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작품과 상품의 경계에서 균형잡기
권옥희_춤비평가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예술감독 안애순)의 첫 기획공연 <불쌍>(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3월 21-22).
 노랑색의 무대 바닥, 점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신들의 형상이 모두 나와 앉아 있다. 산신, 용신, 산신도사, 옥황상제, 장군님, 도령, 신장님, 칠성신… 등. 금색 칠을 하고 있는 불상은 아마도 약사여래이거나 관세음보살 일 터. 무대바닥에 깔린 노랑색 조명, 신들을 앉힌 점집의 두툼한 금색 방석이 연상된다. 신(상)들과 마주보거나 비스듬히 돌아앉아 있는 무용수들. 이들에게 신(상)은 기복을 위해 절을 하는 대상이거나 어쩌면 절을 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인간의 길흉과 복을 관장하고 수명과 재물 운을 관장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데, 신으로 모시지 않을 까닭이 없다. 더 나아가 스스로 도를 닦아 도인이 되고 산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또한 누가 나무라겠는가. 다만 무당이 도의 경지에 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산신, 혹은 복을 비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무당의 말에서 혹세무민의 그림자가 일렁임을 경계를 할 따름.




 신(상)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듣고 혹은 침묵하다가 상을 안아 들거나 옆구리에 끼고 무대뒤로 걸어가 배경으로 선다. 그것이 동자상이든 산신령이든 자신이 안고 끼고 있는 것이 스스로의 얼굴이고 업이다. 원하지 않았는데 신이 내렸든, 자신이 신 속으로 걸어들어 갔든 상관없다.
 공중에 매달린 불상 하나. 무대 바닥이 흰색으로, 스크린에 큰 불상그림으로 바뀌고 불상에서 후광이 번쩍인다. 후광은 중생을 향한 부처의 지극한 마음이라는데, 그 앞에 엎드려야 하나? 무릇 번쩍이는 것에는 가짜가 많은데. 부처의 마음에 경계가 없고 차별이 없음을 표현하느라 보통 후광은 둥근 반면 스크린에 비친 부처의 후광은 마치 레이저 빛 같다. 중생을 향한 부처의 마음이 요란하다. 그것은 곧 무대미술을 맡은 최정화의 마음이거나 안애순의 마음일 터. 무대 위 스크린, 흑백의 불상사진들이 액자에 갇혀 지나간다. 후광은 없으나 원만하고 조용한 이 그림이 편안하다.
 김동현이 무예를(달마 18수?) 연상케하는 춤을 춘다. 유럽의 현대춤은 보이나 팸플릿에 소개한 한국 진도북춤과 입춤, 인도의 카탁, 일본의 민속무용은 어디에? 4명의 무용수들이 힘을 겨루듯 밀고 당기며 난장판인 춤이 한창일 때 색이 겹쳐진 동그란 플라스틱 틀을 이고 여자무용수들이 배경으로 등장. 틀은 굿판 제상에 오르는 알록달록한 과자와 닮았다. 머리에 이고 나온 제물과 굿을 관장하는 듯한 흰 의상의 현대의 무당.
 헤쳐 모인 무용수들 플라스틱 구조물 위에 올라가서 곡예를 하는가 하면 남자 무용수들은 검정색의 플라스틱 바구니를 모자처럼 쓰고 나와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 흩어진 바구니로 쌓고 무너뜨리기를 거듭한다. 이 광경을 한쪽 다리를 접어 세우고 팔을 괸채 비스듬히 앉아서 보는 무용수들의 정서가 나른하다. <목신의 오후>에서 니진스키의 그림과 닮았다.




 앉아서 추는 춤이 마치 뜨거운 것에 덴 듯 화닥닥 요란하다. 던져놓은 플라스틱 바구니 판으로 들어간다. 무용수들의 개성대로 마구 추는 춤. 플라스틱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니 작고 큰 둥근 모양이 된다. 둥근 공속에 자신의 머리를 가두는 여자. 끊임없이 바구니를 겹치며 마음을 쌓는 여자. 이야기가 선명하다.
 이윽고 무대 가운데를 중심으로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공놀이하듯 함부로 던져지는 바구니, 깨지지 않으니 상관없다. 찢어져서 못쓰게 되면 다시 사면된다. 싸니까. 쓰레기처럼 내다버려도 되는 물건이다. 그것이 한 때 신(상)을 향한 마음이었어도 상관없다. 그 마음은 원래 알록달록 가벼운 것이었다. 쉽고 빠르게 찍어내는 플라스틱 바구니처럼 내다버려도 마음은 다시, 금방, 또 생기니까. 공중에 매달린 불상이 그 마음에 맞아 흔들린다. 불상이 불쌍해 보인, 작품 <불쌍>에서 안애순의 시각이 잘 드러난 장이다.

 무언가를 깨트리듯 자유롭게 추는 예효승의 춤의 에너지가 볼만하다. 하지만 독특한 개성이 작품에 스미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무대 뒤 그림은 하얀색 불상그림. 무용수들, 두 명씩 짝을 지어 춤을 춘다. 불상이 매달려있던 자리에 둥근 공 조명, 온갖 색의 빛을 무대에 뿌리며 돌아간다. 무용수들, 배워서는 추지 못할 막춤을 추어댄다. 음악 없는 춤이 계속된다. 취한 듯. 그들 뒤로 온갖 신(상)들, 15칸 안에 들어앉아 있다. 박제된 신(상),
 남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가져와 배열, 혹은 모방해서 짝퉁을 만드는 것, 시각 아티스트 최정화의 작업방식이다. 일종의 불교미술로 해석되는 최정화의 작업은 플라스틱 바구니라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구조의(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유약성과 무너짐을 ‘쌓기’를 통해 보여준다. <불쌍>에서의 안애순의 작업도 이와 유사했다. 아니, <불쌍>은 최정화의 작품세계를 안애순이 춤으로 푼 것이었다. 작품제목을 ‘최정화의 부처(혹은 종교)’라고 해도 된다. 더구나 미술은 ‘즐기며 잘 노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과 <불쌍>에서의 춤의 배치, 닮았지 않은가.




 <불쌍>, 안애순이 하이브리드 댄스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춤의 배치는 (국적을)알아볼 수 없는 단순한 춤의 나열에 그쳤다. 따라서 ‘다양한 춤 어휘와 문법’은 읽을 수 없었다. 다국적이면서도 다문화적인 춤의 실험은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 아름답게 구현된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게다가 시각 아티스트 최정화의 설치미술과는 달리 DJ soulScape의 디제잉 음악과 춤은 어긋난 조합이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어우러지기는커녕 귀를 막고 서로 자기 이야기만 끊임없이 하는 듯했다. 단순한 비트의 무한반복은 관객들을 향해 ‘잠을 자라’는 주문을 걸기도. 클럽음악은 직접 몸을 움직일 때 적절한 음악이다. 관객이 되어 조용히 집중해서 듣는 음악, 아니다.
 안애순 만의 것이 중요하다. 국립현대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뒤 첫 작품 <불쌍>, 2009년도 작품이다. 달리 말하면 2009년 즈음의 최정화의 작품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새 예술감독의 작품세계를 알리는 의도와 더불어 세계진출 계기로 올린 것이었다면 이번으로 충분하다. 고전발레 작품도 안무자에 따라 재해석 된다. 시대도, 철학도, 가치도, 마음도 변한다. 해석되어 재조정된, 새로운 춤의 생성이 없는 단순한 과거 작품 자랑은 재미없다.
 팝아트 작가로 이미 충분히 매력 있는 최정화의 작품세계가 춤화 된 작품으로 <불쌍>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잘 팔리는 최정화의 작업처럼 분명히 해외에서 더 주목을 받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 시대, 잘 팔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라면). 유감없다. 

2014. 04.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