게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전에 관세음보살이 오시기를 청하는 복청게 그리고 다라니에 맞춰서 추는 천수바라(일구스님, 진용스님)의 무대가 이어진 후 스님을 모시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동희스님의 영축게 ⓒ서울돈화문국악당



동희스님의 운심게 ⓒ서울돈화문국악당



일구스님, 진용스님의 천수바라 ⓒ서울돈화문국악당



스님의 첫 번째 사진은 6살부터 어머니처럼 거둬 주신 상길 스님과 95년경 찍은 사진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경무대에 근무하셨던 아버님과 어머님이 갑작스럽게 전사하시면서 고아가 된 스님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비구니 사찰인 청량사에 맡겨졌다. 스님은 그날을 눈이 많이 온 날이었고, 다른 스님들이 잠깐 가자고 손을 이끄는 사이 할머니께서 에돌아서 몰래 가시던 뒷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올해 만 여든이신 스님은 한동안은 눈만 뜨면 울었던 소녀를 기억하셨다.

우연히도 스님이 맡겨진 청량사는 염불 도량이었다. 당연히 스님도 염불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범패를 한 곡씩 배워가기 시작했다. 국민학생이 되기도 전에 한글과 천자문, 초발심자경문을 익히고 깨친 스님은 범패에 그 어린 마음이 달래졌던 것인지 계를 받기 전에는 정식으로 배울 수 없었던 범패와 바라춤을 어깨 너머로 혼자 익히고 외웠다고 한다. 너무 하고 싶은 마음에 양재기를 두드리며 징을 흉내 냈고, 냄비뚜껑 두 개를 몰래 가져다가 칡 순으로 끈을 만들어 묶어 절 뒤 야산에서 스스로 익혔다고 한다.



동희스님과의 대담 ⓒ서울돈화문국악당



일소당 음악회가 우리 음악과 춤의 명인들이 주는 역사의 켜를 무겁게만 느끼지 않고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비법이 있다면 그것은 송현민 예술감독의 사회 솜씨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재치와 유머 감각으로 그 어려운 선생님들이 헛웃음을 짓게 만들고, 입담과 재롱으로 긴장감을 덜어내어 그것을 보는 관객은 그의 촌철살인 말장난에 선생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박장대소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본인도 고백했듯이 예상된 반응으로 터져주기는커녕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막막한 침묵의 순간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되어 버린 흔치 않은 경우는 동희스님 편이었을 것이다.

스님은 본인이 말재주 없음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스님의 역사는 다른 명인들의 스토리와는 결이 달랐으며 스님의 대화 방식이나 반응의 방식 역시 스님의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만큼이나 남다르셨다. 일상에서 가끔 뵈면 스님은 권위적이거나 경직된 분은 전혀 아니시다. 오히려 다감하시고 섬세하리만큼 상대를 배려하시는 게 몸에 깊이 배어있는 수행자이시다. 그래서인지 입담이나 재롱의 세속의 결과는 다른, 그것이 아무리 잔물결을 일으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일소당 음악회 동희스님 편의 묘미였고 공부거리였다. 그렇다고 송현민감독의 유머가 많은 실패를 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아침에 동희스님과의 음악회를 한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아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어머님이 깝치지(?) 말고 스님 말씀 잘 듣고 오너라 하셨다는 얘기로 객석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소한 예일 뿐이다.





일소당 음악회, 김영숙선생과의 대담 ⓒ서울돈화문국악당



같은 주에 두 번째로 열린 종묘제례악(일무) 전승교육사이신 김영숙선생의 토크 콘서트는 스님과는 반대로 송현민감독의 입담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입담과 직접 춘앵전으로 첫무대를 열고, 보존회 이수자 8명의 정대업 소무(昭武)와 선위(宣威), 그리고 다시 김영숙 선생이 전폐희문을 선보임으로써 꾹꾹 눌러 담은 듯한 프로그램으로 충족감을 주었다. 불교의식무 만큼이나 종묘제례악 역시 일반인이 다가가기에는 역사적 켜도 두껍고 내용도 쉽지 않으나 그것을 실행해 온 예인들의 목소리로 그 과정을 전해 들으면 그것은 한층 친근하고 피부로 느껴지는 힘이 있다.

김영숙선생은 이대 무용과를 75년에 졸업하고 그 당시로 대부분의 한국무용 졸업생들이 창작춤을 하거나 승무, 살풀이 등의 전통춤을 선택할 때, 한복을 좋아해서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한국춤을 추기 시작했던 소녀는 드물게 국립국악원에 입단하고 거기서 스승인 김천흥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 후 실기와 연구는 이어져 81년 석사논문을 다듬고 보충하여 〈현행 일무고〉로써, 1956년 일무에 관한 첫 번째 출판물과 1970년 김기수선생님의 〈보태평, 정대업의 악장과 일무보〉의 뒤를 잇는 귀한 연구서로 인정받게 된다.

그렇게 연구와 교육을 이어가던 선생은 1967년에 국가무형유산으로 일찌감치 지정된 일무이였지만, 원래 제례가 진행되던 시간인 축시(丑時)에서 3시간 이상 진행되던 것이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5월 첫째 일요일 낮에 연행되면서 시간적으로 전장을 다 하기 어려워 축약본을 하게 됐을 때 전장의 형식이 사라질까 걱정하던 김천흥선생님과 성경린선생님으로부터 전장을 다 외워서 공연하라는 숙제를 받았고, 선생은 그 숙제를 88년 11월 25일 〈김영숙 종묘일무발표회〉공연에서 완성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팸플릿 사진과 김천흥선생님의 추천사 사진, 리허설을 끝내고 두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는 장면 등을 보면서 펼쳐진다.



정대업 소무(昭武) ⓒ서울돈화문국악당



동희스님과 김영숙선생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은 역시 스승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각자의 공부 속에서 빼곡한 메모와 개성적인 무보는 기본이고, 스승으로부터 구전심수(口傳心授)되는 의례의 연행은 스승과의 깊고 집중된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그 빈자리에 더 강한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스님 역시 1995년 12월 3일 공연이 뜻깊다. 송암 스님 80세 생신을 맞아 그간 공부한 범패와 작법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공연을 송암스님이 “저잣거리에 올리지 말라”시며 허락해주지 않으셔서 94년엔 매만 맞고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스님은 불굴의 고집으로 95년 다시 추진하게 되고 다시 송암스님께 고집 세다고 혼나고, 맞을 거 같아 방문 밖으로 도망쳐서 나오면서 그냥 하겠다고 하면서 결국 공연을 준비하게 된다.

혼자 외롭게 준비하던 스님에게 송암스님께서 8월쯤 상황을 물어보시는데 스님은 전에 없이 영산재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낯선 과정을 손수 준비해야 했던 어려움이 눈물로 터져 나와 펑펑 울었더니 그 후 한달 간 송암 스님이 연습을 하루도 안 빼고 매일 봐주시던 기억, 그리고 당일 1회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바로 매진이 되어버려 시골에서 버스로 올라온 단체 손님들이 안보면 안가겠다고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져 극장 측을 설득하여 30분 후에 다시 2시간 넘는 공연을 이어서 하게 된 에피소드, 그리고 공연을 할 당시에는 무대 막 옆에서 송암스님이 손수 순서와 진행을 열정적으로 챙겨주시던 모습 등의 이야기에 묻어나는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은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애써 강조하지 않는 순수한 그 자체로 전해졌다.

하나의 의례를 평생, 50년 넘게, 70년 넘게 하고 계신 두 분은 전승교육사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승자이고 지킴이이자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전달하는 교육자 역할을 하고 계신다. 두 분은 춤의 의상과 도구를 자신의 몸처럼 챙기고 손수 만든다. 악·가·무가 여러 무구들의 상징과 혼융되어 있는 형식을 보존회를 통해 또 다시 몸으로 건네고 다듬는다. 그리고 두 분 똑같이 자신의 업에 대한 정진과 애정에서 나오는 어떤 기운이 강력했고 아름다웠다.

그 긴 시간 동안 어려움은 왜 없었을까. 동희스님은 95년 공연을 마치고 그해 12월 20일을 정확히 기억하신다. 청량사에 불이 났고, 틈만 나면 법당에서 연습하기 위해 옆방에서 기거하던 스님은 모든 자료까지 옆에 두었던 그 방까지 불이 옮겨붙으며 모든 무보, 기록, 소품, 사진 등 모든 자료를 잃게 된다.

스님에게 그 일은 정말 큰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무너지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길게 흘렀다고 한다. 송암스님께서 그것을 알고 부르셔서 얘기를 들으시더니 “다 불타고 없어졌지만 내가 있지 않니?”라는 한 말씀을 주셨고, 동희스님은 저절로 두 손을 모으고 빌면서 “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바로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도 법당을 다시 복원하는 데는 6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김영희 〈춘앵전〉 〈전폐희문〉 ⓒ서울돈화문국악당



두 분의 마지막 무대는 역시 공통적으로 무대를 꽉 채우고 관객과 나누는 것이었다. 동희스님의 마지막 소리는 화청(和請)으로, 어느 재에서나 항상 마지막에 대중들에게 복이 오도록 염원하고 회향하는 순서이다. 송현민감독은 돈화문 국악당이 들어가도록, 일소당 음악회가 잘되도록 꼭 넣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마치 정초 기도처럼 스님은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조화를 통해 못 이룬 일 들을 이루는 한 해가 되도록 화청으로 기원해 주셨다.

김영숙 선생의 전폐희문(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전폐절차에 맞춘 음악과 춤) 역시 선생 춤의 역사와 그 역사에서 그대로 쌓인 힘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첫 춤이었던 춘앵전 복식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여성적 복식이었고, 전폐희문의 복식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남성적 의상이었음에도 선생에게 전폐희문의 의상과 춤은 그 위엄과 절도에서 가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직접 듣는다는 것은 참 사적인 느낌을 준다.

돈화문 국악당이 아담한 극장이어서 사랑방에 모여서 옛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에 도움을 주었지만, 계획하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 표정, 숨소리와 웃음, 탄성 등이 자연스레 무대와 객석을 오가는 그 느낌도 특별했다. 그것에 묻어있는 솔직한 느낌은 자연스러워서인지 생생하게 살아있었고, 생생한 것은 오래 남는다.

이런 토크 콘서트가 아니면 관객이 따로 각자 그분들의 그런 기억의 편린을 어디서 어떻게 듣고 느낄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술채록이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전문적이고 의도적인 질문과 대답이라면, 이런 토크 톤서트는 문화유산과 그것의 실체,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그것을 담지하는 사람의 언행을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감각적이고 인간적이었다. 악.가.무가 표출되는 장소는 사람이었고, 거기에 육성이 더해져 악·가·무는 이제 그 전에 무대 위에서 만나던 그 제례가, 그 영산재가 아닌 새로운 것이 되었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5. 3.
사진제공_서울돈화문국악당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