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스크린에는 없는 무비컬 속 퍼포먼스
송준호_문화칼럼니스트

이번 겨울 뮤지컬 무대는 무비컬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고 있다. 〈레베카〉, 〈보디가드〉, 〈빅 피쉬〉, 〈영웅본색〉 등 대형 작품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눈길을 끈다. 작품성과 상업성이 검증된 영화를 원작으로 둔 만큼,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낯선 이들에게도 익숙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무비컬의 강점이다. 특히 무비컬은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는 무대예술만의 특성을 통해 새로운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무대에서 다시 보는 명작 영화, 그 이상의 춤

2016년 초연 후 3년 만에 돌아온 〈보디가드〉는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1992년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2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후 국내에 소개된 이 작품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스토커의 위협을 받는 당대 최고의 팝스타 ‘레이첼 마론’과 보디가드 ‘프랭크 파머’의 사랑을 담았다. ‘아이 윌 올웨이스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 등 휴스턴의 히트곡들로 구성된 주크박스 뮤지컬이기도 하다.




뮤지컬 〈보디가드〉 ⓒCJ E&M




 휴스턴이 활동하던 1980년대의 미국 팝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원작 영화는 이 작품에도 오롯이 담겨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특히 당시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것 장면은 막이 오르고 처음으로 등장하는 레이첼 마론의 화려한 무대. 화려한 의상을 입은 마론과 앙상블들이 함께 꾸미는 역동적인 퍼포먼스는 강렬한 무대 장치와 어우러지면서 당시 휘트니 휴스턴의 열광적인 콘서트장을 떠오르게 한다.
 제인 맥머트리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남자 백업 댄서들이 여성 스타 싱어를 서포트하는 일명 ‘여왕’ 콘셉트의 군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로 1980년대 팝 퍼포먼스에서 자주 활용된 스타일이다. 이 밖에도 휴스턴의 또 하나의 히트곡인 ‘아이 워너 댄스 위드 섬바디(I Wanna Dance With Somebody)’ 신에서는 댄서들이 당시 유행하던 가죽 재킷을 입고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지난 세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는 주연 캐릭터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으로 쓰인 이 군무 신은 무대에서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띄우는 주요 대목으로 활용된다.




뮤지컬 〈보디가드〉 ⓒCJ E&M




 한편 다니엘 월러스의 동명 소설과 2004년 개봉한 팀 버튼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빅 피쉬〉는 CJ E&M이 〈킹키부츠〉, 〈보디가드〉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 뮤지컬이다. 허풍쟁이 아버지 ‘에드워드’가 전하려 했던 진실을 찾아가는 아들 ‘윌’의 여정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2013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후 6년 만에 브로드웨이 버전과 런던 웨스트엔드 버전을 더해 한국 버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뮤지컬 〈빅 피쉬〉 ⓒCJ E&M




 개막 전부터 〈빅 피쉬〉는 영화에서 팀 버튼이 보여준 동화적 상상력을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마녀, 인어, 거인, 늑대인간 같은 초현실적 캐릭터와 서커스까지 등장하는 판타지적 요소들은 무대 환경에 잘 어울리지만, 자칫하면 아동극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어 톤을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각본에 이어 뮤지컬에서도 각색을 맡은 존 어거스트는 원작 소설이나 영화에 없는 디테일한 설정들을 만들어 무대에서 절묘하게 구현해냈다. 에드워드가 아내 ‘산드라’에게 프러포즈하는 수선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시종일관 잔잔하고 다소 기괴한 분위기로 전개된 영화와 달리 뮤지컬에서는 밝고 경쾌한 느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무대 버전만의 특징이다.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춤과 노래다. 브로드웨이 초연 버전은 뮤지컬 〈컨택트〉로 유명한 안무가 겸 연출가 수잔 스트로만이 연출을 맡아 춤과 퍼포먼스의 비중이 부각됐다. 반면 한국 버전에서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립을 중심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데 무게가 더해졌다. 홍유선 안무가는 이번 한국 버전에서 휴머니즘과 판타지의 결합을 춤을 통해 적절히 구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겪은 환상적인 모험이 회상이나 아들과의 대화로 언급되면서 무대 위에는 추억 속 인물들이 현실의 부자와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인어의 춤이나 광대의 애크러배틱, 앙상블들의 군무는 집이나 병원에서 느닷없이 출현하지만, 영화에서의 연출보다 이런 뮤지컬적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뮤지컬 〈빅 피쉬〉 ⓒCJ E&M




무비컬 성패의 조건들

영화 원작 콘텐츠에 뮤지컬의 특성을 결합한 무비컬은 국내 뮤지컬 산업의 주요 부문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됐다. 창작뮤지컬에서는 2004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싱글즈〉, 〈미녀는 괴로워〉, 〈라디오 스타〉 등 2000년대 후반까지 무비컬이 잇따라 제작되며 화제와 흥행을 이끌었다. 특히 〈미녀는 괴로워〉는 영화의 OST가 유명해지면서 자연스레 대중성을 확보했고, 무대에서도 음악들을 활용하며 현장의 생동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2008년 초연 후 200회 이상의 공연을 올리며 10만 관객을 동원한 〈라디오 스타〉 역시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작곡상, 작사상을 받는 등 작품성과 상업성을 함께 인정받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로 무비컬의 성공 사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는 무비컬이 가진 양가성과 관련이 있다. 무비컬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보장된 대중성이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춤과 노래가 중심이 되는 뮤지컬은 당연히 영화와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은 원작 영화와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원작의 매력을 유지하면서도 무대만의 특성을 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대화의 과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원작 영화의 명성은 분명 보험이 되지만, 동시에 내용이나 스타일까지 흡사하다면 원작을 굳이 무대로 옮길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비컬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원작의 작품성을 기본으로 뮤지컬만의 스토리 라인과 양식을 새롭게 구성해 제시해야만 한다. 이미 내용을 아는 관객들의 기대감을 넘어서려면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색이나 연출 스타일의 혁신이 필수인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화려한 무대장치와 특수효과 등 볼거리가 풍부한 무비컬들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난달 개막한 〈영웅본색〉은 첨단 영상기술과 특수효과로 1980년대의 홍콩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화제가 됐다. 〈벤허〉에서 실제 크기의 전차를 무대에 재현했던 왕용범 연출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1천 장이 넘는 LED 패널을 무대에 도입해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왕용범과 전작 〈프랑켄슈타인〉 이후 줄곧 호흡을 맞추고 있는 문성우 안무가는 이번에도 개성 있는 안무를 통해 영화 속 암흑가 이야기를 오늘의 무대에 풀어놓았다. 각종 특수효과와 어우러진 액션 신들은 1990년대의 홍콩영화 붐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준다.






뮤지컬 〈영웅본색〉 ⓒ빅픽처프러덕션




 이처럼 무비컬의 제작이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스크린과 무대의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구체적인 장소와 장면 구성을 통해 구현되지만, 뮤지컬을 비롯한 무대예술은 시간과 공간상의 제약이 많아 풍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결국 그런 상상력이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어떤 감동적인 체험으로 승화되느냐에 무비컬의 성패가 달려있는 셈이다.
 최근 무대효과, 춤, 퍼포먼스 등 화려한 시각적 재현으로 승부를 거는 무비컬들의 등장은 관객에게 이런 체험을 제공하기 위한 제작사들의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비컬의 존재 자체는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원작의 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무대만의 문법을 활용해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무비컬의 변신은 매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2020. 1.
사진제공_CJ E&M, 빅픽처프러덕션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