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숨무브먼트〈강〉 (The River)
몰입을 통한 앙상블의 힘, 그리고 접촉즉흥의 희비
이만주_춤비평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모든 강의 근원을 추적해 밝혀 놓았지만 그것들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강의 시원은 대기에 스며있는 수증기이며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수맥이다. 지구 에너지의 일부가 생명의 근원인 물이 되어 강의 시원(始原)이 되는 것이다. 물이 뭉치고 뭉쳐, 흐르고 흘러 이루어진 강은 쉬지 않고 흘러 바다에 이른다.
 네 명의 무용수가 쉼 없이 흘렀다. 그들은 마치 강처럼 바위들과 계곡 사이를, 숲과 들 사이를 지났다. 빛 아래에서, 또 어둠 속에서 혹은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흐르고 흘러 여울지고, 폭포를 이루었고 또 나루를 지났다. 춤은 동작의 연속이다. 움직임이다. 역사가 흐르듯, 삶이 흐르듯 네 명 무용수의 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안무가의 의도였는지, 우연히 이루어진 장면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순간 무대 위에 다섯 명의 벌거벗은 사람이 원무를 추는 마티스의 그림 '춤(Dance)'*이 실제 춤으로 연출되었다. 단순한 터치와 네 개로 된 색채 속에 리듬과 생명력을 담고 있어 힐링의 효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춤’을 실제 춤으로 보니 색다른 감동이었다.
 숨무브먼트 국은미 안무, 권병철 연출의 작품 <강>(6월 17-18일, 문화역서울 284 RTO)은 댄스 필름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실험영화(10분) 상영으로 시작되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문의 화면과 낙수 장면’은 그 자체가 담백한 시였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의자와 개와 창(窓)가는 메타포 효과를 주었다. 강과 시간은 쉼 없이 흐른다는 관념에서 연결성을 갖는다. 영화 속에서 미술적 퍼포먼스 아트라 할 수 있는 원추형 가루 더미의 쌓임과 그에서 흘러내리는 가루는 모래시계를 연상케 해 다시 시간과 연결되었다.
 그 속에서 네 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데 그들 역시 흐르는 강물 같았고, 나아가 흐르는 바람 같았다. 연결성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영화의 전체 구성은 잘 짜여진 서정시 내지는 선시(禪詩)였다. 영화는 잘 만들어진 수준 높은 댄스 필름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영화 속의 네 무용수였던 안무가 국은미, 또 한명의 여자 무용수 전수진, 두 명의 남자 무용수인 강진안과 이세승이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무대로 나와, 같은 분위기와 흐름으로 춤을 계속 추어 나갔다. 네 명은 각각 ‘강의 어머니’, ‘처녀 뱃사공’, ‘제사장’, ‘차가운 발이라는 이름의 젊은이’를 연기하고 춤추는 것이라 했는데 각자가 심히 다른 캐릭터를 연출하면서도 앙상블을 이루었다.





 추상적인 특징을 갖는 춤 작품이 대본이 갖는 내용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50분 간 이어지는 작품에서 팸플릿에 씌어 있는 내용이 전달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창작한 내러티브인 ‘낮에는 사람으로, 밤에는 큰 고양이 오쿨타로 자유롭게 변하며 살았다는 테오베 강, 우시 마을의 전설’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내러티브와 각 무용수의 역할에 따른 안무가 있었다고 하지만, 전체 분위기는 네 명의 무용수가 끊임없이 서로 교감하면서 접촉즉흥(Contact Improvisation)의 긴 공연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접촉즉흥은 흥미롭게도 포스트모던댄스 태동의 한 주역이었던 스티브 팩스턴(Steve Paxton)이 상대와 접촉하며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동양무술인 합기도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 초, 처음 선보인 이래 접촉즉흥의 공연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 이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못된다. 뚜렷한 주제와 내러티브를 내건 작품의 공연 내내, 접촉즉흥 방식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미 접촉즉흥에 익숙한 일단의 관객들에게는 지루함을 줄 수도 있었다.
 이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었고 <강>을 관람한 다른 무용가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의 창작과 방식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안무자의, 연출자의 자유이다.





 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춤들린 사람들처럼 춤을 춘 네 명 무용수의 탁월한 기량과 몰입이 작품을 살렸다. 특히 소매틱(Somatic)적 접근법의 신봉자인 국은미는 독특한 시선과 함께 몸(Body), 맘(Mind), 얼(Spirit)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 춤의 새털 같은 가벼움과 홀가분함이라니!
 전수진은 이번 작품에서도 언제나처럼 춤에 혼신의 열정으로 몰입해 자신의 역할을 추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티스가 했다는 말에서 ‘그림’이라는 단어를 ‘춤’으로 바꾸어 들려주고 싶다.
 “춤에 홀렸다. 자제할 수가 없었다.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종의 파라다이스로 옮겨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 무엇인가가 나를 몰아갔다.”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춤’ 그림을 두 번 그렸다. 1909년에 그린 ‘Dance I’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1910년 그린 ‘Dance II’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걸려 있는데 Dance II의 완성도가 더 높다.

2014. 07.
사진제공_국은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