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홍콩발레단·광주시립발레단
동시대 스토리 발레의 핍진성과 개연성
정옥희_춤비평가

9월 26-27일 양일간 두 편의 스토리 전막 발레가 공연되었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과 광주시립발레단의 〈해적〉(광주예술의전당 대극장)이다. 두 작품 모두 큰 호응을 받았는데 그 힘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극장예술춤 중에서 발레가 인기가 높은 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테크닉뿐 아니라 이야기의 힘이 크다. 춤으로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발레의 출발점이다. 내러티브 없이 한 시간 이상의 작품을 끌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20세기 초에 발레가 여러 문화권으로 전파된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난 세기 발레의 이야기 내용과 방식이 동시대 관객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 이야기에 깔린 혐오와 편견은 물론이거니와 장황하고 산만하다. 3초도 긴 세상이다 보니 오늘날의 발레단들은 전막 발레를 2시간 내외의 2막 구성으로 축소하는 이유이다. 어떻게 낡은 이야기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 점에서 두 발레단은 2시간-2막 포맷으로 정비한 스토리 전막 발레의 동시대적 형상을 보여준다 하겠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은 고전을 현지화했다. 2017년에 부임한 예술감독이자 안무가 셉팀 웨버는 〈로미오 + 줄리엣〉의 무대를 중세도시 베로나에서 1960년대 홍콩으로 옮겼다. 2차 세계대전 후 홍콩은 영국 식민지이자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성장을 이루며 중화권 문화와 서양 문화가 독특하게 어우러지던 장소였다. 지금도 홍콩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네온사인 간판과 어지러운 비계 건축물, 영화 포스터가 점철된 시노그라피를 배경으로 홍콩 유력 가문의 로미오와 삼합회와 연관된 상하이계 가문 출신의 줄리엣이 사랑에 빠진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 ⓒYOON6PHOTO/프레스토컴퍼니



그런데 1960년대 홍콩의 활기찬 거리를 시각적 스펙터클로 소진하는 게 아니라 작품 전체의 세계관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핍진성(verisimilitude)이 뛰어나다. 웨버는 드라마터그 얀 팻 토와 함께 홍콩 황금기의 생활상을 섬세하게 녹여냈다. 주요 캐릭터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밀리에 이어주는 로렌스 신부는 “시푸(사부)”가 되었는데 홍콩에서는 쿠롱반도 상하이가(街)에 모인 시푸들이 무술과 접골, 한약까지 다루었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더한다. 유모 “아마”는 홍콩에서 식모를 지칭하는 단어로 60년대엔 흰 저고리에 검은 바지의 전통복식, 그리고 결혼하지 않음을 표시하는 긴 땋은 머리로 시각화되었다. 티폴트를 음차한 “타이포”는 시비꾼을 지칭하던 대만어에서 왔고, 머큐시오와 벤볼리오는 중국식 애칭 “리틀(小) 막”과 영어식 애칭 “베니”로 균형을 잡는다. 한편 줄리엣의 약혼자 파리스인 “궤일로” 미스터 파커는 서양인을 폄하하던 명칭으로 격동기 문화접경지의 뉘앙스를 드러낸다. 이처럼 캐릭터의 명칭에 중국어 고유어를 사용함으로써 현지화에 구체성을 더한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 ⓒYOON6PHOTO/프레스토컴퍼니



나머지 인물과 공간, 상황 역시 20세기 후반 홍콩의 정경을 깨알같이 묘사하며 토착 홍콩인, 나아가 세기말 홍콩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국수와 죽, 딤섬 등을 파는 노점상, 스리피스 양복 차림의 남자 회사원과 청삼(치파오) 차림의 여성 회사원들, 새장을 들고 산책하는 사람 등이 초급 코드라면 로켓 모양의 철통에 든 올리브 간식 “페이 카이 람” 상인과 바가지머리에 안경을 낀 TV 드라마 속 인기 여성 캐릭터 “람 아우 춘”, 미니스커트와 부풀린 머리의 불량한 소녀들 “페이 누이” 등은 고급 코드다. 한편 로미오 삼인방이 잠입하는 파티장이 홍콩 유명 식당이었던 플로팅 점보레스토랑(珍宝海鲜舫)이라는 점은 고급 식당에서 약혼식이나 결혼식을 하는 관습을 반영하고, 삼합회가 검은 가죽코트를 휘날리며 죽창과 각목, 나무걸상을 들고 닥치는 대로 싸우는 장면은 〈천장지구〉나 〈영웅본색〉 등의 홍콩 느와르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 ⓒYOON6PHOTO/프레스토컴퍼니



홍콩 종합선물셋트 같은 이 작품은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여가문화서비스부(여가문화부)가 주최하는 ‘홍콩위크 2025@서울’ 행사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 다시 말해 국가홍보적 성격이 다분한 기획이며, 그 점에서 홍콩판 〈로미오 + 줄리엣〉은 그 취지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다. 하지만 기획이 완성도와 대중적 호응을 끌어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로미오 + 줄리엣〉은 홍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몰라도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층위의 현지화를 중첩했다. ‘깨알 같은 고증’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 요인으로 언론에서 지겹도록 거론되던 바이거니와 로미오와 줄리엣이 단지 낯선 배경에서 이국적인 옷을 입고 춤추지 않도록 붙잡는 구심점이기도 하다.



홍콩발레단의 〈로미오 + 줄리엣〉 ⓒYOON6PHOTO/프레스토컴퍼니



연출은 무대 전환이 많고 빠르며 로렌스 신부 장면을 중심으로 늘어지는 장면을 줄였다. 촘촘히 삽입된 움직임은 동선이 크고 역동적이다. 군무가 복잡하게 얽히고 특히 무용수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동작을 다수 사용하여 수직적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데 능하다. 전반적으로 상업 뮤지컬처럼 매끈하고 화려하다. 다만 균질한 질감의 움직임이 연속되다 안무적 개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발코니 파드되와 같은 핵심적인 장면의 임팩트가 약했는데, 이는 무용수의 감정이나 교감이 충분히 형성되기 전에 조급하게 춤추려 하기 때문이다. 쉴 틈 없이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조금 자유로워진다면 더 강렬한 작품이 될 것이다.





광주시립발레단 〈해적〉 ⓒBAKI/광주시립발레단



한편 광주시립발레단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마린스키발레단 프리모르스키 극장의 예술감독 엘다르니 알리에브가 2015년에 재안무한 〈해적〉을 선보였다. 운영비가 빠듯한 지역 공공발레단이 50여 명 무용수가 출연하는 대작을 초연했으니 엄청난 투자라 할 수 있다.

바이런의 동명 서사시를 바탕으로 탄생한 〈해적〉은 고전 발레 중에서도 유독 개작을 거듭해 온 작품이다. 해적 두목 콘라드가 파샤(오스만투르크의 지방 총독)을 공격한다는 설정 외에 안무가마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변용했다. 주요 캐릭터는 콘라드와 파샤 외에 해적단 이인자 비르반토, 그리스 소녀 메도라와 귈나라, 그리고 노예상 랑뎀 등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노예시장에 팔려온 메도라에게 반한 콘라드가 귈나라의 도움으로 메도라를 파샤의 하렘에서 탈출시키는 한편 비르반토가 콘라드를 배신하려는 이야기를 축으로 한다. 이야기가 이슬람혐오 및 여성혐오적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오늘날 무용단들은 아예 공연하지 않거나 발췌하여 공연하고, 국립발레단의 송정빈 버전(2020)처럼 아예 모호한 공간과 캐릭터로 개작하기도 한다.

알리에브 버전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노예시장에서 귈나라와 메도라가 차례로 파샤에게 팔리고 하렘에선 파샤를 위해 무희들이 춤추고 파샤는 귈나라에게 보석을 바친다. 알리에브의 파샤는 매우 코믹하고 과장된 캐릭터로 악인이라기보다 얼간이에 가깝다. 이런 연출은 소재의 불편함을 완화하고 큰 웃음을 유발하며 흥을 돋운다. 하지만 납작한 캐리커쳐화가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라는 점에서 고민거리는 남는다.



광주시립발레단 〈해적〉 ⓒBAKI/광주시립발레단



알리에브의 〈해적〉을 관통하는 단어는 개연성이다. 〈해적〉을 2막으로 압축하기 위해 메도라와 애정을 쌓아가는 주동인물 콘라드와 이에 방해되는 반동인물 파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1막에선 상인으로 변장해 노예시장에 온 콘라드가 노예로 팔려 온 메도라에게 반하고 〈잠자는 미녀〉나 〈돈키호테〉처럼 꿈에서 그녀를 만나 관계를 진전시킨 후 그녀의 탈출을 결심하고, 2막에선 하렘에 잠입해 귈나라의 도움으로 메도라를 탈출시켜 해적 동굴로 돌아와 해적들의 축하를 받는다. 비르반토의 배반 서사, 나아가 비르반토 캐릭터를 삭제했고 이야기와 상관없이 〈해적〉을 상징하는 베리에이션을 추는 콘라드의 충신 알리 캐릭터도 삭제했다.





광주시립발레단 〈해적〉 ⓒBAKI/광주시립발레단



이처럼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압축하면서도 주요 춤들을 생략하지 않고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해적〉이 문제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이유가 다채로운 춤들 때문인데, 안무가는 주요 춤들을 적재적소에 재배치하며 살려냈다. 2막의 ‘생기의 정원’이 1막 꿈 장면으로 바뀌고 오달리스크 삼인무는 2막 하렘으로 옮겨갔다. 비르반토는 사라졌지만 총을 들고 추는 베리에이션은 살리고, 알리의 베리에이션 역시 콘라드가 행한다.





광주시립발레단 〈해적〉 ⓒBAKI/광주시립발레단



프롤로그-에필로그에서 배 위에서 항해하는 타블로(tableau)로 해적이라는 소재를 초지일관으로 보여주고, 장면 전환 역시 바다 영상으로 해적의 공간 이동과 분위기를 표현했다. 무대에선 콘라드-파샤, 파샤-메도라 등의 관계라 명료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대중적 호응을 높였다.

홍콩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 모두 공공발레단이자 대형발레단으로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대중적 호응을 끌어냈다. 스토리 발레는 유치하다고 폄하되곤 하지만 이야기를 잘하는 작품은 의외로 드물다. 이 점에서 〈로미오 + 줄리엣〉과 〈해적〉은 동시대 고전 발레의 형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5. 10.
사진제공_YOON6PHOTO, 프레스토컴퍼니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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