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 K 발레월드 개폐막공연
안무가의 존재감, 발레 전문화의 가능성

 한국발레협회가 주최하는 2014 ‘K 발레 월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한국발레의 ‘벨르 에포크’라 할 2000년대, 당시 국제무용연맹 김혜식 회장이 주도했던 ‘세계 발레스타 페스티벌’ 같은 국제교류가 단절된 허전함을 채워주는 대표적 행사이자 과거의 화려함을 재현할 수 있을 법한 발레축제다.
 ‘한국의 발레를 세계로! 세계의 발레를 한국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김인숙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행사를 분담해 8월 22일부터 9월 5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의 공연과 부대행사를 진행시켰다.
 8월 30일 5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의 개막공연은 발레협회 34년의 역사, 2006년부터 시작된 국제행사 진행 경험이 만든 결실로 손색이 없다. 월드스타 초청,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유망주 발탁, 한국 초연작 소개 등의 기획 의도를 내비친 프로그램은 주어진 조건 아래서 외양과 내실의 조화를 이뤘다.




 개막작은 비엔나발레단 루드밀라 코노바로바와 블라디미르 시쇼브가 국내 초연한 <잠자는 미녀> ‘웨이크 업 파드되’로 영국 안무가 피터 라이트가 연출한 장면이다. 보통은 왕자가 공주를 깨우는 정도로 마무리 되지만 이 안무가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짚고 가도록 구성해 재치 있고 예쁘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아다지오에 나오는 균형 잡기 포즈들이 반복되고, 넓게 뛰기나 발레리나를 들어 올려 퇴장하는 정도의 난이도를 지닌 오프닝용 공연에 적합한 듀엣이다.
 이어진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 파드되는 볼쇼이발레단 안나 티호미로바와 아르템 오브차렌코가 연기했다. 십대 나이로 변신한 듯 두 사람은 참으로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상 속 줄리엣 같은 미모의 발레리나와 소년티를 간직한 남성 파트너의 몸짓이 극적인 흡인력을 지녔다면 안무자가 즐겨 쓰는 고난이도의 공중 포즈는 범접하기 어려운 발레의 세계를 과시한다.
 이 두 스타 커플은 모두 러시아 출신으로 후반부에 <백조의 호수> 2막 아다지오와 <황금시대> 중 ‘탱고’로 다시 출연해 러시아 발레의 힘을 새삼 확인시켰다. 루드밀라 코노바로바는 강한 포인트와 곧은 라인을 기반으로 파트너의 여유로움에 이끌려 안정감과 섬세함을 갖춘 높은 수준의 백조 연기를 선보였다.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재조정해 1982년 초연한 <황금시대>는 한국 초연작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1920년대 소련에 있었던 레스토랑 ‘황금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된 청년동맹과 폭력단의 알력을 다뤘다고 한다. 쾌락적 분위기의 검정 의상을 입은 무희와 연미복을 입은 남성이 주고받는 동작구가 탱고 리듬에 전개되는 춤으로 거리낌 없이 뻗어내는 선과 곡예적 포즈들이 다시 한 번 유리 그리가로비치와 볼쇼이발레단의 깊은 인연을 강조했다.
 외국단체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스타로는 선화예술고등학교와 슈투트가르트 존 크랑코 발레학교를 졸업한 포르투갈 국립발레단 주역 서덕인이 출연했다. 같은 단체 솔리스트 미우라 유리나와 함께한 <프렐류드>는 페르난도 듀아르트가 바흐 조곡에 안무한 소품이다. 타이즈와 튜닉, 짧은 팬츠와 흰 셔츠를 입은 현대발레 외양으로 무음악에 각자 등장해 중앙에서 만나고, 빠른 멜로디를 따라 동작구를 연결했다. 여성의 기교 소화력이 야무지고, 파트너를 정성스럽게 리드하는 서덕인은 미소년 주역의 전형적 매력을 지녔다.
 예비스타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소연과 하지석이 등장했다. <해적> 그랑 파드되에서 두 사람은 안정된 연기, 회전기의 속도감 등에서 학생 수준을 넘어선 기량으로 갈채를 받았다. 유니버설 발레단이 유일한 군무 <스페인 정원의 밤>으로 참여했고, 개막식에 따른 축하공연에 서울오페라앙상블이 출연했다. ‘K-발레 월드’ 이번 개막공연은 전문적 국제교류가 곧 전문적 대중 관객을 만들 수 있음을 회고하게 했다.
 9월 5일의 폐막공연은 대표적 두 스타가 담당했다. 발레리나 김주원이 <마그리트와 아르망>에 출연했고, 최근 가장 활발한 발레 안무가로 부상한 김용걸이 완성도 높은 신작 <빛, 침묵 그리고…>를 발표했다.




 알렉산더 듀마 피스의 소설 ‘라 담므 오 카멜리아(La Dame aux Caméllias)’를 각색, 프레드릭 애쉬튼이 안무한 <마그리트와 아르망>은 1963년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에프가 초연했다. 흰 동백꽃 장식을 좋아했던 여주인공 마그리트가 결핵으로 죽어가며 아르망과의 사연을 회상하다가 다시 현실에서 아르망을 만나 진실한 사랑을 전하는 구성이다.
 이 작품은 현재 ‘김주원의 마그리트와 아르망’으로 불린다. 강한 자신감이 내포되었으나 다른 외국 영상과 비교하니 명작 재연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해석이 없다’는 말은 전통적으로 통용되는 지적인데, 이번 무대에도 해당된다. 고급 창녀 마그리트가 등장하는 배경이 초라해서는 안 되고, 그 주변에서 서성이는 19세기 파리 사교계의 남성들은 특유의 스노비즘을 의상과 태도에서 끊임없이 뿜어내야 마땅하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그저 기뻐하거나 요염하게 시선을 옮겨서야 마그리트 특유의 매력이 전해질 리가 없다.

 김주원 교수는 기교면에서도 과거 국립발레단 시절의 광채를 잃었다. 동작 연결이 비교적 쉬운 작품이라 부담이 없을 수 있겠으나 치마 속에 감추어진 라인이 출연자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듯했다. 아르망 역 이승연도 주어진 동작을 따라가는 정도였다. 남자의 기교가 보다 빛나도록 안무된 작품이라 상황 연기와 순수 기교 나열을 자유롭게 오가야하는데 반해 어느 한 가지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요구하는 심리 묘사가 총체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김용걸 교수가 안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출연한 <빛, 침묵 그리고…>는 최근 그가 보여준 <워크>나 <의식>과 맥을 같이하는 분위기로 시작했다. 검정 의상, 선글라스, 속도감 있는 기교, 단절된 장면이 쌓이는 구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무가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그들의 팔 동작과 상체의 굴신이 결국 비극의 암시였다는 점을 마지막에 알게 되었다.
 지리 킬리언의 <외침>에서처럼 한 소녀가 유리창 소품에 얼굴을 뭉개는 한 장면이 모든 것을 이해시켰다. 킬리언이 그 행위 자체를 다룬 것에 반해 김용걸은 사실적 묘사를 위해 유사 장면을 대입하니 그 활용도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높다. 그녀는 구명조끼를 입었고, 거기서 물이 떨어진다. 2014년 4월의 참사를 다룬 <빛, 침묵 그리고…>에서도 김용걸의 뮤즈 김희선이 주역을 맡았다. 누구보다 빠른 기교적 전환, 인물해석, 음악성 등에서 안무자와 무용가의 조화가 매번 기대 이상의 멋진 광경을 선사한다.
 작품 해석력과 구성력에 초점을 둔 폐막공연의 기획 의도는 고무적이다. 기교습득 단계 이후의 전문성 추구가 목표인, 한국 발레의 임무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무대다. 따라서 대중적 스타 발레리나와 세계적 수준의 발레 어휘를 구사하는 안무자의 존재는 참으로 귀하다. 전문성의 대중화는 문화 강국의 기본이다. 이번 폐막공연에서 그 목표를 향한 첫 발을 내디뎠다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 같다.

2014.10.1
사진제공_한국발레협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