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3 한국무용 창작산실 우수작품전_ 강미리 장유경 안덕기
한국춤을 한국춤이도록 하는 것
이지현_춤비평가

 그간 한국창작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한국춤의 정신과 미학, 형식을 원형 삼아 동시대적 주제를 극장공연물로서 완성시키는 여러 실험을 해왔다.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한국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전통에 대한 ‘구심적 태도’와 이와 반대로 한국춤 안무가들에 의한 껍질을 깨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원심적 태도’가 교차되는 가운데 한국의 ‘현대춤’이라는 큰 틀 속에 이 양극의 물길은 휘감아 돌며 역동적 공존을 하기에 이르렀다.
 작금엔 이 두 흐름을 공연만으로 구별해 내는 것이 쉽지 않아 춤의 뿌리를 따져 묻는 일이나 한국창작춤만을 떼어내어 문제 삼는 일이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춤이 현대에서 어떻게 생성될 것인가’의 문제를 무화시켜 버리기에는 그 문제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춤 안무가들이 갖고 있는 춤의 역사는 도제식으로 어릴 때부터 뼈 속에 담아 온 한국춤의 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들이 현대의 시공간에 적응할 때에도 한국춤의 정신적, 양식적 원형이 그들을 지배하는 현상이 뚜렷하여 그것을 범주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직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중심으로 창작 작업을 꾸준히 해온 50대 후반의 중견 안무가 강미리, 장유경, 그리고 그에 비해 이제 막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는 안무가 안덕기가 이번 한국춤 부분 창작산실 사업 첫해의 안무자가 되었다.
 강미리는 <롱>(弄) 에서 춘앵무라는 고전을 원형삼아 재해석하는 작업에 이어 이번 <관(關), 상생과 소통의 합설>에서 그간의 처용무에 대한 연구작업을 총정리하여 보여주려 하였고, 장유경의 경우 전작인 <쪽, 네개의 시선>을 통해 정돈했던 제의성의 형식적 실험을 <푸너리 1.5>에서 푸너리 장단을 중심으로 보다 집중적으로 풀어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국립국악원의 안덕기는 젊음만큼이나 패기있게 정재 중 놀이성이 강한 포구락을 중심으로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실험에 대해 출사표를 던졌다.


강미리 <관(關), 상생과 소통의 합설>

 <관(關), 상생과 소통의 합설>은 5방 처용무의 구성적 측면과 정재의 ‘합설’(合設)의 형식에 민속춤을 녹여보는 형식적 실험을 하였고, 한국춤 동작의 전형성을 깨고 서양춤의 동작을 적극적으로 수용시키는 방법을 구사하였다. 

 무대 후면에 샤막을 내리고, 2층에 악사를 배치하고, 천정 조명을 사각의 프레임으로 해 오렌지색의 선명함과 강렬함으로 환경을 만들었다. 이후 대개의 춤은 전경과 후경으로 나누어 시종일관 왕처럼 앉아 있는 처용과 그 앞에서 벌어지는 처(흑처용), 용(적처용), 상(청처용), 회(백처용), 합(황처용)의 5개 장면 변화를 처용과 관객의 시선이 부딪히는 중도의 공간을 창출하면서 진행하였다.
 5행에 근거하여 짜여진 듯한 5개 장면은 “소통을 꿈꾸다, 내면과 현실의 갈등을 겪고, 그 구체로서 현실과 욕망의 충돌로 혼란에 빠지며, 절망에서 씻김으로 나아가고, 결국엔 대립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흐름을 갖는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로 시작된 장면은 이내 공간을 고전의 안정감으로 꽉 채워 한국춤에 대한 예상을 보기 좋게 탈각시키며 신선함을 주었다. 낭만적 고전음악에 맞춰 추어진 군무의 동작 역시 발끝만으로 잔걸음을 걸어 속도감을 높이고 체중의 격렬한 낙차를 회복해내는 탄력성으로 무대에 에너지를 채워나갔다.




 


 강미리의 이런 실험은 상당히 파격적인 동시에 선구적인 측면을 갖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왜냐면 그간 많은 한국무용 안무가들이 탐을 냈을 만한 동작실험임에도 한국춤 전공자들에게 내장되어 있는 동작언어를 변형시키는 문제는 그야말로 포맷을 다시 해야 할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미리는 한국춤 움직임의 속도와 힘의 한계를 깨나가고 서양 고전음악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실험을 이 작품에서 어느 때보다 극성스럽게 시도하였다.
 다른 한국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춤의 역동성과 발랄함,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치욕들을 ‘병신춤’으로 과감하게 합설시키는 대담한 솜씨는 강미리만의 창작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축적된 방법론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관(關), 상생과 소통의 합설>이라는 작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형식 실험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한 처용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도출에 얼마나 감각적 기여를 했는가 하는 물음 앞에선 주춤하게 된다. 형식 실험과정에 반드시 따르는 설익음, 산만함 즉 미완의 느낌은 여성 무용수의 초긴장을 동반한 수련의 힘들 속에서도 작품 전체와 조화를 만드는 데는 무리함이 있었다.
 처용이 주인공임에도 처용 남성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아무런 성격을 창출해 내지 못한 종이 처용으로 무대 뒤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아무 배역도 없는 여성들은 바쁘게 무대공기를 휘저었으나 그저 집단이었을 뿐 처용을 변하게 한 현실의 갈등을 생성시키지 못했다. 결국 처용의 내면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주제가 인간 자신에 대한 은유임에도 관객입장에서 처용에 이입을 하거나 은유에 공감하기에는 작품은 징검다리 없이 물길만 거칠었다.



장유경 <푸너리 1.5>


 굿 장단 ‘푸너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야말로 굿을 굿이게 하는 장단이다. 쉼 없이 반복할 수 있으며 길이와 고저가 그 순간의 연희자 마음에 달려있다. 말하자면 굿 음악의 핵심인 ‘리듬에 의해 의식의 변이’를 일으켜 피안으로 넘어가게 하는 그 지점이다. 

 게다가 푸너리 장단은 장단이 이미 붕괴된 채 굿의 말미를 장식하는 무당과 관객의 엑스타시의 한가운데 있는 것으로 각 악기들은 각기 이미 황홀경에 빠졌으며 리듬은 이미 땅의 영역을 벗어났다.
 장유경은 이 장단의 의미를 작품의 절정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바로 처음에 떡 하니 갖다 놓았다. 마치 “당신 역시 경계선에 한발 올려 놓은 채 위태하게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처럼 천천히 등장하여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서고 머리에 각목을 올려놓은 채 미동으로 움직이는 이 각목과 인간의 위태로운 구조물은 마치 작두 타는 장면을 굿의 초반에 보는 것 이상으로 관객들은 첫 장면에서부터 이미 가슴을 찔려 심장을 움켜쥐게 된다.
 

 무심초월한 여자 사제는 무등 위에서 죽음의 경계를 무대로 옮겨온 듯 묘한 긴장과 공포를 유발시키며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기에 자꾸 힐끔거릴 수 밖에 없는 ‘죽음’ 처럼 우리의 뒷덜미를 잡아 끈다. 각목을 머리에 올리고 그 프레임을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허리춤의 부채를 하나씩 땅으로 던지고 그 부채를 남성무용수들이 아래에서 받아 춤으로 이어가는 장면의 장엄함은 굿을 소재로 한 작품 중 단연 뛰어나다. 이는 굿의 형식을 따오거나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의식의 영역을 다루는 굿의 속성을 포착해낸 새로운 ‘동시대적 의식’(contemporary ritual)의 새로운 고리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대신하고, 상처를 어르고, 울화를 풀어내어 승화시켜야 하는 굿의 첫 장면에 장유경이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오히려 문제는 그 긴장과 충격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나머지 시간을 메워야 하는 큰 숙제가 남은 일이다.
 무대 측면과 후면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물고기 형상의 해체된 조형물은 바닷속과 이생을 모호하게 은유하며 환상의 공간을 만들어 냈고, 장유경의 솔로에서 원래 크기의 5-6배 되는 큰 고깔 역시 확대된 물고기와 더불어 제의적 환영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하였다.
 작품의 후반부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군무로 대형 만들기 춤이 이어져 전반부의 긴장감을 이어나가지는 못했으나 <쪽>에서 보여준 시각과 동작의 공감각적 ‘신명올리기’의 방법을 참고한다면 그 역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문제는 심하게 추상화되어 있는 작품의 내적 구조를 어떻게 현실적 감성과 연결시켜 형상화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장과 풀어냄을 자유롭게 오가는 의식을 변이시켜가는 ‘굿의 구조’에 대한 공부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덕기의 <포구ROCK(포구락)>

 

 안덕기의 <포구ROCK(포구락)>은 한국춤이 빠져나가야 할 잔재인 무거움에 대한 편향 문제를 건드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주었다. 80년대부터 창작춤의 주제는 진지하다 못해 어둡고 무거워졌었다. 신무용의 ‘신파’를 벗어나고자 했던 정서적 노력이 존재에 대한 접근으로 경도되면서 아직은 남아있는 신파의 잔재와 결합되어 창작춤을 무거움과 우울한 정조에 갇히게 했다. 무엇이든 과도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이쯤에서 그것의 정체를 돌아보고 벗어나는 것이 필요한 건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한국춤 안무가들이 그것도 정재에서 이런 시도를 캐냈다는 것은 참으로 발랄하고 귀여운 일이다. 한창 뜨고 있는 국악과 락의 퓨전그룹 ’잠비나이’의 단순과 반복을 통한 파워있는 음악을 쓰고 플래시 몹을 활용하여 공연의 외연에서부터 공연성을 확보해나가겠다는 계획은 야심 찼으나, 공연 당일 그것의 실현성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기에 그 참을 수 없는 경쾌함과 과제를 접근하는 빈약한 방법론을 맘 놓고 즐긴 순 없었다.

 

 

 무대 중앙에 지름 4-5M의 큰 구멍은 호리존트를 열어 밖이 보이도록 하여 그곳에서 사람들이 손을 잡고 줄지어 나와 객석의 앞줄에 앉는다. 원 밖의 세계가 삶의 세계였다는 것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진대 이 장면은 공간의 파괴, 플래쉬 몹의 실패 등 여러 각도로 해석하려 했으나 쉽게 잡히지 않았다.
 바바리를 걸친 소리꾼(윤석기)는 잠비나이와 노래를 하고, 파스텔 톤으로 레이어드한 편안한 바지와 상의를 입은 발랄한 출연자들이 그 원의 가장자리에서 미끄럼을 타며 적당한 주제적 무게감과 적절한 경쾌함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잠비나이는 기타주자만 하수 쪽에 살짝 보인 채 연주를 했으며 작품의 빈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톡톡히 한 타악팀은 광대 노롯을 겸하며 분위기를 띠워나갔다.
 하지만 포구락을 지금의 놀이로 가져가려는 시도는 객석에서 끌어 올려진 관객과 놀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무슨 전시행정처럼 흉내만 내다 끝나버려 오히려 관객의 흥을 중단시켰다.
 이 작품의 신선한 의도에 대해서는 한표를 던질 수 있으나 해학과 놀이에 대한 얄팍한 연구와 접근은 좀 더 깊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신선함을 놓치지 않되 대극장에서의 1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한 기본역량을 키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국춤만을 따로 떼어 창작에 대한 집중적 고민을 할 수 있게 한 창작산실이라는 환경이 창작춤이 향방을 잃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산실의 조건 속에서 한국춤 안무가들의 보다 분명한 작가의식과 ‘무엇을 현대의 한국춤이게 할 것인지’에 대한 창조적 질문과 해답이 이 과정 안에서 모색될 것이다.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