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해외안무가초청공연 〈INTO THIN AIR:증발〉
상처로 숨을 쉬는 법
권옥희_춤비평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작은 해프닝을 블랙유머(?)로 확장시킨 <증발(INTO THIN AIR)>(토월극장, 11월 22~24일, 23일 공연 관람).

 <증발>. 진부한 주제를 진부하게 풀어낸 무대였다. 특히 시작부분 무용수들이 차례로 등장, 무대 앞에 한 줄로 늘어앉아 자신을 소개하는 구성과 각자의 대사 끝에 동시에 짓는 부자연스런 억지 표정과 연기는 난감했다. 날카롭고 재치 있는 '블랙유머'가 '증발'된 공연이었다. 보다가 잠깐 '증발'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중반을 넘어가는 무대를 지켜보다 문득 든 생각. '이디트 헤르만과 9명의 무용수들, 그들의 공연을 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살만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작품은 풀어졌다.

 무대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실, 숨을 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살자면 숨을 쉬어야 한다. 어디엔가 숨을 쉴 수 있는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구멍이 다 막혀버리면. E.카네티는 말한다. '상처는 허파다' 라고. 구멍이 다 막혀도 삶 안에는 마지막까지 남는 구멍이 있다. 상처라는 구멍. 그러나 이 구멍으로 숨을 쉰다는 게 쉽지 않다. 특별하고 깊은 사유와 실천의 기술이 필요하다. 허파역할을 하는 상처. 이디트 헤르만이 무용수들에게서 끌어낸 부분이다. <증발>에서 박수 받아야 할 이디트 헤르만의 사유(안무의도)이다.

 검정색의 무대. 무대 안쪽, 깊은 곳에서 스님(김동연)이 걸어 나온다. 민머리에 천으로 허리 아래만 둘렀다. 안경을 꼈다. 무용수의 안경. 당신들이 익히 알고 있는 춤은 추지 않겠노라는 의지로 보인다. 현실과 다르지 않는 어떤 것이 날 것 그대로 무대에 오를 것이라 짐작한다. '제게는 보여요'라는 캐릭터. 무늬만 스님이다. 이어서 등장한 무용수들이 하나 둘 무대 앞쪽에 나란히 앉아 자신의 캐릭터를 읊는다. '결혼한 여자' 이소진은 정성껏 모실 것을 다짐하고, '나쁜 여자' 박성현은 (뭔지 모르겠지만)무척 원한다고 말한다. '전지전능한 마술사' 조현배는 간단한 마술을 해보이고 '진실'의 이혜상은 스님과 놀아나느라 수고하신단다. '사랑에 빠진 남자' 박명훈은 "사랑합니다"고 거듭 소리 내어 외치지만 그 사랑을 실천할 의지는 전혀 없어보인다. '행운의 여인' 최민선은 매 순간을 즐겨드린다 하고 '기다림의 아이콘'인 지경민은 무대 앞쪽을 차지한 채 무엇인가를 내내 기다리며 혼자 잘 논다. 그리고 '영웅' 김호연.




 느끼지 못하는 여자는 스님과 손이 맞아(흔히 눈이 맞는다고 한다) 사라진다. 다시 나타난 둘은 서로 안고 입을 맞춘다. 한 여자는 주먹 쥔 손을 입에 넣고, 초록색 아이섀도우를 무섭게 칠한 무서운 여자는 칼을 입에 물고 웅크리고 있다. 와중에 스님과 느끼지 못하는 여자의 애정행각은 계속된다. 상대의 몸을 느끼고 둘은 엉키고 환호한다. 이어 환호 뒤에 다시 느끼지 못한다며 추는 여자의 춤과 칼과 주먹으로 대치중인 무서운 여자들. 지경민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빨강색의 높고 가는 굽을 가진 구두를 한 켤레 꺼내놓고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짓. 어쩌면 그가 기다리는 것은 하이힐을 신어줄 어떤 여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그 하이힐을 신을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기다리는 것은 편견이 없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일 수도. 비너스의 두상을 오른 쪽 팔에 끼운 채 포효하면서 나타나는 영웅(김호연). 석고를 낀 손을 다리 사이로 넣고선 박수를 친다. 세상을 향한 조롱으로 읽힌다. 구두를 들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남자. 비너스의 코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남자, 그 코를 ‘좋다’고 말하는 남자. ‘아름답다’와 ‘좋다’는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게 말하고 같은 것을 숭배하고 좇는다. 피가 흐르는 팔에 계속 끼고 있던 석고가 깨진다. 잔해를 무용수들이 영웅의 몸에 얹는다. 깨진 조각(좋고 아름다운 남의(서양) 것)이라도 몸에 붙여야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인가. 그것이 잘나 보이고 싶은 영웅, 우리가 원하는 모습일까.




 결혼한 여자를 잡아끄는 남자. 그 남자는 결혼한 여자와의 일탈을 시도하면서 ‘난 뭐든 가능하다’고 말한다. ‘난 결혼한 여자에요’를 외치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지만 곧 뭐든 가능한 남자의 손에 다시 끌려간다. 도망치며 ‘결혼한 여자에요’ 잡아끌며 ‘난 뭐든 가능하니까’의 반복된 움직임. 불륜공화국이라고도 일컫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이디트 헤르만이 읽었단 말인가. 아니면 무용수들의 고뇌인가. 입에 물었던 칼을 서로 빼앗는 여자들. 사랑한다는 외치지만 움직이지 않는 남자와 칼을 뺏으려는 여자들이 한데 엉켜 무대는 아수라장이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남자는 사랑이 너무 무겁다. 아예 하트모양의 쿠션을 베고 드러누운 남자와 달리 저마다의 캐릭터에 충실한 움직임으로 한바탕 난리법석이 일어난 뒤 갑자기 풀이 죽어 납작하게 엎드린 무용수들의 무대. 조울증을 앓는 한국인의 그것과 닮았다.




 이어 기다리는 남자(지경민)는 바지춤과 가슴께에 손을 넣은 채 사정없이 몸을 떨어댄다. 막춤을 추는 여자, 춤이 별거냐. 춤은 이렇게도 춘다고 말하는 듯. 여자가 주머니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 알맹이를 꺼내 뿌려댄다. 영웅이 다시 등장하고 무대 위 천장에서 보석이 쏟아져 내리고 바다에서 나온 듯 미역과 김으로 몸을 덮은 여자, 비너스의 코를 '좋다'고 말한 영웅은 비너스의 코 조각을 자신의 코 위에 얹고 나온다. 성형공화국의 또 다른 한국현실을 비꼰 듯. 영웅은 코를 크게 하고 싶다. TV에 나오는 남자는 다 코가 크다. 코가 납작한 한국인은 TV 개그프로에서나 볼 수 있다. 그것도 간혹. '영웅'은 백인의 모습이어야 하고 '영웅'은 백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




 수영복 위에 물미역을 뒤집어 쓴 여자. 조가비가 아닌 미역을 타고 나온 현시대의 비너스인가?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쓴 '나쁜 여자' 일뿐인가. 그녀는 김을 온 몸에 붙인 영웅의 몸(김)을 뜯어먹는다. 뜯어먹힌 남자는 초죽음의 상태에 이르나 쓰러진 남자를 아직도 뜯어먹는 여자. 여자를 뜯어먹는 남자보다 남자를 뜯어먹는 여자가 세계 어느 곳보다 많은 나라, 맞다. 남자에게서 명품을 뜯고, 고스란히 여자의 손으로 들어온 남자의 월급으로 남자에게 하루 5천원, 1만원의 돈을 용돈이랍시고 적선하듯 던져준 뒤 사랑과 미래라는 단어로 관계를 포장하는 여자들, 많다. 우리나라 여자들의 이런 삶을 다른 나라 여자들이 선망한다는. 그 관계의 우위에 서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는 얼굴과 몸, 정신이 피폐해진 괴물을 만든다. 초록색 섀도우의 '원하는 여자'(박성현)는 남자를 무참히 뜯어먹지만 정작 뭘 원하는지 모른단다. 끝없이 원하는 여자들의 초상이다. 뜯어먹혀 너덜너덜해진 남자(김호연)가 끌려 나가고 '나쁜 여자' 박성현은 물먹은 미역위에서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기를 거듭한다. 영웅이 뜯어먹히고 드러난 정체성. 더 이상 호기를 부리던 영웅이 아니다. 외피를 벗으니 그저 번데기처럼 초라하다. 상처로 얼룩진 김호연일뿐이다. 기다리는 남자는 혼자 연기 스프레이를 뿌려대며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하고 있다.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던 '기다리는 남자' 지경민에게 김호연은 스프레이를 끄라고 소리를 지르고 무대 위의 난장판을 상황을 잠시 정리한다. 미친 듯이 움직였던 자신을 추스르며 이어 ‘뭘 원하냐’며 객석의 관객들에게 묻는다. 하지만 바로 이어 ‘죄송합니다’ 하곤 느닷없이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으며 그 어머니는 편찮으신지 20년째라고 말한다. 비현실적인 현실이(어머니와 둘이 살고, 그 어머니는 20년째 앓고 계시다는 김호연이 저 곳까지(무대 위) 와 있다는) 현실 같지 않다. <증발>에서의 영웅(이고 싶었던) 김호연과 현실의 김호연 중 진짜 김호연은 누구인가. 또 다른 의미의 '블랙 코미디'다.

 대형 선풍기 9대를 설치한 구조물이 밀려나오고 바람을 일으키니 이 모든 상황이 일시에 날려 흔적도 없이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겪는 이 모든 난리와 법석 또한 어느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메시지. 마치 '느끼지 못하는 여자'를 반드시 '느끼게 해'주겠노라 여자를 좇아 무대를 종횡무진 하던 스님이 느닷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모든 것이 덧없으니... 아미타불"하는 것 같은 결말이었다.




 이디트 헤르만의 <증발>. 그녀의 비판적인 사유가 구체적 생의 현장들과 맞부딪힌 무대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 사회의 기만성과 그 안에서 상처 받은 삶의 속살들이 물어뜯긴 채 너덜너덜 드러났다. 우리의 세상과 삶의 풍경이다. 세련되지도 일상의 행위가 춤이 되지도 않은, 그래서 보는 재미는 없었지만 상처라는 허파로 숨을 쉬는,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시했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은 작품이었다.

2013. 12.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