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박순호 〈유도〉
柔道의 예술 ‘되기’(becoming) - 저항과 창조의 관점에서
이지현_춤비평가

* LIG문화재단 계간지 〈interVIEW〉 31호 게재글


 우리는 남과 다르면 불안을 느끼는 존재인 동시에 근원적으로는 남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남과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가진 “욕망하는 기계”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매 순간 달라지기를 바라고 그러도록 노력하며 이 과정을 종결 없이 하도록 되어 있는 운명의 존재이다. 바로 이 욕망이 모든 것을 끝없이 생성시키고 운동시키며 변화하게 하여 새로운 것들을 창조시키는 원동력이다.
 들뢰즈가 지적했듯이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탈주의 욕망은 영토의 바깥에 있는 것이 ‘되기’(becoming)를 실천하면서 생명의 힘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창조의 계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욕망을 존재적으로 포태하고 있어서인지 그것을 잘 눈치 채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존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부담으로 인식하고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LIG문화재단 협력 아티스트로 선정된 박순호는 <유도>와 <활쏘기>를 준비하고 있고 이번에 첫 작품으로 <유도>(4월 18-19일, LIG홀 강남)를 공연하였다. 그 솔직한 제목만큼이나 이 작품은 유도를 춤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실험적 의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가 많은 운동종목 중에서 춤의 소재로 흥미를 불러 일으킬만한 것들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화와 불균형>이후 신작에 대한 기대를 모으고 있던 안무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유도>는 관객에게도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도(柔道)는 상대와 힘을 겨뤄 반격하는 운동이 아니라 ‘상대의 힘에 순응하고 그 힘을 역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운동 종목이다. 우리는 흔히 그것의 강렬한 기합소리와 바닥에 메칠 때 나는 파열음으로 그 무술을 격렬한 운동으로 기억하지만, 이 무술의 동작은 상대의 움직임에 휘말려 들만큼 민첩하고 부드러운 동작, 상대의 흐름을 낚아 채 본인의 흐름으로 휘어잡아야 하는 ‘역전의 힘’이 필요한 유선(柔線)의 동작 원리, 즉 상당히 부드러운 힘으로 큰 힘을 만들어 내어 승리하는, 내공이 세야 하는 운동이다.
 나는 예전에 무용과 아이스 댄싱, 피겨 스케이팅 등 중력을 빗겨가면서 속도와 힘을 증폭시켜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무용과 유사한 스포츠를 보면서 과연 무용과 이 스포츠들과의 차이는 무엇이며, 과연 무용이 이 미적 스포츠(aesthetic sports)들과 비교해 미적으로 월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이는 얼마 후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으로 무용뿐 아니라 연예계까지를 가볍게 올킬 하며 여왕으로 등극한 사건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는 실증하여 보여 주었다고 본다. 김연아의 경기가 과연 예술인지 스포츠인지에 대한 답은 너무나 명확하나, 그것이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것이 준 미적 체험이 극장에서의 춤에 비해 약하다고 얘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춤과 미적 스포츠의 구분은 점차 모호해 지고 있다.
 <유도>는 유도가 갖고 있는 남성적 힘의 긴장, 서로의 체중을 던지고 메쳐야 하는 급격한 추락 등 춤동작과 유사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는 동작들을 잘 선택하여 춤화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맨몸에 검은 슈트를 걸친 5명의 남자들은 처음부터 그것이 유도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도록 체중을 바닥에 다양하게 던지면서 무너지고 미끄러졌다. 서로를 메치다가 거칠게 서로를 올라타 험상궂은 얼굴로 기합을 지르면 그 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두 명의 대무(對舞)로 유도 경기의 대결구도를 민첩하게 묘사하기도 하면서 무대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거칠게 보이던 그들의 동작은 밖으로 뿜어내는 폭력적인 것이 되기보다는 안으로 삼키는 역방향을 택함으로써 무용수들은 점차 깊은 침잠을 하는 것과 같은 명상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만들어 갔다. 그 깊은 집중은 점점 더 서로를 민감하게 느끼면서 세밀하게 조율해 들어가 서로의 몸을 contact하면서 만들어내는 조형성으로 자연스럽게 증폭되어 간다.
 이런 흐름은 후반으로 가면서 두 명의 유도복을 입은 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그 소리의 강도와 호흡의 양만큼 그들의 상체가 부풀어 그것의 크기로 더욱 화가 나 보이고 그것을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만화적 상상력’의 한판 장면이 있는가 하면, 매트들로 짜 맞춰져 있는 바닥에서 그것을 한 장 씩 들어 올려 그 밑으로 무용수가 들어가기도 하고, 그것을 들어 올려 몸에 대고 가로로 들고 춤추기도 하는 등 박순호는 유도의 동작 요소들과 중요한 환경인 바닥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등 시종일관 유도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춤으로의 탈주를 돕는다.
 전체 45분의 작품 중 30분 이후 종결부분까지 박순호는 뜨거워진 무대와 이완된 무용수들의 몸을 가지고 4각의 무대 위에 다양한 몸과 동작의 변주를 풀어 놓는다. 무용수들은 하얗게 강조된 바닥을 마치 등판하는 선수들처럼 횡과 종으로 익숙지 않은 등장선과 2명과 1명의 대조를 동작의 속도와 리듬을 다르게 하여 무대 위에서 질 다른 움직임이 공존하게 하는 등 안무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로 신선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후반부에 동작이 화려해지고 수려해지면서 속도를 갖출수록 침잠한 무용수들이 쉬이 경쾌해지지 않는 분위기 때문인지 관객 역시 이 작품이 유도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혼돈스럽거나 지루해 지기 시작한다. 이는 유도는 예술이 되기 위해 미적 특질을 확보한 채 예술 형식을 새롭게 부여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춤동작의 소재가 잠시 되어 주고 사라진 느낌이며, 춤은 유도로부터 스포츠로써 가지고 있는 긴장, 신체성, 폭력성, 연극성 등에 대해 새로운 차원을 공급받지 못하고 춤동작 놀이로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유도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즉 다른 말로 춤이 유도로부터 예술적 요소들을 끌어내어 형식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도로부터 왔다는 것과 무관하게 춤으로 충분히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도가 그 자체로 어차피 미적 체험을 충분하게 할 만큼 예술적인 종목은 아니기 때문에 춤과 유도가 만났을 때 춤은 그로부터 새로운 계기를 관찰하고 뽑아내어 예술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유도>에는 유도의 격투, 대결, 싸움, 폭력성 등이 실제와 유사성을 가진 채 잘 포착되어 춤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어지지 못하고 동작으로만 유실되어 버려 그것이 삶속에서 만나는 것으로 은유되거나 상징되지 못하였다. 이는 유도가 결국은 경쟁과 생사의 대결, 즉 누구나 가장 두려워하는 패배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경기이며 승패가 엇갈리는 드라마성을 갖고 있다는 흥미로운 측면도 전혀 조망되지 못한 채 계속 어떤 이야기나 극성(劇性)과는 무관한 동작의 나열로만 흐르고 말았다.




 춤이 스포츠와 만나려 하고, 스포츠가 춤과 만나려는 경향은 예술 내 장르의 크로스오버보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형식과 형식의 충돌과 확장의 재미와는 다른 더욱 풍부한 결과를 만들어 낼 만남이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춤은 춤에만 갇혀있을 때와는 다르게 스포츠의 격렬한 경쟁과 강렬한 신체운동성을 통해 동작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삶의 문제, 세계적 이슈, 사회적 정의 등의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 계기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잘 형식화하여 표현하여 예술이 된 스포츠는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전달시켜 미적 체험을 하게 함으로써 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영토를 만들게 될 것은 당연하다.
 언제부턴가 예술이 아주 좁은 의미의 형식놀음으로 왜소해진 경향이 있다. 특히 안무가들의 그 혼란은 깊어서 춤이 무엇을 다루고 무엇을 창작해야 하는 지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마저 희미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움직임의 리듬과 공간성 혹은 음악으로부터 독립하여 갖게 되는 절대적 고유 영역에 대해 너무 숭고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것이 춤의 예술성을 오히려 떨어뜨리는 치명적 결함을 갖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대개의 경우 삶을 재현하거나 정서적 표현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으로 인해 관객에게는 의미설정이 되지 않은 지루한 동작의 나열로 보여 질 수 밖에는 없다.
 스포츠와 예술의 차이를 고민했던 학자 Spencer Wertz는 동작은 상황과 의도를 통해 의미를 가지며, 그렇게 의미를 가질 때 예술이 되고, 스포츠의 동작은 이런 의미를 갖지 않기에 예술이 없다고 지적한 것처럼 춤이 어떻게 예술이 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목과의 만남은 그저 형식의 말초에서 헤매자 심부를 찌르지 못한 채 애매한 것으로 남게 될지 모른다.
 5명의 무용수들은 침잠하고 명상적이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연습 시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컨택은 치밀하게 밀착되어 있어 어느 작품에서 보다 수준 높은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예술이 되기 위한 춤에 대한 생각은 빈약하지만 박순호의 장점은 치밀하고 집요하게 관습을 깬 동작을 향한 열정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무용수들의 동작은 여느 작품과 다르게 손과 얼굴 표정이 살아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신선한 동작들은 원시성과 도시성을 적절하게 배합한 것으로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동작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더불어 안무가 박순호가 다음 작품에서는 춤예술이 되기 위한 재현과 표현을 위해 ‘활쏘기’와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가 창조한 동작들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고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2014. 07.
사진제공_LIG문화재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