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춤협회 박지혜 ·전정아 ·유승관 ‘무용을 위한 칸타타’
춤과 음악의 융복합
이만주_춤비평가

 2007년, 한국전통무용의 계승‧발전을 위해 태동한 우리춤협회가 다음 세대 젊은 한국무용가들에게 작품 발표의 기회와 발전의 계기를 제공키 위해 마련한 ‘무용을 위한 칸타타’ 가 2014년 8월 16일과 1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렸다.
 특히 이번 행사는 오늘의 한국춤이 다른 장르와의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고, 젊은 무용가들의 지평을 넓혀주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어 보였다. 실제로 한국창작춤과 창작국악, 양악 그리고 생음악이 실험적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였다.
 각각 세 작품씩 이틀 공연 중, 17일의 공연만 관람한 필자로서는 전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전반적인 느낌은 가질 수 있었다.
 17일의 세 작품 모두, 한국 전통예술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 “가락이 있고 춤이 있는 것이여”를 연상시키듯 춤과 음악의 융복합이었다. 작품들은 한국전통춤에서 비롯된 창작춤이었다.
 우리 춤 학계에서는 그와 같이 우리 춤사위에 뿌리를 두고 창작된 춤들을 구분하여 ‘한국창작춤’ 내지는 그냥 ‘창작춤’이라는 용어로 일컬어 왔다. 하지만 자기 나라 고유의 춤에 뿌리를 두고 현대의 춤으로 창작하는 현상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현대에 추어지는 창작춤을 모두 ‘컨템퍼러리 댄스’(Korean Contemporary Dance)라는 용어 안에 포함시키는 경향을 볼 때, 한국의 창작춤도 컨템퍼러리 댄스라 해도 무방하다. 굳이 구별을 하자면 ‘코리언 컨템퍼러리 댄스’(Korean Contemporary Dance)라고 할 수도 있겠다.





 8월 17일, 첫 번째로 공연한 박지혜 안무, 앙상블 시나위 작곡의 <만월>(滿月, Full Moon)은 춤과 음악이 각각 자기의 영역을 드러내면서도 잘 어우러진 무대였다. 젊은 신예안무가인 박지혜는 무대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며 연극적인 구성으로 빛과 생명의 근원인 달과 해를 한국춤의 춤사위로 표현했다. 여자 무용수 네 명(김지연, 이은솔, 손효진, 류혜진)은 호흡을 맞춰 달과 음(陰)의 이미지를 그렸고, 해와 양(陽)의 이미지를 표현한 남자 무용수 지승환은 한국춤의 역량 있는 춤꾼임을 보여주었다. 음악도 국악과 양악인 피아노가 어울리고 다시 직접 부르는 우리 창(소리)이 가미되는 통섭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로 이어진 전정아 안무, 라이트 브레인(Right Brain: 이름과는 달리 한국인들임) 작곡의 <그림자 떼어주기> 역시 춤과 생음악으로 연주되는 국악이 앙상블을 이루었다. 세상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붙어 다니는 신비한 존재인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 떼어주기>란 지극히 추상적인 제목을 갖고 작품을 만든 안무자는 “타자(他者), 시간 등, 모든 인연과의 융합의 가능성”을 춤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
 작품은 인연의 상징인 그림자와의 관계를 그리기 위해 안무자 자신이 직접 출연해 다른 한 명의 무용수 박윤정과 함께 여성 2인무를 추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의욕적인 의도를 관객이 쉽게 따라 잡을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세 번째 작품인 <심미 정서로서의 흥(興)>은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안무자인 유승관은 한국적 흥의 정서를 적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흥은 악(樂)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중략). 흥을 한국 춤의 정신세계와 정서의 핵으로 보고 한(恨)을 풀어 흥(興)으로 전환하는 카타르시스로 표현하였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풍물이 동원될 줄 알았고 관객도 작품에 몰입되어 어깨가 들썩이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의외였다. 시작부터 무대 앞에 의자들을 놓고 여러 출연자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관객의 정신을 빼더니, 기차소리가 나기도 하고, 모든 남녀 연희자들이 옷을 벗어 팽개치고, 춤추고, 나자빠진다. 무대에 모터바이크가 등장하고 타악과 모터바이크의 ‘부릉부릉’ 소리가 불협화음의 화음을 이룬다. 마지막에 심벌즈 타악에 맞춰 남자 다섯 명, 여자 네 명 모두가 춤춘다.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였고 현대판 도깨비장난이었다.





 한국인의 흥이란 신명이고, 시나위적인 끼이고, 도깨비장난이고, 해학이다. 작품 <심미 정서로서의 흥(興)>은 독특한 시도에 해학이 있었고 나름으로 다양한 노력이 돋보였다. 흥의 색다른 해석이었다. 음악을 작곡하고 무대에서 타악으로 직접 연주한 허성은도 한 명의 현대판 도깨비였다.
 얼을 잃으면 자기네 예술은 사라진다. 왜 제목에 외래어를 썼는지 모르겠다. 칸타타(Cantata)는 바로크시대에 성행했던 성악곡의 형식으로 알고 있는데 ‘무용을 위한 칸타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리송하다. 요즘 춤판에도 영어와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다. 우리춤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우리춤협회만이라도 무용이라는 한자어 낱말 대신 순수 우리말인 ‘춤’을 쓰고, 최소한 제목에 외래어를 배제하면 안 되는 것일까?
 고급한 예술은 본래 감상력 있는 소수(The Few)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공연예술은 관객을 전제로 성립한다. 관객이 떠나면 공연예술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만드는 사람들의 자기만족만으로는 곤란하다. 작품이 관객에게 감동을 주거나 울림을 전달하여야 한다. 최소한 재미있어 자발적으로 관객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의 속도(Tempo)가 빨라지고 있고, 따라서 춤도 강한 비트의 빠른 춤이 유행하고 있는 때, 우리 젊은이들을 어떻게 우리춤으로 끌어들일까 하는 문제는 무척 고민스러운 문제이다.
 춤 창작이란 어렵다. 한국창작춤의 안무와 연출은 더욱 어렵다. 어제의 전통과 오늘의 창작을 두 손에 잡고, 세계 춤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며, 영향을 끼칠 춤예술을 발전시켜야 함은 우리춤에 주어진 크나큰 과제이다.

2014. 09.
사진제공_우리춤협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