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니버설발레단 〈멀티플리시티〉
오감을 일깨우는 총천연색 바흐 예찬
방희망_춤비평가

 유니버설발레단은 창단 30주년 기념작으로 스페인 안무가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를 야심차게 준비하여 첫 선을 보였다(4월 25-27일,LG아트센터, 평자 27일 공연 관람).
 같은 안무가의 <나 플로레스타> (Na Floresta, 2003년 LG아트센터)와 <두엔데> (Duende, 2005년 문예회관대극장)를 올린 이후 문훈숙 단장이 공을 들였다는 이 작품은 그동안 ‘This is Modern’ 시리즈를 통해 매년 단막 모던 발레를 소개해왔던 유니버설발레단이 처음 도전하는 두 시간 짜리 전막 컨템포러리 발레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한국 초연을 위해 네 명의 연출가가 순차적으로 방문하여 리허설을 진행했다고 밝혔고 나초 두아토가 직접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영상을 사전에 공개하여 기대감을 높였다.
 나초 두아토가 1999년 바흐 서거 250주기를 1년 앞두고 독일 바이마르의 의뢰를 받아 만든 <멀티플리시티> 안에는 18개의 바흐 작품 중에서 골라낸 22곡이 2부로 나뉘어 배열되어 있다. 1부 ‘멀티플리시티’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를 위시하여 칸타타 BWV 115, 202, 205번, 무반주 첼로조곡 1번 중 프렐류드, 관현악 모음곡 2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등 비교적 대중적이고 친근한 곡들이 음악과 처음 만나 영혼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바흐의 젊은 날과 그 주변 풍경을 가볍고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2부 ‘침묵과 공(空)의 형상’에서는 푸가의 기법 BWV 1080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여 기본 골격으로 삼고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칸타타 BWV 21 등을 교차시키며 실명(失明)의 고통과 죽음을 마주한 바흐의 말년, 그 어두운 내면을 파고들었다.




 유난히 느리게 연주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비롯하여 반주로 채택된 연주들이 제법 템포 루바토를 허용한 연주들이었다는 점은 두아토가 바흐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 자신이 느낀 바흐 음악의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방식을 설명하는 하나의 힌트라고 할 수 있겠다.
 바흐 음악을 어렵게 느끼게 하는 주된 이유는 그가 신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평생 교회 안에서 경건한 칸토르로 살아왔기에 그 엄숙함에 개인의 감정이 대입될 여지가 없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마지막 바흐의 죽음 장면에서 미완성된 푸가의 기법을 미완성인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바흐의 생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어떤 선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존경을 표현하면서도, 그렇게 루바토를 통해 좀 더 감성적으로 접근한 연주들을 배경으로 깔아 소박한 작품 속에서 언뜻언뜻 배어나는 일상에 대한 감사와 따뜻한 성품을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이 점이 함부르크 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가 한없는 경건함으로 <마태 수난곡>(1981) 전곡을 발레화한 것과 대별되는 지점으로, 두아토 역시 <멀티플리시티>에 미사곡을 배제한 이유를 자신의 세속성을 담기에 적합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자녀를 많이 두었던 것으로 유명한 바흐기도 하지만 성실하고 꾸준하게 많은 작품을 써서 남긴 그에게 누가 처음 붙였는지 모를 ‘음악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참 절묘하다.





나초 두아토가 조율한 18명 댄서들의 춤, 개성 표출에는 아쉬움

 

 막이 열리고 칸타타 BWV 205 ‘만족한 에올루스’(그리스 신화의 바람신)가 울려 퍼지며 18명의 댄서들이 바흐의 지휘에 맞춰 와르르 몰려들기도 하고 의자 위에서 현란하게 뛰놀며 기운을 발산하는 장면은 갈 곳 없이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던 음표들이 비로소 바흐를 만나 오선보에 쓰여지고 노래되는 기쁨을 묘사한 명장면이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던가. 이름 없던 소리들은 바흐의 부름을 통해 ‘음악’으로 거듭난다. 우스갯소리로 음표를 ‘콩나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일부러 맞추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미니멀한 의상을 착용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단원들은 외국 무용단보다 작고 부드러운 탄력을 가진 신체조건을 장점으로 삼아 바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음표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이 장면에서의 의문이라면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발레단에서 대여해왔다는 무대 세트의 뒤편 철골 구조물 사이를 메운 크고 검은 리본 테이프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바바리안 발레단의 동영상을 보면 마치 오르간의 페달을 밟을 때 바람이 공급되며 리드가 움직이는 것처럼 그 검은 테이프가 좌우로 움직여주면서 음악과 춤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기술상의 어려움이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무대에 올린 것인지 궁금하다.

 무반주 첼로조곡의 프렐류드를 배경으로 바흐가 여성 무용수를 첼로처럼 연주하는 유명한 장면은 클래식 발레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로 끊임없는 회전과 굴신(屈伸)을 소화해내야 하기에 여성 무용수의 스태미너와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호흡이 요구된다. 객원 예브게니 키사무디노프와 수석 무용수 김나은은 어려운 연기를 무난히 소화했지만,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건강한 에로스를 만끽하기에는 여유가 없이 쫓기는 느낌이어서 동작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오히려 2부 초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펼쳐진 남성 군무의 몸을 던지는 열연 속에서 사그라들기 전 마지막으로 피어오르는 생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두 명의 남자 무용수가 상체를 드러내고 코르셋과 파팅게일을 착용한 채 춘 관현악 모음곡 2번에서는 그 시대 궁정 부인들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유머를 던졌고, 바흐가 흰 마스크를 쓰고 다가온 ‘죽음’과 아끼는 ‘음악’과 함께 3인무를 추는 장면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생명의 숨결이 떠나가려는 순간에 회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춤을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종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달리 두아토의 안무는 딱딱한 평균율과 대위법의 구조에서 말랑하고 따뜻한 속살을 끄집어내어 바흐의 음악을 한층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멀티플리시티>를 보면서 통통 뛰어오르고 구르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삶에 대한 열망과 사랑을 즉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바흐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천미지’(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모토로 성장한 유니버설발레단은 단체의 모태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멀티플리시티>를 가장 아름답게 공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음악을 봉헌하며 신에게 찬미를 바쳤던 바흐의 모습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모습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공연 시작 전 문훈숙 단장이 무대에 나와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의 다른 어법을 직접 시연하며 꽤 긴 시간 동안 구체적으로 진행한 해설은 관객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가려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노력으로 읽혀졌다.
 다만,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느껴지는 조금은 얌전하고 순종적인 분위기로 인해 개별 무용수들의 개성은 전체 속에 묻혀 뚜렷이 기억되지 않기도 하다는 아쉬움은 이번 공연에서도 드러났다. 뭔가 한 번 틀이 시원스럽게 확 깨져서 더욱 강인하게, 춤으로 살아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만나고 싶다. 다음 <멀티플리시티> 공연에서는 한층 독립적으로 진화된 유니버설발레단의 모습을 기대한다. 

2014. 05.
사진제공_유니버설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