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길무용단 김현태 안무 〈바보〉
‘바보’ 연구로 현명해지고 깊어진 춤
권옥희_춤비평가

 해금소리, 푸른색 조명만 남아있는 텅 빈 무대. 오케스트라 박스가 흰 물체를 싣고 서서히 올라온다. 거대한 지전 덩어리다. 타자를 영접하는 자리. 천천히 무대가운데로 들어서자, 지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넋이 실렸다. 해금소리가 지전을 파고든다. 지전에 실려 춤을 추는 넋. 넋을 위무하는, 죽은 이를 위한 춤. 두 명의 무용수가 지전을 날개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한 명이 다른 한 명에 어깨위에 오른 채 만들어내는 그림이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김현태(정길무용단 대표)의 <바보>(9월 6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죽음은 존재론적 관점에서건 사회적 관점에서건 거대한 변화의 알레고리이다. 안무자는 ‘온달’의 이야기를 순차적 구조가 아닌 결말, 즉 죽음부터 제시한다. 죽음으로 삶을 풀어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김현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아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미리 가 있다. 그것은 현실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열리게 될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을 확신하고 그 인식으로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함이다. 미래, 그러니까 죽음의 시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 현실 조망의 높이를 확보한 뒤,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감정적 확신을 위한 장치 말이다.
 안무자(김현태)는 온달의 내면을 자신(김현태)과-서상재 투 톱으로 배치. 흰 의상을 입은 온달(김현태)이 팔로 가슴을 감싼 채 천천히 걸어 나오면, 평강이 뒤따른다. 오케스트라 박스 위치에 벌거벗은 채 엎드려 있는 남자, 그의 몸 위에 놓인 투명 아크릴판을 온달이 밟는다. 산자와 죽은 자의 자리바꿈이 일어난다.
 아크릴판은 지상과 지하의 경계,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장치. 온달, 지상(현실)에서 지하(죽음)로 이동한다. 오케스트라 박스가 내려가자 생기는 검은 공간, 평강(편봉화)이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오열하면서 지하를 향해 엎드려 팔을 뻗는다. 검은 머리채가 무대에서 아래로 걸린다. 처절한 슬픔이 섬뜩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전쟁의 장, 14명의 남자무용수들의 군무는 힘과 유연함이 적절히 배합된, ‘정길무용단’ 남성 춤의  강점이 잘 드러났다. 병사들이 무대 깊숙한 곳에서 무대 앞으로 이동하는, 마치 객석으로 물 밀 듯 밀려오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조명의 효과와 타악 음악으로 인해 역동적인 무대가 되었다. 반면 여자무용수들의 군무는 남자들의 군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 유연함 서정미 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장검무와 태권도 동작을 춤으로 변형 시킨 전투신 또한 촘촘하지 않은 안무로 인해 춤이 헐거웠다. 
 첼리스트의 연주에 실은 온달 김현태의 솔로. 내적 고뇌에 찬 온달의 정서를 서정적인 춤으로 잘 풀어낸다. 흰색 의상과 등 뒤 허리춤에 꽂은 흰 부채. 큰 부채를 양손으로 잡고 추는 부채춤에서 강인한 장수로서의 온달이 보이는가하면, 이내 한 손 부채춤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유약한 온달의 모습을 추어낸다. 부채를 바닥에 힘 있게 꽂으니, 부채위에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조명의 정교한 작업으로 일순 팽팽하게 긴장되는 무대. 치마폭을 펼쳐들고 추는 춤이 섬세하고 유려하다. 삐죽삐죽 뻗치게 자른 머리칼, ‘온달’에 실은 ‘김현태’의 고뇌와 내적 갈등이 묻어나는 춤이었다.
 눈덩이를 굴리듯 무대를 돌면 무용수들이 묻어 나오면서 펼쳐지는 군무. 군무 속 평강과 온달(서상재)의 춤. 투톱인 ‘장군’온달 서상재의 힘 있는 춤이 유려한 반면 평강(손애림)의 춤 선이 약했다. 군무진의 춤, 재미가 없다. 맥락 없이 솔로, 군무, 듀오를 번갈아 배치하는 이런 식의 춤의 배치, 반드시 필요할까. 물론 군무진의 춤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춤이 있다. 칼 같이 날카로운 춤의식과 안무에서 비롯된, 새로운 춤 언어로 구성된 춤 말이다.




 많은 질문을 객석으로 던지는 마지막 장. 두 명의 온달과 평강(손애림)의 춤. 권위적이고  진취적인 ‘장수’ 온달(서상재)과 내성적이며 순수한 ‘바보’온달(김현태)이 같은 공간에 있다. 온달의 삶을 응축한 장치가 내려오자 무대에는 바보 온달(김현태)과 평강만이 남는다.  ‘장수’온달이 죽었다면 ‘바보’ 온달은? 장치를 사이에 두고 바보 온달과 평강은 서로 바라볼 뿐 만나지 못한다. 왜? ‘죽음’이라는 단순한 의도로 읽히지 않는다. 죽은 ‘장수’ 온달은 평강의 욕망이 투영된 환영이 아닐까. ‘장수’온달은 행복했을까.

 답은 관객 몫이다. 비평하는 이는 안무자가 제기하는 문제와 해답이 타당하다고, 또 그것들이 마땅히 제기되어야 한다고 가장 먼저 공적으로 확인해주는 사람일 뿐. 수작이었다.
 온달의 생을 은유, 상징, 압축한 무대장치, 빼어났다. 11개의 납작한 판이 엇갈리고 서로 겹쳐진 둥근 원모양의 형태가 공중에 걸린다. 그곳에 조명이 비추자 만들어지는 꿈의 환영. 말하자면 작고 큰 판이 겹쳐져 하나의 큰 구가 만들어지듯, 작은 노력이 결과가 큰 장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의 무대 장치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무대미술은 함축적이고 근사했다. 또한 압축시킨 듯한 작고 깜찍한 상모와 군무진의 의상. 병사들의 갑옷임을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상의. 그리고 계명대 한국무용 계열임을 알 수 있는 남녀의 긴 투피스 의상의 컬러, 간결했다. 깊이 있게 발전한 안무와 춤, 반가웠다.

2014. 10.
사진제공_정길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