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리스 신화에 레테강이 있다. 망자가 명계(冥界)로 가면서 건너야 할 다섯 강 중의 하나로, 망각의 강이다. 레테강물을 마신 망자는 전생의 기억을 지우며 번뇌를 잊게 된다. 하여 기억의 소멸은 그 역할이 긍정시된다. 오늘날 군림하는 모바일과 SNS가 기억과 추억의 용도로 기승을 부리는 흐름에 취하다 보면 기억의 소멸은 군말없이 하찮게 여겨질 법하다. 김영진의 안무작 〈배니쉬루프〉(Vanishloop)는 사라짐의 현상을 다룬다. 배니쉬=사라지다, 소멸하다, 루프=고리를 이어붙인 배니쉬루프, 소멸이 순환 반복된다는 뜻이다. 〈배니쉬루프〉에서 그는 남성 듀오의 형식을 통해 상동성 형태라 칭할 만한 드문 춤 구성을 진행하였다(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4월 26~27일).
듀오는 김영진과 동년배인 김성훈, 두 사람이 펼친다. 서로 같은 학교에서 컨템퍼러리댄스를 동문수학했고 영국의 아크람칸무용단 단원이었던 경험도 공통점이다. 게다가 훤칠한 체격에다 평소 스킨헤드인 점도 그렇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일상적으로 격의 없이 소통하는 관계가 아닌가 한다. 더욱 결정적으로 이런 점들이 이번 공연에서 상동성(相同性)과 같은 특징을 조성해내는 데 있어 요긴하게 작용한 것 같다. 단순히 춤과 움직임뿐만 아니라 춤꾼이 지닌 신체·관념·춤기법 측면에서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듀오를 전개하는 춤은 접하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고유한 조건을 십분 활용한 공연이다.
우선 그 구성이 흥미롭다. 공연의 도입부를 보면, 어둠 속에서 금속 굉음이 들려오며 천장에서 수직으로 늘어뜨린 기다란 파이프에 핀조명기가 달려 추 모양으로 좌우로 흔들리고 검정 수트를 걸친 남자(김성훈)가 등장하여 추의 흔들림을 응시할 동안 무대는 암전된다. 이어 강한 쇠소리가 들리면서 무대에는 가로로 긴 사각창 모양의 나지막한 공간에서 백색 조명이 눈부시게 비치고 그 공간 속에 놓인 수술대 같은 테이블 위에 앞의 그 남성이 마치 진단을 기다리는 자세로 사지를 가지런히 해서 누워 있다. 시네마 필름 컷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윽고 일어난 남성은 아래를 보거나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거나 테이블 주변을 이동하면서 생각에 잠기기, 드러눕기,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테이블 아래로 쓰러져 바닥에서 꿈틀댄다. 굉음은 들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였고 마침내 관객을 바라보며 테이블에 상체를 내밀다가 바닥에 쓰러져 한쪽 다리를 든 포즈를 취한다. 이 불안정하며 뜬금없는 동태들은 어떤 불연속적인 출현과 소멸로 받아들여진다.
김영진 〈배니쉬루프〉 ⓒ김채현 |
이어 다른 무용수(김영진)가 등장하는데, 그 차림새는 앞의 출연자와 동일하다. 그가 테이블에 눕자 테이블 아래위의 두 사람은 각자 위치에서 똑바로 누워 한쪽 다리 그리고 두 다리 굽혀 세우기, 그 상태에서 몸 세우기, 비스듬히 뒤로 앉아 팔을 뻗어 바닥에 놓다가 당기기 같은 포즈들을 거의 동시에 지속하고 몸을 돌려 사지로 바닥을 짚어 엉덩이를 치켜세우기, 바닥에 앉기, 서로 같은 포즈로 모로 눕기를 시전한다. 이윽고 테이블 위 무용수가 내려와서도 둘은 서로 접근하거나 떨어진 관계 속에서 엇비슷한 움직임과 포즈를 반복한다. 이러는 동안 둘 사이에서는 일테면 데칼코마니로 처리된 움직임 같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며 그러한 대칭성은 지속되다가 어느 듯 사라지고 다시 지속과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였다. 공연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칭성은 순간의 지속을, 대칭성의 헝클어짐은 그런 순간의 소멸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안무자는 지속되는, 반복되는 것은 필경 사라질 것이며 반복은 소멸의 상대 개념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김영진 〈배니쉬루프〉 ⓒ김채현 |
공연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두 사람은 무대를 매우 넓게 점유한다. 둘이 무대 정면을 향해 돌아서서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일렁이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기를 반복한다. 서로 응시하다 한 사람이 퇴장한 후 남은 사람이 돌발적인 짧은 질주, 몸 일렁이기, 몸 구부리기, 비틀기를 느리게 하는 동안 한 사람은 핀조명기 몇 대를 무대 왼쪽에 설치한다. 조명이 빛을 발산하고 이어 두 사람은 발광하는 포즈를 빠르게 펼친다. 한 사람이 포즈를 멈추고 무대 오른쪽에 핀조명기 몇 대를 추가로 설치한다. 조명기들이 끄진 상태에서 한 사람이 무대 벽 쪽으로 접근, 애당초에 소개된 그 매달린 추 같은 조명기에 접근해서 그것을 일렁이자 방향을 무대 상하좌우로 바꾸는 조명기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나와 무대에 빛이 난무하고 연무(포그)도 화염처럼 번져오른다, 이 난무를 목격하는 출연자들은 금속성 강한 굉음과 빛이 난무하는 암흑 속에서 우두커니 서서 배회하다 조명기를 멈추자 조명기의 빛도 사라진다. 이 난무 현상도 소멸의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기타음이 주도하는 음향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느리고 부드러운 대무가 서로 접촉 없이 유연하게 펼쳐진다. 매우 서정적인 이 부분은 대칭적인 동작들이 아주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렇게 다양한 대칭적인 동작을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며 진행하는 이 부분은 아름다운 듀오로 다가오며 곧 이 지점에서 이번 공연 전반에 걸친 대칭성을 상동성이라 칭하게 된다. 이어 두 사람은 상동적인 춤을 멈추고 그 무언가를 찾는 낌새를 보이고 격한 동작 끝에 쓰러지기도 하지만 다시 경쾌한 타악 음향을 타고 상대의 둘레를 배회하거나 상동성의 움직임에 몰입하며 무대를 산뜻하게 왕래한다.
종반부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서는 쓰러진 한 사람이 바닥에서 꿈틀대자 검정 액체가 스며 나오고 조명기들은 재배치되며 쓰러진 사람은 멀건히 앉아 있다. 거룩한 분위기의 허밍 음향이 경건하게 고즈넉하게 들리자 앉은 사람은 쓰러져 뒤척이다 일어나고 그의 주변에는 검정 액체가 흥건하다. 수수께끼 같은 검정 액체는 끝없이 반복되는 소멸 현상의 배후를 조종하는 어떤 원리 즉 고리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이 배회하다 이미 서 있던 상대방 앞에 앉자 상대방도 앉는다. 두 사람 모두 나란히 앉은 자세로 다시 상동성의 동작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거룩한 허밍 음향이 그대로 이어지는 속에서 두 사람은 상체를 약간 숙여 바닥을 응시하고서는 팔동작만으로 상동성 동작을 개시한다. 재빠르게 변하면서 연속되는 양팔 동작은 대칭적이며 갈구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면서 모양을 바꿔나가는데, 그 동작들이 폭넓고 강건하며 유려하게 그리고 가히 열성적으로 지속되는 동안 무대는 암전된다.
김영진 〈배니쉬루프〉 ⓒ김채현 |
〈배니쉬루프〉 중반부에서 아름다운 듀오로 다가오는 부분, 경쾌한 타악을 타고 흐르는 듀오 부분은 그 자체의 춤으로서 완성도를 갖는다. 말하자면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향유하기에도 적절한 대목들이기도 하다. 소멸은 필연적이며 온갖 현상 저변의 원리라는 상식적이되 건조한 주제의 공연을 넉넉하게 즐길 대상으로 만드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비교적 길게 지속되는 이점을 살려 보다 심화된 의미 설정이 요구되었다. 일테면 소멸 현상이 아니라 소멸 배후의 피할 수 없는 원리를 환기하는 방향으로 깊이 있는 구성을 생각해볼 만하다.
안무자는 별 장치 없이 움직임만으로 남성 듀오라는 다소 이색적인 접근을 단행하였다. 흔치 않으며 자칫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부터 불러일으킬 남성 듀오 형식을 〈배니쉬루프〉는 두 출연자의 진지한 접근으로 헤쳐나갔다. 미니멀한 분위기의 무대에서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남성 듀오로 공연을 풀어나간 점은 주목을 요한다. 상동적인 움직임들이 남성 듀오를 더욱 남성 듀오답게 만들었고, 역으로 남성 듀오가 아니었더라면 상동적인 움직임들이 좀체 부각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사라짐은 물리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론에 부딪혀 소멸되는 주장, 이론, 생각, 느낌은 흔하다. 세상에 따라 윤리도덕율이 달라지는 사이 낡은 것들은 사라진다. 착(着)을 끊으라는 언어가 단호하게 돋보이는 이유이다. 사라짐과 소멸을 끝없이 은유하는 공연 〈배니쉬루프〉는 소멸의 구실을 더 상상하게 한다. 소멸 현상의 매끈한 제시는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보다는 상상을 유도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세상사, 사라지는 것을 과연 누군들 멈출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방도는 무엇인가.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