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발레블랑 김정은〈그 너머에〉 & 이지혜〈하얀 꽃잎으로...〉
기하학적 구성의 미학
이만주_춤비평가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요즘 한국의 발레계를 접하면서 갖는 생각이다. 마치 우리 전통무용에서 한국창작무용이 촉발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지금 한국의 발레는 수많은 창작과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그 수준과 완성도 또한 놀라울 정도로 높다.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발레 관객에게는 즐거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014년 발레블랑 정기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진 김정은의 <그 너머에>와 이지혜의 <하얀 꽃잎으로...>(9월20일, 이화여대 삼성홀)는 평범한 기대와 추측을 뛰어넘어 한국의 발레무용단으로는 3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갖는 발레블랑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작품들이었다. 그것들 또한 한국 발레 백화제방의 한 예였다.
 역으로, 현대적인 요소와 상상력이 최고도로 발휘된 요즘 발레의 실험들 사이에서 창작발레이면서도 고전발레에 충실한 느낌을 주어 귀향했을 때의 편안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김정은의 작품 <그 너머에>의 영어 제목은 ‘Red Queen's Race’이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도출된 개념인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s Hypothesis)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그런데 작품 내용에서는 다시 “끊임없는 욕망과 강렬한 쾌락의 추구는 고통스러운 극한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 1981)의 주이상스(Jouissance) 이론을 다루었다. 그런 추상적이고 난삽한 이론들을 발레로 안무하면서도 김정은은 관객이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때그때 1개 내지 6-7개의 의자를 소도구로 활용하여 무대에 변화를 주며 안무자가 의도하는 바를 표현했다.




 이지혜의 <하얀 꽃잎으로...>는 오를레앙의 성처녀 잔 다르크 이야기를 다루었다. 왜 하필 지금의 한국 발레에서 잔 다르크일까 하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은 것도 잠시, 작품이 진행되면서 그러한 선입견은 이내 불식되었다.
 예술이란 ‘무엇을 다루느냐’에 못지않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사뭇 달라진다. 이지혜는 잔 다르크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도록 연출하고 발레라는 언어로 명확하게 안무했다. 그녀는 자신이 주역으로 출연하여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면보다 한 여인으로서 갖는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를 춤으로 연기했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신념에 찬 인간으로서 화형장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는 그녀의 춤과 연기는 압권이었다.
 춤의 안무에 있어서는 무대 위 무용수들의 배치, 즉 기하학적 구성이 중요하다. 춤의 안무는 조각이나 설치작업(Installation) 같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춤이라는 움직임을 통해 미학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특징이며 발레에 있어서는 특히 더하다. 김정은과 이지혜는 둘 다 그들의 작품에서 무대 위 무용수들의 배치와 기하학적 구성의 미학을 훌륭하게 구현했다.
 <그 너머에>는 안무자 김정은을 포함한 7명의 발레리나가 출연했다. 남자 무용수로는 용기와 알렉스가 나왔다. 에트랑제 남자 무용수인 알렉스의 존재와 춤이 분위기를 돋았다. <하얀 꽃잎으로...> 역시 안무자 자신을 포함한 8명의 발레리나가 출연하여 전쟁 장면 등을 박진감 있는 춤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도 남자무용수인 박기현과 김주범 두 명이 출연하여 잔 다르크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이중성격의 샤를 왕세자 역과 잔인한 적국의 수장 역을 춤추며 연기했다.




 발레는 그 특성상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는 춤예술이다. 이번 출연자들의 기량은 발레블랑의 긴 역사를 대변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김정은이 작품 <그 너머에>에서 차용한 ‘붉은 여왕 가설’은 “주변 환경이나 경쟁 상대가 빠른 속도로 변화할 때, 웬만큼 진화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자생존에 뒤처지게 된다”는 진화론의 한 개념이다. 김정은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앞서가던 발레단이었던 발레블랑과 발레 무용가인 자신에게 하나의 성찰을 던졌다. 작품 <하얀 꽃잎으로...>로 창작발레의 격조를 보여준 이지혜는 발레블랑을 위한 잔 다르크였다.
 어느 역사에서나 긴 기간 종교의 덕에 예술이 발전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예술에 있어 종교적 요소가 심하게 가미되면 예술은 죽는다. 하지만 섣부른 실험으로 자칫 가벼워질 수 있는 예술에서 신앙의 덕으로 경건성과 기품을 견지하는 것이 발레블랑의 장점이다.

2014.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