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비평 기획_ 한국 & 벨기에 공동제작 (Nymf)
이지현_춤비평가

벨기에 니드(NEED) 컴퍼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허성임이 아바토와 페르메 극단과 함께 새 작품을 초연했다. 한국의 3명 무용수와 벨기에의 3명 배우가 출연한 이 공연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수의 창작작업이 국내 공공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 춤계의 글로벌 춤시장 진입을 의미하는 작업이다. 2명 비평가의 현장비평과 연출가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주)




비평 기획_ 한국 & 벨기에 공동제작 <님프> (1)리뷰


여성 변태 실험실 탐방

   

 “몸의 언어로 만나는 여성의 이야기” <님프(Nymf)> (허성임 & 아바토와 페르메 극단, 8월 21-22일.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는 님프(nymph)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지하의 차폐된 공간, 그것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실험실과 같은 공간속에서 시작된다.
 박스씨어터의 검은 벽이 그 예감을 잘 도와주고 있고, 한 장의 천으로 허술하게 가려진 작은 방을 가운데 두고 바로 옆에 커피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지고 있다. 아바토와 페르메의 배우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대에 나타나 웃어야 할지 긴장해야할지 출근 후 사무실에서 늘 상 있는 것 같은 일상의 동작들을 커피를 중심으로 꾸려 나가면, 최진한과 김혜경이 상하 모두 검은 옷을 입은 채 조작된 미소로 굳은 얼굴로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커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줄을 서서 커피를 받고, 각자의 위치를 점하며 어색하게 서고 포즈를 잡는다. 벨기에 극단의 배우 3명과 한국 무용수 2명의 이질적인 결이 외모 뿐 아니라 역할, 의상에서도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을 통해 많은 상상의 씨앗들이 뿌려지기 시작한다. 검은 공간, 가려진 유리 방, 커피머신과 그들의 춤과 행동에서 빚어지는 중첩된 코드가 현실과 상상, 두 세계에 대한 함축을 담은 채 탁월한 시작점이 된다.

 



 작은 방안의 한 장의 천이 거둬지면 여고생 교복을 입은 허성임이 의자에 전시되어 있다. 유치원 졸업 사진, 조화 등의 벽 장식은 그곳이 소녀의 방, 즉 소녀의 성장공간이자 소녀의 내면을 시각화 한 것이 되고, 갇힌 동물과 같이 ‘우리’의 밖을 도전적으로 응시하고 적극적으로 혹은 과장되게 자신을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몹시 위험한 동물’과 우리 밖 사람들과의 긴장이 유리방을 중심으로 생성된다. 그 방을 가리는 한 장의 천은 여고생에서 전라의 임신한 여성 사이의 격렬한 변태의 획을 그어주기도 하고, 유리 방 안의 현실태의 여자와 유리 밖의 여성을 겹치게 하는 극적 대비의 순간에서 허접한 존재감 이상의 힘을 발휘하며 공간과 시간, 존재감의 도약에 상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여성을 은유하는 님프는 여성스러운 창조력과 아름다운 것의 총체이며, 그것의 핵심은 10대 초반의 아이와 여성의 중간적 존재이다. 허성임의 <님프>는 소녀와 여성, 정확하게는 소녀와 임신한 여성을 전개하거나 대비시키면서 여성의 이야기를 몸의 변태로 지각할 수 있도록 하면서 풀어나간다.
 유리방 안에서 자신이 여고생에서 임신부로서의 몸을 전시하는 것 외에 김혜경이 유리방 밖의 공간에서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점점 이질적 존재로 소외되기 시작하고 사체(死體)로 유린되는 과정을 유리방 밖의 펼쳐놓은 공간에서 벌어지게끔 함으로써 관객은 뚜렷하게 여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강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방안의 임산부와 방밖의 유린된 여성이 둘 다 벌거벗은 상태로 겹쳐져 관객을 향해 전면적으로 직립하게 되는 후반에는 존재와 전개의 복선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작품의 주제가 깔끔하게 정돈된다.

 



 이 작품은 특별히 잔혹한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의사가운을 입고 서류받침과 펜을 들고 무언가를 체크하고 기록하는 행동이나 고무장갑을 끼고 양동이를 들고 물감을 뿌리거나 적시는 행동이 조금은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그 공간에 주체와 객체가 분명하게 나누어져 존재하는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며 객체인 여성이 처한 환경이 분리, 감금, 소외, 몸에 가해지는 거부할 수 없는 실험이나 수술 등을 연상하게 하면서 홀로코스트에서 느낄 수 있는 공포를 천천히 자극한다.
 남녀가 구분되지 않는 일반적인 몸에 대한 작품들은 몸의 생명력과 활력, 몸 에너지의 극한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거기에 댄스씨어터 형식의 작품들은 그런 몸과 현실, 사회속에서의 몸이 처한 갈등과 충돌을 풍자함으로써 즉자적이고 물질적인 몸 이야기에서 한층 깊은 이야기를 드러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성의 몸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은 많지 않을뿐더러 몸을 포함한 여성 존재, 외부의 환경, 그곳에서의 세밀한 지점을 포착하여 드러내는 작품은 더욱 귀하다. 말하자면 춤에서 여성의 몸은 주체가 되어 말하는 몸이라기보다는 시선을 받는 객체로 전시되어질 뿐인 경우가 많거나 남자와 분리되어 조망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몸으로 풀어내는 여성이야기의 다양한 층위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속에서 <님프>는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여성의 몸 이야기를 관객에게 지각시키고 있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 천진난만한 미소와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을 간직한 소녀시절부터 이미 조작된 미소로 갑옷을 입은 현실이 여성이 살고 있는 환경이라는 것을 몇 가지 설정과 연기자들의 행위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고도 풍부하게 드러낸다.
 그 이후엔 조금 더 강도를 높여 몸에 가해질 일방적인 폭력적 상황을 공포심을 관객에게 내장된 경험에서 끌어올려 느끼게 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이런 단순 재현이나 설명 방식에서 벗어난 구조를 통해 관객은 점차 모호한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미궁은 이성이 종합할 시간을 무색하게 만들며 더욱 지각의 더듬이를 세우게 만들고 있다.

 



 흰 상의와 속옷과 흡사한 흰 반바지로 갈아입은 최진한이 김혜경의 널부러진 몸을 안고 뒤채이며 추는 2인무 장면은 이 작품에서 춤이 가장 잘 포착해낸 여자의 몸에 대한 장송미사곡과 같다. 한 꺼풀씩 벗기 시작한 김혜경의 가냘픈 몸과 긴 머리, 무표정한 얼굴은 여고생 포효를 통한 생기 혹은 임산부의 풍만한 생명력과 반대항에 있다. 이미 모든 생명력을 다 흘린 몸과 추는 이 듀엣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며 마음에 큰 웅덩이를 만든다.
 제어되지 않는 몸, 어디서도 여성성이 발산되지 못하는 몸, 이미 물체가 되어 버린 몸을 다루기 위해 최진한이 동원해야하는 온몸의 힘과 접촉면, 그리고 체중의 부담이 이 듀엣의 재료이다. 처음에는 시간(屍姦)인 듯 죽어서도 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지겨움에서 죽어버린 누이의 시신을 안고 뒹구는 피붙이의 오열인 듯 이 춤은 의미와 느낌을 종횡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 듀엣에서 김혜경 몸이 너무 무용수의 몸이었다는 것과 최진한의 몸연기가 지향을 정확히 찾지 못하였던 점이 아쉬움이지만 그것이 이 듀엣의 비중을 약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런 아쉬움은 김혜경의 몸이 랩으로 말아져 웅크린 채 한덩이로 되었다가 그것이 옮겨지고 가위로 잘라져 다시 유리방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는 재공연시에는 얼마든지 의도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여지기에 감안될 수 있었다.
 안무가 허성임은 주제의식을 품는 힘이 상당해 보인다. 뚜렷한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화두를 잘 움켜지고 있으며, 실현의 방향성도 별 혼란이 없다. 게다가 그것을 자신의 몸과 자신의 감성을 쭈뼛거리지 않고 전시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는 것도 허성임이 가진 매력이다. 그러니 이번 상황이 임신한 몸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인지 연기와 춤, 연기자와 춤꾼의 분리가 편의적이어서 하나의 작품으로서 융합성이 떨어졌으며 음악사용에서 디테일한 신경을 쓰지 못해 작품 전체에서 작가적 감성을 더 풍부하게 담아내지 못한 점 등은 아쉽다.

 



 이즈음 무용가들이 방송을 타면서 방송논리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이미지에 부합되어지곤 한다. 현대무용가가 방송과 CF에 출연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보다는 세상이 요구하는 여성이미지에 자신을 상업적으로 내어주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릴 듣고 자라고, 무용해서 더 예뻐 보이고, 무균실 같은 무용실에서만 오랜 시간을 보내서 이 세상이 여성의 역사 중 어디쯤 와있으며 여성으로서 한 평생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 번이라도 몸으로 느껴보고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 현대무용가로의 그런 일을 흔쾌히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과연 현대적이라는 건 뭘까? 현대무용가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무얼 하는 사람일까? 그런 고민이 없고 생각을 운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몸과 얼굴이 예뻐서 호감을 주기에 큰 극장에서 많은 돈을 받고 현대적인 작품을 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조명을 받으며 하게 된다는 건 도대체 뭘 의미할까?
 그런 풍토와 수준이 허성임이 여성이야기를 하면서 오만상 찌푸린 얼굴과 그 뻔뻔하게 드러내는 몸뚱아리를 신선하게 보이게 하는 걸까? 여하튼 현대 안무가, 즉 작가로서의 안무가는 무용실(무균실)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된다.

 

2015. 09.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