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진한 〈우물우물〉 
명멸하는 허탈감, 바닥 밀착의 끈질김 
우물대는 모습은 최진한에게 유다른 의미를 갖는 듯하다. 최근작 〈우물우물〉은 우물우물거리는 나를 주시하는 춤이며(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9월 27~28일), 그가 근 10년 전 올린 솔로 〈우물〉(2016)도 소재 면에서는 유사하였다. 〈우물〉에서 어느 청년이 헬조선에 대응해서 행동에 나서는 양상들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따돌려서 언행마저 우물우물하기 일쑤인 어느 개인의 행동이었다. 이와는 사뭇 다르게 〈우물우물〉은 일곱 사람이 사회 속에서 우물우물대는 집단을 이루되 사회와의 연결고리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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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한 〈우물우물〉 ⓒ김채현  | 
안무자는 〈우물우물〉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크림〉에 등장하는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이라는 구절에서 착상되었다 한다. 이런 도형은 떠올려지다가 사라져버리는 속성이 있을 것이고, 안무자는 이를 살아가는 현실에서 느껴지는 어떤 심정적인 실체로 구성해내었다. 여기서 개인들은 세상을, 서로를 어정쩡하게 대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어간다. 〈우물〉에서 뚜렷하던 직설적이며 공세적인 마인드는 〈우물우물〉에서 순화되었고 배경을 이루는 세상은 좀 막연히 분위기로 짐작되는 선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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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한 〈우물우물〉 ⓒ김채현  | 
〈우물우물〉 공연 내내 4박자의 메탈 타악 음향이 반주로 들린다. 공연의 저변을 이루는 이 사운드는 규칙적으로 반주되지만 사운드 배경의 역할을 할 뿐 움직임과 정해진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공연 개시부에서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두 다리를 꼬무작거리는 일곱 사람들의 대형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흩어진다. 7명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닮은 꼴의 동작을 전개하여 그들이 하나의 무리임을 나타낸다. 무표정한 상태에서 상호간의 감정 교환은 보이지 않으며 잠시 손을 잡는 순간을 제외하면 접촉도 시도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서로 남남이되 가까이 위치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그들은 관계를 지속한다. 그 관계는 무엇보다도 도약이 전무하며 바닥을 잘게 디뎌나가면서 몸을 오그리거나 굽힌 양팔을 아래위로 또는 앞뒤로 흔들고 간혹 다리를 펄럭이거나 머리를 두리번대고 몸을 돌리는 움직임들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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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한 〈우물우물〉 ⓒ김채현  | 
집단 구성원들은 1시간 동안 서로 닮은 자세로 바닥을 디뎌가며 다양한 구도를 소화해내었다. 그들의 의상은 옅은 살구색조의 짧은 소매의 상의와 바지에 주름을 입힌 것으로 동일하다. 이 집단은 한 사람을 나타낼 수도 있고 여러 사람 각자를 나타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어떤 갇힌 상태에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교감과 신뢰는 더욱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마디로 세상 속의 허탈감이 마치 꿈속의 그림처럼 여러 가지로 모양을 바꾸며 명멸한다. 손 봐야 할 점으로서 작품의 부분 부분들에서 의미를 특정하기에는 모호한 면이 있으나, 〈우물우물〉은 개개인의 내면을 들춰내 보이는 그 이상으로 바닥에 발을 디뎌가는 동작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집요하게 구성해나가는 끈기가 돋보인다. 
김성민 〈황폐한 땅〉
사회적 상상력으로 끌어낸 블랙코미디
김성민 안무작 〈황폐한 땅〉은 〈호두까기 인형〉의 음악과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의 사회적 시각을 텍스트로 차용해서 구성된 발레이다(국립정동극장 세실, 10월 16~19일). 〈황폐한 땅〉은 〈호두까기 인형〉 및 〈황폐한 집〉의 줄거리와는 무관하다. 1850년대 영국 소설가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어느 상속 소송에 휘말린 가정이 소송 비용으로 유산을 탕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영국의 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하였다. 〈황폐한 땅〉은 오늘 우리 주변의 암울한 이면을 그리되 경쾌한 터치를 가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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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 〈황폐한 땅〉 ⓒ김채현  | 
공연은 붉은 투피스에다 검정 양말, 까만 선글래스를 착용한 여자가 푸른색 형광 빛 대에서 사방을 휘젓다가 사라지면 검정 가운과 검정 의상, 검정 모자와 양말에다 기다란 부리 가면을 착용한 예닐곱명이 등장하여 집단적 움직임을 펼쳐낸다. 그들이 착용한 것은 이른바 흑사병 코스프레 코스튬이라는 것이며 중세의 공포와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공연 초반부터 흑사병 코스프레 코스튬이 등장함으로써 지금 세상의 상황이 그처럼 암담하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안무자의 단도직입적인 문제의식이 읽히는 설정이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젊은이들이 쓰러지고 일어나며 살려고 발버둥치는 갖가지 모습들이 상당히 빠르게 연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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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 〈황폐한 땅〉 ⓒ김채현  | 
그 붉은 투피스의 여자는 잦은 등퇴장과 솔로 연기를 통해 출연자들을 채근하거나 다독이며 공연의 진행을 주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여자의 역할은 〈호두까기 인형〉의 마법사 드롯셀마이어의 것과 닮았다. 여자는 쓰러졌다 재기하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그들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 쓰러진 사람을 구조하고 사람들의 기를 돋우곤 한다. 사회의 관찰자로서 부산스럽게 등퇴장하는 그 여자는 드롯셀마이어에다 좀 과장된 연기가 말해주듯이 코믹한 성격이 더해진 인물로 설정되었다. 그 여자가 관찰 목격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긴급히 구조되어야 하거나 소수 인원들끼리 결속하다가 자포자기에 이르고 다시 뭉치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호두까기 인형〉의 ‘꽃의 왈츠’ 곡은 〈황폐한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기운을 차려 안개가 자욱한 세상을 헤쳐나가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는 사이에 무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은 눈발은 여전히 암울한 메시지를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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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 〈황폐한 땅〉 ⓒ김채현  | 
〈황폐한 땅〉은 블랙코미디 발레이다. 발레뿐 아니라 우리 춤계에서 (블랙)코미디는 희소하다. (블랙)코미디를 종종 만날 만큼 춤의 폭은 넓어져야 할 것이다. 안무자 김성민이 〈호두까기 인형〉을 뒤집어 자기 스타일로 구성해낸 〈황폐한 땅〉은 2024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주목받은 바 있다. 코미디 류의 춤이든 아니든 간에 고전에 새 옷을 입히고 심지어 비틀어서 새 창작물로 구현하는 작업은 해외 컨템퍼러리발레에서는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황폐한 땅〉에서 자주 교체되는 장면들 사이에 유기적 연결을 강화하고 그중에서도 방점을 찍으며 구성을 더 가다듬는 것도 필요해 보이지만, 특히 안무자가 창작의 자극을 고전 텍스트와 김성민 자신의 사회적 상상력처럼 가까운 데서 찾은 사실은 그의 창작 요령을 말해준다. 이번 공연은 국립정동극장 세실이 자체 기획한 창작 공모 프로그램(창작ing)의 일환으로 올려졌다.
백연 〈바디- 시뮬라크르〉
테크놀로지 기반의 춤이 담은 시뮬라크르
로봇에 더하여 이제는 인공지능 같은 소프트웨어까지 가세하여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을 백연은 〈바디- 시뮬라크르〉에서 상당히 복합적인 이슈로 제기하였다(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0월 19일).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휴머노이드가 출몰하면서 인간의 위치는 흔들리는 중이다. 〈바디- 시뮬라크르〉 공연은 휴머노이드에다 인간을 동반하는 파트너의 역할을 적극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되묻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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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연 〈바디- 시뮬라크르〉 ⓒ김채현  | 
공연의 막이 올라가기 전부터 무대에는 뛰뛰를 입은 로봇이 서 있었다. 이 로봇이 팔을 놀리며 자신을 발리라 소개하면서 로봇의 춤이 진짜 춤일지 가짜 춤일지 객석의 판단을 묻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막이 열리고 로봇은 걸어 퇴장하며 이어서 의사처럼 가운을 걸친 사람이 로봇 개발자인 듯하게 또 다른 로봇과 물건을 주고받는 관계를 진행한다. 그런 다음부터 무대에는 하얀 마스크를 쓴 복제 인간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실제 인간이 서로 맺어가는 관계가 벌어진다. 발리와 또 3대의 휴머노이드, 그리고 여러 조각들로 구성된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과 더불어 복제 인간들이 관객들을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처음에는 인간이 복제 인간을 조종하는 위치에 있는 모습이지만 곧 복제인간들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휴머노이드의 카메라로 촬영된 무용수의 흩어진 실루엣 이미지가 뭉그러진 상태를 바꿔가며 비춰지기도 하며 사지동물처럼 걸으며 돌아다니는 휴머노이드에는 인간의 얼굴 가면이 부착되어 있다. 그냥 옅은 살구색의 스킨수트를 걸친 복제인간들이 사지를 뻗치며 노니는 것이 가상 세계의 일일 뿐이라면 환상적 장면들로 감지될 만하겠는데, 실제 닥쳐올 목전의 현실이 그럴 것이라 깨우친다면 느낌은 확 달라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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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연 〈바디- 시뮬라크르〉 ⓒ김채현  |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주로 붉은 조명이 진하게 곁들여지고 돼지머리와 소머리를 결합한 큼지막한 두상 모조품을 한 출연자가 들고 나와서 이리저리 애써 만지기를 지속하다가 그것을 비닐 속에 뭉쳐져 있는 인간들에게 전달한다. 비닐이 벗겨지면 그 두상 모조품을 머리에 뒤집어쓴 인간을 인간 집단이 무동 태워서 행진한다. 동시에 스크린에는 인간의 뇌, 장기, 세포 같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일렁거리듯이 비춰지고 동물들의 아우성 같은 소리도 들린다. 한 마디로, 이식이나 생명 유지를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행태를 단서로 생명 윤리 같은 이슈가 제기된다. 천장에 매달려 여남은 개의 대형 인체 모형이 하강하고 스크린에 인간의 손, 다리, 발 부분을 클로즈업한 이미지가 비춰진다. 건장한 인체 모형 아래에서 인간을 복제 인간이 조종하며 우위에 서는 듯한 인상을 주다가 복제 인간이 자기들의 세상을 구가할수록 인체 부분 이미지들은 더 흐릿해진다. 인공에 의해 실재하게 된 몸이 마침내 원본의 몸을 밀어내는 상황이 도래한다. 이러는 사이에 복제 인간에게 씌워졌던 하얀 마스크는 어느덧 눈에 보이지 않는다. 풀이하자면 원본은 사라지고 복제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우두커니 선 한 사람 주변을 휴머노이드가 배회하다 퇴장하는 동안 스크린에는 뭉그러진 인체 이미지와 바코드가 비춰지고 남자는 몸부림치다 제 홀로 물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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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연 〈바디- 시뮬라크르〉 ⓒ김채현  | 
〈바디- 시뮬라크르〉에는 소재가 소재이니 만치 에너제틱한 움직임들의 매끈한 처리와 함께 사지와 몸통의 직선적인 뻗침과 관절 꺾임 동작이 자주 등장한다. 복제 인간들 사이의 움직임에서도 설령 복제 인간들이 접촉을 하더라도 감정의 교환은 감지되지 않는다. 아직은 휴머노이드가 유연하지도 감정을 가진 주체로서도 개발되지 않은 단계라 그럴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언젠가는 휴머노이드만으로 공연이 진행될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몸에 대한 탐색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현단계에서 〈바디- 시뮬라크르〉는 인간의 절대성이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였고, 인간이 직면할 갈등이나 충돌보다는 시뮬라크르가 득세하는 양상에 중점을 두었다. 테크놀로지가 빠르게 진화하는 추세 속에서 종착점을 예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춤의 앞날을 가늠해야 하는 상황에서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춤은 목전의 이슈가 되고 있다. 원본과 대조되는 시뮬라크르 개념을 적용한 이번 공연은 원본을 향한 멜랑콜리를 넘어 시물라크르를 적극 주체로 환기한 드문 공연이 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