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신적 실질을 드러내거나 재창조하는 새로운 춤은 어떤 것인가. 이미 있지만, 다 말할 수 없었던 것 혹은 이전 춤에서 없었던 내면, 다시말해 새로운 내면. 이것만큼 새로운 것이 또 있을까. 작고 섬세하고, 가장자리에 있으며 깊숙이 있는 것. 춤 이전의 감각.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전류 같은 것.
이러한 춤이 장유경이 말하는 춤과 사람을 말하는,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로 보인다. 우리가 춤추는 이의 그 춤속으로 들어가 그 안의 미세한 감정의 움직임을 본다면, 우리 안의 아직 닳지 않은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좋지 않은가.
하여 ‘장유경춤전’은 전통춤의 다른 갈래가 아니라 새로운 내면을 보여준 춤이라고. 그로인해 춤을 보는 이들은 전통가락에 맞춘 춤동작을 수행하는 기능여부를 볼 것이 아니라 춤을 통해 조금은 다른 내가 되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장유경춤전’(서구문화회관, 12월 13일). 〈선살풀이〉 〈입- 입소리에 춤을 얹다〉 〈시나위. 혼자추는 춤〉 〈지게춤〉 〈부채춤〉 〈소고춤〉에 신작 〈부채산조- 영남,선비정신으로〉 〈도라지춤〉까지 모두 일곱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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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영 김순주 편봉화 〈부채춤〉 ⓒ옥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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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태 〈입- 입소리에 춤을 얹다〉 ⓒ옥상훈 |
‘맞이춤’으로 적절한 화사하고 예쁜 〈부채춤〉(김순주, 편봉화, 임차영)으로 무대를 연 무대는 김현태의 〈입- 입소리에 춤을 얹다〉(장유경류)로 이어진다. 〈입- 입소리에 춤을 얹다〉는 고요하게 서서 (입)소리속에 저 극명한 시간의 초월을, 가락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시작되는 춤으로 〈선살풀이〉와 함께 서늘한 아름다움이 압권인 작품이다.
무대 중앙에서 보일 듯 말 듯 춤을 추다가 도포 앞자락을 걷어 뒷짐을 진채 바닥을 버선발로 꾹꾹 다지듯 밟고, 팔사위는 섬세하게 장단을 감아챈다. 장유경의 춤 〈입-입소리...〉가 물질의 영화가 초월된, 성성한 정신의 춤이라면 김현태의 춤은 유약한 ‘선비’라기보다 단단한 의지를 다지는 조선 ‘청년’의 춤이다.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다. 갓은 중인들이 쓰던 것이다. ‘청년’의 춤 이미지는 의연한 춤과 복식이 주는 것일 수도. 같은 춤의 서정이 이렇듯 다르다. 장유경 안무와 연출감각의 특장점이다. 장구소리가 이끄는 듯, 처음 섰던 자리에서 뒤돌아 서자 살짝 수그린 등에 어리는 그림자. 작은 수건을 꺼내들자 (입)소리가 이어진다. 수건을 들고 추는 춤. 수건에 실린 상념의 무게가 천근이나 되는 듯 어깨에 얹은 수건과 함께 아래로 내려 앉았다가, 수건을 뿌리며 위로 솟는다.
어딘가를 건너고 있는 듯한 (입)소리. 성큼 걸어나온 뒤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서 있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잠깐 정적이 인다. 좋은 춤은, 추는 이든 보는 이든 절대적인 것으로만이 아니라 우연한 것으로도 초월한다는 거. 누구나 출 수 있는 춤이 아니다. 자진모리에서 휘모리로 가락이 변하자 마치 모든 고뇌와 시름을 날려버리듯, 가볍게 몸을 띄운다. 좋은 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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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봉화 〈소고춤〉 ⓒ옥상훈 |
푸른색 치마에 초록저고리를 입은 편봉화의 〈소고춤〉. 소고와 채를 든 팔로 바닥을 턱 짚고 어우르는가 하면, 소고를 툭 쳐서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뜀을 뛰고 돌아드는 춤에서 편봉화의 춤성장이 읽혔다. 치열하고 벅차게 살아낸 삶, 시련 따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마치 춤으로 다다를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만든 춤이다. 힘 있고도, 담담하게 추어낸 춤. 전통춤(몸)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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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민 〈시나위·혼자추는 춤〉 ⓒ옥상훈 |
이준민(달구벌입춤 보존회 대구지부장)의 〈시나위·혼자추는 춤〉(장유경류). 어둠속에서 징이 낮게 울린다. 아니 말한다. 징소리가 사라질 즈음, 이준민이 춤을 얹는다. 무대를 크게 돌아 들며 춤으로 극장의 공기를 풀고 죈다. 전통춤 복식에서 비껴난 의상이 이채롭다. 붉게 떨어지기 전의 노을빛 같은 얇은 겉옷에 짙은 고동색치마, 그 안에 주름 잡힌 검붉은색 자줏빛치마를 겹쳐 입었다. 뭐랄까. 마치 붉음의 격렬함을 살아야 할 의무와 그 격렬한 운명을 감추어두고 (춤)꽃으로 피어야 할 의무 같은 의상이다. 춤선이 크고, 비장하다. 휘모리장단으로 치닫으며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제치듯 크게 팔을 열고 나서는가 하면 뒷걸음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겉옷을 소품처럼 벗어든 겉옷을 어깨에 얹고, 뿌리고 흔드는 춤사위에서 이준민의 단단한 내면이 읽힌다. 채 춤을 마무리하기 전에 미리 아웃된 조명. 응원하듯 악기들이 모두 나서 두드려대는 휘모리장단이 무대를 메운다. 다시 조명이 들어오자, 담담하게 장단을 받아낸다. 이준민에게 이 춤은 절제된 삶과 사고의 틀 속에서 춤에 헌신할 시간과 용기를 다시 회복하고, 현실이 차지하던 그 자리를 춤의 생명력으로 다시 채웠던 시간의 축적이다. 쉽게 그칠 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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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재 〈부채산조-영남, 선비 정신으로〉 ⓒ옥상훈 |
서상재(아트팩토리 대표)의 〈부채산조-영남, 선비 정신으로〉. ‘경상도의 옛선비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남성춤을 만들고 싶었다’는 장유경의 안무 노트. 흰색바지저고리에 겨자색 쾌자, 선비의 갓을 쓰고, 부채를 들었다. 등장이 기존의 전통춤과 다르다. 미리 보여주고(춤을 잘 춘다는) 시작하는 춤. 돌아서자 거문고소리에 이어 장구가 따라붙는다. 춤이 유장하다. 평상시 걸음으로 성큼성큼 무대를 걷는 걸음에서 휘릭 연결되는 춤사위는 경상도의 젊은 선비(?)의 호방함이 느껴지는가 하면, 연신 싱긋거리는 얼굴로 징검다리를 건너듯 겅중거리며 뛰다 걷는 춤은 유유자적하는 젊은 한량의 모습이 보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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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 김용철 〈도라지춤〉 ⓒ옥상훈 |
‘도라지타령’에 얹은 ‘도라지춤’이라니. 뜨악했다. 장유경이 ‘권명화선생 학원에 처음 들어가 맨 처음 배웠던 춤’이었다는 말대로 ‘도라지춤’은 그 시절(1960년대) 무용학원에서 가르치던 연습용 춤이었다. ‘춤의 기억을 되살려 민요의 정서와 삶의 향기’를 얹어 풀었다고 하지만 ‘도라지춤’을? 하나 기우였다. 김정미와 김용철의 〈도라지춤〉(장유경 안무)은 재미와 예술성을 모두 잡아낸다. 하늘하늘 날아갈 듯한 보라색 치마저고리에 꽃바구니를 든 김정미와 무대 상수쪽 지게에 기댄채 잠이 든 노인(김용철)을 배치. ‘도라지타령’에 맞춰 춤을 추는 여인(김정미)과 잠에서 깬 노인이 떨리는 다리로 여인을 향해 구애하듯 꽃을 흔들다 주저앉는다는 이야기. 노인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춤에 빠져있는 여인은 도라지꽃말(영원한 사랑) 같다. 유순함과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는 노인의 춤연기와의 구도가 마치 현대회화를 보는 듯도. 하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표현 영역을 넓히는 데 활용되는 화폭 나누기 기법 말이다. 그런가 하면 김용철의 떨리는 두 다리와 양손에 든 보랏빛 꽃무더기는 〈헌화가〉를 떠올리게 한다. 신라 성덕왕대에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위해 지었다는 그 〈헌화가〉. 노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두 무용수의 출중한 춤연기가 작품에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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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태 〈지게춤〉 ⓒ옥상훈 |
김현태가 춘 〈지게춤〉(장유경안무)은 무대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이다. 전통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면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새참을 내오는 아낙이 등장하는가 하면, 혼자춤으로 춤기량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번 무대는 홀춤으로 ‘풍년가’에 맞춰 작물을 심고 추수하는 과정동안 내내 사람좋은 함박웃음을 짓는 젊은 농부의 춤이야기다. 간혹 춤추는 이들은 과거를 잊거나 거부하려고 애쓴다.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의 춤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장유경은 그의 지나온 춤역사, 전통춤의 어떤 부분도 거부하지 않는다.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고 여겼던 (‘도라지춤’ ‘지게춤’을 보라) 춤 주제를 그는 훌륭하게 되살려낸다. 아마 오래도록 전통춤과의 균형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후 전달될지 잊힐지 모를 일이지만 장유경이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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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살풀이〉 ⓒ옥상훈 |
마지막 〈선살풀이〉(장유경류). 2003년에 초연, 2019년에 재구성한 작품이다. 흰색 갓, 의상, 살풀이천을 매단 부채를 든 13명(장유경 신진숙 김순주 김정민 이나영 편봉화 서보근 김현태 이준민 김정미 서상재 장현지 유지홍)의 춤, 아름다웠다. 무대 가장자리를 휘돌아 들어오며 동선이 겹치지 않게 엇갈리는 흰물결. 엇갈리고 비껴 들어오다가 균형을 회복하는 연출은 점차적으로 속도가 붙는 과정의 불규칙성을 가려준다. 이것은 교차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절묘한 예로, 장유경이 〈선살풀이〉를 구상한 원칙인 새로운 자신만의 춤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감각이다. 보일 듯 말 듯, 가장자리에서 제자들의 춤을 받쳐주다 어느 순간 가운데서 균형을 잡고 담담히 추는 장유경의 춤, 빛이 났다.
장유경이 제자와 스승이라는 자신의 가난한 자리를 항상 지순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춤으로 실천해온 춤삶이 만든 무대였다. 제자를 아끼는 인정과 미덕의 터전으로 만든 무대 말이다.
창작춤을 (신)전통춤으로 옮기는 장유경의 작업. 이런 종류의 창조는 그의 제자들이 추고 추고자 할 춤들이 그 춤 속에, 또는 춤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믿음 속에 무리 없이 스며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제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장유경류 춤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장유경에게서 그의 제자들에게로 그가 그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봉하는 춤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춤의 분파. 춤을 그 허망한 장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춤 그 자체로서 실천하는 장유경의 신전통춤. 장유경의 새로운 춤은 전통춤의 복식이나 춤기법의 경계에 서 있다. 이는 새로운 (신전통)춤이라는 장르의 규정성보다는 춤의 확장성에 더 주목할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전통에 바탕한 새로운 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대구의 춤꾼들, 장유경의 제자들과 그의 춤을 좋아하는 관객의 등장이 있다.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