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임지애 〈1분안의 10년-트랜지션〉
우연히 일어나는 새로운 춤의 생성은 없다
권옥희_춤비평가

 새로운 춤을 사유한다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 현실과 이상 등이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연관적 관계인 것처럼.
 춤은 춤추는 몸의 분절체계이다. 분절체계가 없는 춤은 소통의 부재를 가져오는가 하면,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치게 된다. 소통부재는 억압을 가져온다. 새로운 춤의 생성, 사유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흘러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상호연관성의 전제 그리고 자기 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새로운 춤의 언어와 형식을 위한 노력은 성립할 근거를 얻지 못한다.
 한국 춤을 배운 임지애, 부토 무용가 네지 피진, 그리고 발레 세르지우 마티스 등 각기 다른 춤 배경을 가진 3명의 무용수들이 만들어 내는 작업 <1분안의 10년-트랜지션>(4월 11-12일, 부산 LIG아트홀)은 ‘무한반복을 통해 춤이라는 형식 안에 고착되어버린 몸의 정형화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작업이라는 작가(임지애)의 의도는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작가의 의도에서만 머문 작업이었다는 것, 자신들의 토대였던 춤의 습속에서 벗어나고자 한 춤-몸이 별다른 대안 없이 자신들의 춤-몸 속에 또 다시 갇힌 것이다.


 



 흰색으로 구성된 무대의 바닥과 세 벽면은 자신들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라는, 혹은 부각시키려는 장치로 보인다. 네지가 내복처럼 보이는 의상을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나와서는 객석 맨 앞 의자 밑에서 은박지 한 장을 꺼내 구겨서 버린다. 이어 아~~ 소리를 내면서 걷는다. 뒤따라 나온 임지애, 세르지우도 아~~ 메아리처럼 소리를 받아 걷는다.
 세 명이 바닥에 누워 계속 아~~소리를 낸다. 네지가 입고 있는 내복처럼 보이는 의상이 우스운지, 아~ 소리를 서로 따라하며 누워있는 모습이 우스운 것인지 소녀관객들이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고통스러워한다. 네지가 무대바닥 틈에서 삐죽 나온 은박지 한 쪽을 잡아 당겨 세운다. 마치 오래전의 시간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소리(음악)와 함께 누웠다가 일어나 쪼그려 앉고 다시 눕기를 반복. 다리 한쪽을 접어 세우고 그 위에 한 팔을 올려놓고 다른 한 팔은 바닥을 짚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자세,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이 일으킨 전환과 변화의 한 순간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닌지? 애써 의미를 부여해본다. 임지애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움직임에 대한 확신을 읽지 못한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한국 춤사위 몇 동작, 발레의 기본 동작, 그리고 고통스럽게 몸을 쓰는 부토의 움직임에서 그들이 받았던 춤 교육의 배경이 드러난다.
 음악 없이 한국춤의 기본을 연습하는 소녀의 영상, 임지애가 갑자기 생각난 듯 하는 한국춤 동작들. 티셔츠와 몸에 붙는 바지를 입은 채 무표정하게 팔다리를 휘젓는 조합의 춤은 더 이상 한국춤이 아닌 낯선 움직임이 되었다. 이어 발레동작 연습 영상 앞에서 세르지우가 발뒷꿈치로 바닥을 치면서 박자를 맞춘다. 자신들이 교육받아온 춤의 외피와 속살은 이런 것이었다는 듯. 어쩌면 이런 분절된 움직임이 현재의 춤일 수도.
 흥미로운 것은 네지의 영상. 빗자루를 기타처럼 들고 신나게 춤을 추는 소년의 영상, 그를 찍고 있던 누군가가 묻는다.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소년이 말한다. 75세가 되도록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영상을 본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까지 무용이 있을까. 또 질문하니, 소년이 대답한다. 아마 그때는 춤은 있어도 무용은 없어질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니. 소년은 말한다. 춤하고 무용은 다르다. ’무용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춤은 아니다‘고. 아! 아마도 이 소년은 75세까지 자신만의 ‘춤’을 출 것이다. 우스꽝스럽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무대 위 움직임을 일시에 정리해 주는 소년의 춤영상이었다.
 작가들은 알고 있을까. 소년이 한 말이 자신들이 사유해야할 춤의 화두임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작업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추고 싶은 자신들만의 춤인지? 그것도 아니면 들뢰즈의 이론 줄기 하나를 던져놓고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는 과정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인지.


 



 임지애가 무대 옆 흰색 막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다. 또 다른 시간이 지나고 네지는 알루미늄 한 장을 또 구긴다. 구겨진 알루미늄처럼 그들은 누워있다. 음악이 개입하자 오히려 움직임이 깨지는 즉흥, 즉흥의 부조화. 결국 부토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움직임에 다른 움직임이 밀려난다. 임지애의 <1분안의 10년-트랜지션> 작업은 의도를 내포한 즉흥작업이었다.
 아쉽게도 이들의 춤과 음악은 소음 같았다. 간헐적으로 짜증을 유발하는. 참신한 안무의도(이론)에 기반한 작업이라 해서 그대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춤의 사유를 모색했다면 고통스러운 작업과정을 거쳐 파생되는 구체적인 춤의 언어가 제시되어야 하고 춤의 생성이 따라 일어나야 한다.
 네지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추어지는 춤이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효과를 낳는 춤을 창조하고 추고 싶다고 한다. 새로운 춤의 생성을 꿈꾸고 있다는 말일 터.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준다. 새로운 개념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하나를 더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세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의지로도 들린다.

2014. 05.
사진제공_LIG문화재단(photo by 김상협)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