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도슨트 프로그램의 형태로 전문 춤단체가 안무한 〈민주의 물결〉 공연을 열고 있다. 서울역 인근에 위치하고 과거에 민주화운동 관련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이른바 남영동 대공분실이 지난 6월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변경되었다.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마련된 행사 가운데 하나인 〈민주의 물결〉 공연은 올해 12월까지 매주 금~일요일에 열린다. 지난 8월 중순에는 시민 참여자들이 출연하는 〈민주의 물결〉이 시도되어 참여형 커뮤니티댄스 면에서도 그 의의를 다지는 바가 있었다.
〈민주의 물결〉은 1960년 부정선거에 맞선 3·15 의거로부터 최근까지 현대 한국 민주주의에서의 주요한 사건들과 그에 맞선 시민·청년들의 활동들을 축으로 펼쳐진다. 4·19 학생의거, 5·16 쿠데타, 박정희 정권, 유신 치하 긴급조치, 5월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정권, 6월 항쟁 등이 그려지되 연대기식으로 나열되지는 않는다. 전체 30분 정도의 공연 시간에 길게는 65년(1960~2025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헤쳐온 길이 파노라마식으로 급박하게 전개되되 곳곳에 방점이 찍혀 몰입도를 높여주었다. 공연이 진행된 공간은 기념관 공간들 중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실상을 상설 전시하는 1실과 2실, 두 공간으로서 각 공간의 LED 대형 화면에 떠오르는 전시 이미지들 자체가 공연 무대 배경을 이루기도 하였다. 공연은 1실에서 먼저 진행한 다음 2실로 이동해서 지속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의 물결〉 ⓒ김채현 |
먼저 1실에서 두 출연자가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가족이 겪은 고통을 각자 서너 문장의 짧은 독백으로 외치자 분위기는 일순 숙연해지며 이내 자기들이 실은 출연자로서 가상의 독백을 한 것이라며 분위기를 일신시킨다. 곧장 이어 1960년의 3·15 의거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사건들을 알리는 신문 보도 지면과 관련 사진 이미지들이 기다란 LED 대형 화면에서 속속 나타났다 사라지며, 동시에 그 화면들을 배경으로 청년들이 몸짓 움직임으로써 당시 상황들을 재현해나간다. 이 부분을 마감한 것은 붉은색의 긴 한삼을 쥐고 추는 춤이다. 이 춤은 6월 항쟁 당시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있었던 춤처럼 민주열사들의 추모를 비롯하여 부활, 항거와 동일한 의미와 정서로 다가온다. 그 춤이 마무리되는 즉시 두 출연자가 등장하여 관객들에게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 없이 꿈이 가능할까요?””고 물으면서 혼자서는 지킬 수 없는 민주주의를 참여함으로써 성장시키자는 생각을 내놓는다. 이 생각에 따라 출연자들은 누가 어떻게 참여하여 한국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는지 알아보기 위해 2실로 이동할 것을 제안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의 물결〉 ⓒ김채현 |
2실은 원래부터 민주화운동사에서 사회 각 부문의 활동과 사건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1974년의 긴급조치 제4호를 비롯하여 1960~70년대 농민들의 이농 현상과 핍박한 도시 노동 현장, 1980년 이후 언론 통폐합과 보도지침 등의 언론 탄압,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참상을 촬영하여 해외로 알린 독일 방송기자의 영상에 이어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불평등한 현실 너머 자유로운 개인을 존중하는 세상을 꿈꾸는 통기타 노래, 광주를 비롯 희생당한 원혼들이 일어서는 디지털 이미지가 떠오른다. 공연 끝에 이르러, 평등 세상을 향해 밝은 모습으로 나서는 사람들의 디지털 이미지들 앞에서 두 출연자가 생활 민주주의를 위해 생활 민주화 공간으로서 항상 이 자리 기념관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보인다. 이 순간 출연자들은 헌법 제1조를 함께 낭송하며 팔을 치켜들었다. 헌법 제1조가 2025년 탄핵 촉구 현장에서 강하게 외쳐진 사실과 〈민주의 물결〉 공연이 1실에서 1960년의 3·15 의거로 시작한 사실을 연결해본다면 〈민주의 물결〉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길게는 65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헤쳐온 길이 조망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의 물결〉 ⓒ김채현 |
〈민주의 물결〉에서는 디지털 영상과 춤뿐만 아니라 몸짓, 집단 행동, 때때로 긴박감을 동반하는 음향, 내레이션이 쓰여 멀티미디어 퍼포먼스 형태로 진행된 공연이다. 동원된 매체들 사이에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은지 분간하기 어렵게 각 매체들의 활용도는 높다. 여러 면에서 준비한 내공이 엿보인다. 내레이션에서도 관객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제 나름 대안을 제시하는 대화형의 문답법이 등장하곤 하였다. 문답법은 관객이 자주 자신의 주변 현실을 의식하도록 하는 서사극적 효과도 동반한 듯하다. 이런 점에서 이 공연은 멀티미디어의 춤드라마,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주제의 춤드라마라 불러 무방하겠다. 누구나 아는 사회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만큼 이 공연에서 재현적인 동작이 다수를 점한다. 게다가 참여하여 함께 민주주의를 성장시키자는 결의가 주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는 계기로서 몸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여기서 몸짓은 항거하는 동작, 급박한 동작, 당하는 동작, 함께하는 동작들로써 춤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전반적으로 에너지가 강한 굴신과 뻗침이 자주 등장하는 가운데 춤들은 명료한 의미를 밀도있게 전달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의 물결〉 ⓒ김채현 |
〈민주의 물결〉은 온앤오프무용단의 한창호 감독의 안무로 공연되었다. 춤 전문 출연자들의 〈민주의 물결〉이 지속되는 가운데 8월 16일 오후에는 시민 관람객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시민들의 참가 신청을 받고 3차례의 워크숍을 거쳐 공연된 시민판 〈민주의 물결〉에는 온앤오프 단원 6인 포함 20명 남짓의 출연진들이 참여하였다. 공연의 전체 구성은 무용단의 〈민주의 물결〉과 동일하다. 원래 〈민주의 물결〉이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안내하고 이해시키는 도슨트 맥락에서 기획되었으니 만큼 시민판 〈민주의 물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도슨트가 되는 주체적 체험을 가졌을 것이다. 참여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효과는 작지 않았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교육 차원에서 시민판은 더러 시도해볼 만하다. 〈민주의 물결〉 자체가 공동체의 이슈를 소재로 하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커뮤니티댄스인 것은 물론이다. 특히 시민판 〈민주의 물결〉은 시민들의 참여가 자신들의 이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더욱 커뮤니티댄스가 되기 마련이다. 향후에라도 혹시 하게 된다면 시민판 〈민주의 물결〉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참여자들 각자의 소견과 이슈를 수렴하여 적극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울 것이다. 그러려면 워크숍의 기간 늘이기 같은 여건부터 따라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민주의 물결〉 1실 공연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넘실대는 물 이미지로 상징되는 박종철 열사의 희생 및 6월 항쟁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2실 공연에서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관련 피고인들에 대해 사형 언도를 남발한 법원과 관련한 사형(死刑) 문자 타이포그래피 이미지, 독일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해서 한국 외부 유럽 등지로 은밀히 유출해서 세계에 알린 광주 희생자들의 참혹한 장면 등 그 일부만 보아도 한국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있어 희생은 엄청났다. 최근 8년 동안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을 다행히 평화적으로 이룬 것, 심지어 내란을 막은 것은 큰 진전이다. 하지만 부분적 일례이긴 하나 일상적으로 산재 현장에서의 희생이나 혐오 행태 등등은 사실상 끊이지 않고 있다. 정작 우리 곁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지해 있는 듯하다.
기복이 있는 중에서도 세계가 주시하는 한국 민주주의를 K-민주주의라 하는 경우도 있는 터에, 평자가 생각하기에 〈민주의 물결〉에서는 생활 민주주의가 한국 민주주의의 향후의 과제로 환기되었다. 산재, 혐오 등등을 막는 것 또한 그런 과제에 속하는 것은 물론이다. 생활 민주주의는 단적으로 생활하는 사람 모두, 즉 주권자의 일상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렴하는 민주주의가 아닐까 한다. 헌법 제1조를 외침으로써 공연이 마무리되는 것은 이를 상징한다. 헌법 제1조를 외치고 다짐하는 데 있어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기억의 계기는 많아야 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기념관 차원의 공간들은 소중하다. 〈민주의 물결〉은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를 전망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도약이 요청되는 현단계에서 온앤오프와 제작진은 단단한 준비 작업의 〈민주의 물결〉을 통해 춤이 한국 민주주의에 동참하는 한 방도를 제시하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