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무용단 컬렉션_ 장현수 박이표(조재혁) 조용진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 놓인 창작 프로젝트
방희망_춤비평가

 국립무용단은 단원들의 안무력을 높이고 중간 규모의 창작품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4년 1월 한 달간 ‘국립무용단 컬렉션’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2012년에 공연된 바 있는 장현수 안무의 <팜므파탈>(1월10-11일)과 박이표 안무, 조재혁 조안무의 <이상증후군>(1월17-18일)을 KB하늘극장에 맞게 가다듬어 다시 올리고, 신작으로 조용진 안무의 <기본활용법>(1월24-25일)을 무대에 올렸다.
 춤과 음악과 시가 본래 한 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팜므파탈>과 <이상증후군>은 문학을 텍스트로 삼은 자못 익숙한 포맷으로 장르 간 결합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해볼 무대가 될 것이고, <기본활용법>은 국립무용단이 자체적으로 확립해온 유산인 메소드 춤 ‘국립 기본’을 소재 삼았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가 될 터이다.

 



정현수 안무 <팜므파탈>

 어린 걸그룹들이 악녀와 요부 이미지를 자처하여 뒤집어쓰면서 자신의 몸을 상품화해도 무감한 이 시대에, 역시 몸으로 말하고 먹고사는 무용수들이 <팜므파탈>을 들고 나온다면 적당한 절충점은 어디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5분도 채 되지 않는 잠깐의 흥을 위해 소비되면 그뿐인 걸그룹과 같은 출발선에 놓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윤리도덕의 근간을 흔들며 등장했던 역사적인 팜므파탈들은 물론 오랫동안 말 그대로 악녀로서 단죄되어 왔지만 현대로 오면서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는 흐름, 또 억압된 사회의 고여 있는 썩은 물을 고발하기 위한 소재로서 많은 예술가들이 채택해왔다. 그러나 팜므파탈들에게서 치명적인 매혹만 따와 기꺼이 그 포로가 되겠다는 시선은 그녀들을 마치 체제전복의 순교자 마냥 떠받드는 시선만큼이나 위험하다. 사회병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팜므파탈들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났다기보다는 진실한 애정이 결핍된 불행한 가정사와 어두운 사회현실이 만남으로써 탄생된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며, 이번 국립무용단 작품의 모티브가 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보들레르의 애인 잔 뒤발이나 살로메도 그런 범주 안에 있다.
 그리하여 연극, 오페라 등의 극예술에서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연출로 팜므파탈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최대한 구현하던 탐미적인 흐름도 이제는 주변의 생명을 모조리 빼앗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그 블랙홀 같은 존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개연성을 부여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립무용단의 <팜므파탈>은 그런 점에서 보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티브는 서구의 것에서 빌려오고, 풀어가는 것은 동양적인 정서인데 비교적 덜 자극적이게 은근한 비유를 동원한 것은 좋으나 그런 느슨함 때문에 일견 ‘팜므파탈’이라는 제목이 과하다는 딜레마에 처한다.
 1부 ‘악의 꽃’에서 알록달록 화사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머리에 꽃을 얹고 등장한 ‘운명’ (장현수 역)은 붉은 끈으로 여행자를 묶는다. 중국 설화에서는 달노인이 운명의 짝인 남녀를 붉은 실로 묶어준다는데, 달콤한 얼굴로 나타난 운명에 취해 여행자는 그 뒤에 숨겨진 파멸을 보지 못하고 따라가게 된다.
 그를 쾌락에 젖게 하는 설정으로 붉은 물동이를 든 시골처녀들의 춤이 이어졌다. 실상 이 부분은 소탈한 건강미마저 느껴질 정도여서 뒤이은 파국이 억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재창조하는 입장에서 꼭 시인의 삶을 반추하거나, <악의 꽃>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춤에서 복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 속에 태어난 <악의 꽃>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만 취한 것은 아닌가 싶어 불편하였다. 홀린 남자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게끔 하는 것은 낭만발레의 단골소재 아니던가.
 한편 2부 ‘살로메’는 인터미션 때 관객을 이동시켜 D열을 비워 흰 천을 깔고 살로메와 헤롯의 무대로 삼았다. 그 위에서 뱀이 허물 벗듯 미끄러져 내리면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추도록 하였고 여러 여성 무용수를 통해 때로는 요한을 갈구하는 살로메를, 때로는 그를 거부하는 요한의 내면을 표현하도록 분산시킨 점이 신선했다. 오페라처럼 자른 목을 등장시키는 대신, 살로메가 붉게 물들인 나뭇가지를 가지고 객석으로 올라간 것은 마치 요한의 심장의 동맥을 뚝 떼어 가져간 느낌이어서 참신한 비유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용수들이 그야말로 물세례를 받아가며 요한의 참수 장면을 표현한 것은 질문거리를 남긴다. 피칠갑을 하지 않아준 것은 고맙지만, 의상이 핑크색으로 염색되어버려 굳이 그렇게 했어야했나 싶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얌전히 잠들어있는 살로메의 모습과 더불어 1부에서처럼 팜므파탈의 예쁜 그림만 남았기 때문이다.


​박이표 조재혁의 <이상증후군>

 <팜므파탈>의 바톤을 이어받은 <이상증후군>은 역시 보들레느나 와일드처럼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파란을 일으킨 문학세계를 선보인 이상의 시와 소설을 텍스트 삼되, 결코 그 내용의 서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로서 완성시킨 작품이다. 총 13개의 장면은 그 경계를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전환되며 다음 장면을 이끌고 나오고, 기존의 관념을 해체시키되 해체시키는데서 끝나지 않고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그것은 무대 세트와 소품을 겸한 다양한 크기의 ㄷ자 형태의 나무틀을 쉴 새 없이 조합하고 해체하고 또 연결하며 무대 위의 물건이 하나로써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나 실험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등장한 7명의 무용수 심지어는 3명의 뮤지션마저도 조금도 소외되지 않고 무용극 내내 여러 역할로 변신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상의 전공이 원래 건축이기도 했지만, 그는 말이 담아낼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오히려 단순화된 기호와 식을 동원하여 그 배열방식 자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강렬한 이미지로서 구축하였다. 그것을 춤으로써 무대화하였다는 것은 다른 장르보다 여러모로 설득력을 갖는다.
 세계를 고정된 질서를 가진 무엇으로 파악해 왔던 근대 과학이 부정당하며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초끈 이론 등등에 의해 혁신과 진화를 거듭해 왔던 것처럼, 무대 위에서도 춤꾼과 소품, 무대 세트에 한정적인 역할을 부여하던 고정관념을 뒤집고 그 자체가 소우주이며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소가 되는 사람의 실시간 움직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운동을 드러내어 ‘관념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한 무용수 중 가장 체격이 좋은 조재혁이 핵처럼 기능하며 나머지 무용수들이 시시각각 이합집산을 반복할 때마다 새로운 그룹을 구성해 나간다. 무용수들은 무대 한편에서 쉴 때도 결코 그냥 멈춰 있지 않는다. 반드시 잠재된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다가 터뜨리고 소멸하며, 다시 새로운 율동을 구성한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수많은 세포들이 형성되었다가 사라지며 또 태어나는 것과 같고, 우주 안의 모든 움직임에도 해당한다.
 그 이미지는 ㄷ자 모양의 나무틀이 때로는 사람의 목을 가두고 죄는 굴레였다가, 여럿이 어울려 노는 목욕탕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크기별로 정렬되어 화합의 문이 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고(우리 한글이 초성·중성·종성의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지듯이),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아닌 자투리 천으로 구성된 조각보가 가진 무궁한 용도(김미애가 입었던 치마가 되었다가 이불이 되었다가 접혀져 방석이 되기도 하는 등)를 통해 뒷받침되기도 한다.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고정관념 뒤집기와 물리적인 해체가 주를 이루는 것만은 아니다. 극은 전체적으로 정-반-합의 구조를 가지고 전개된다. 초반부에는 함께 춤을 추긴 하지만 내적으로 통일된 상태는 아니다. 모둠 속에 같은 동작을 하지만 조금씩 엇나가며 마침내 서로 분리된 상태에서는 갈등을 노출시킨다.
 ‘해 드는 아랫방 해 들지 않는 윗방’부터 ‘상이와 홍이’, ‘때 묻은 외버선’의 테마가 붙은 세 개의 중반부가 그런 갈등을 극대화하는 장면들이다. <날개>의 이야기가 충분히 연상되는 그 장면들은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의 소외감을 진하게 전달한다. 남자들이 돌아가며 호롱을 불어댈 때마다 몸을 팔아야하는 여인의 서글픈 몸짓(전혀 선정적이지 않게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나란히 누운 것이 마음의 평행 상태까지 보여주는 두 연인의 모습 등은 그러하기에 진정하게 하나로 합쳐지고픈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유머러스하게도 ‘13 아해의 질주’를 마치 자궁을 향해 돌진하는 정자들의 움직임처럼 처리한 후에 이어진 무대는 조재혁의 가공할 만한 에너지 분출을 통해 융합을 촉진한다. 늘어지는 젤리 같다든가 고무찰흙 같다든가 어떤 표현으로도 양감을 가지면서 유연한 그의 몸을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회전은 마치 스스로 투포환 선수가 되어 자신의 몸뚱이를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튕겨 나가지 않으면서 제자리에서 계속되어 기이한 느낌을 줄 정도였는데, 핵과 전자의 움직임이 바로 그럴 것 같다는 경탄을 불러일으킨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마침내 내적인 통일까지 기하게 된 원자들은 이제 하나가 되어 정사각형의 문에서 튀어나와 조화로운 대칭을 이룬다. 마지막에 무용수들이 레몬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나와 벽을 향해 던져 쏟으면서 레몬이 사방으로 튀는 것은 바로 그런 원자들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재현한 것으로 보였다.
 박이표 안무의 <이상증후군>은 과거 모순된 현실 속 불안과 분열의 정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온 이상의 작품 세계가 지극히 완벽한 질서의 ‘이상(理想)’을 지향한 면모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이번 컬렉션의 가장 큰 소득이라 할 만 하다.



​조용진 안무 <기본활용법>


 마지막 무대인 <기본활용법>은 국립무용단 송범 초대 단장이 만든 몸풀기 춤 ‘국립기본’을 소재로 하여 춤꾼이 한국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현재모습을 돌아보고 미래를 모색하는 작품이다.
 지난 달 국립현대무용단의 <춤이 말하다>가 렉쳐 형식을 빌려 각기 다른 장르의 춤꾼들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의 춤을 생성시키는 일상에 대해 털어 놓고 자기 춤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전달한 것과 비슷한 시도라고 하겠다.
 <춤이 말하다>는 자기 장르의 한계라면 한계인 속살- 발레에선 즉흥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 반면 전통춤꾼은 흥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춤이 우러나지 않는다든가, ‘다름’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그저 난해함 자체를 위한 춤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현대무용의 딜레마 등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다른 장르와 한데 어울림을 통해 춤의 공통된 본질을 찾고 역으로 자기 장르의 고유한 개성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었다. 이번 <기본활용법>은 장르 간 구별이 무의미할 만큼 이미 융화된 한국춤을 추는 20대 젊은 무용수 입장에서 전통이랄 수 있는 ‘국립기본’이 갖는 의미 찾기 과정이다.

 

 


 간소하게 차려진 무대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블랙 앤 화이트의 캐주얼한 차림으로 등장한 조용진과 이재화는 선후배로서 서로를 관찰하고 반영한다. 거울은 등장하지 않았으나 첫 번째 장면의 주된 이미지는 그러한 맥락의 ‘자기 반영’이다. 조용진의 동작을 바로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하는 이재화의 몸짓도 그러하고, 비디오캠을 들고 나와 객석 곳곳에 관객으로 와 앉아 있는 국립무용단원(으로 추정되는)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그들의 얼굴이 무대 뒤 대형화면에 노출되게 한 다음, 그 관객이 순간 취하는 장난스런 몸짓을 무대 위 두 사람이 즉흥적으로 흉내 낸 장면에서도 그러하였다.

 다른 관객은 그 과정을 옆에서 관찰함으로써 두 남성 무용수가 시도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몸짓을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가 ‘국립 기본’에 새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조용진의 출발점인 셈이다.
 스크린에 저고리와 바지 한복을 입고 ‘국립 기본’을 추는 조용진의 모습이 등장했을 때 객석 곳곳에서 터진 웃음은, 일상에서 수천 번 내지 수만 번 수행해야 할 과업으로 주어진 바로 그 교과서 ‘기본’조차도 작품의 소재로서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구나 싶은 편안함의 반증일 것이다. 화면에 ‘기본’을 추는 조용진의 모습이 복제되어 세 명으로 늘어난 작은 장난도, 추면 출수록 어깨짓과 발굴림이 굿거리에 딱딱 들어맞는다는 ‘기본’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재화가 출중한 실력으로 선보이는 장구 반주에 맞추어 몇 번이고 반복하여 ‘기본’을 추어도 ‘기본’은 말 그대로 ‘기본’으로서 신명을 더하며, 그 위에 일렉트릭 사운드가 중첩되어도 전혀 어색함 없이 어울린다. 그런 가운데 수건을 들고 나와 추는 살풀이춤은 과거의 그것처럼 비장하고 처연하지 않고, 말 그대로 ‘살’을 풀어 공간을 정화하고 화합시킨다는 목적에 맞게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다. 비록 무거운 대의명분을 머리에 이진 않았지만, 내가 가진 일상, 그 기본부터 사랑하고 최대한 즐기면서 그 흥에 겨운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어 다른 이-일단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는 후배-로 하여금 똑같이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시작이지 않겠냐는 것이 20대 젊은 춤꾼 조용진의 발랄한 중간 결론이다.

 이번 컬렉션의 세 작품을 일괄적으로 묶는 것은 무리이겠으나, 과거의 유산에 대한 접근과 해석, 그것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 것으로 가름할 수 있겠다. 다만 서양과 동양, 문학과 과학, 전통과 현대 등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 연결고리를 놓을 때 관객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고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작품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그 시도에 이해하고 동의하고 결합한 만큼 관객의 감동도 비례할 것이다.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