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의 글

마음의 달이 서로 비추거늘
- 草芥先生과 이승에서 5년간의 同行


이재준_클래식음반 리뷰어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리는 만났다.
音樂이 흐르고 있었기에
‘안네소피무터’ 바이올린 독주회
동행했다.
내 옆구리 한 쪽을
音樂人 이재준
나보다 젊은 그가.

(김영태 시 ‘同行’ 전문)

 선생이 하세(下世)하기 일 년 전인 2006년 늦봄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회가 끝나고 하현달이 어스름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오늘 ‘안네’의 검은 의상은 얼마 전에 잃은 부군에 대한 喪服일 거예요. 모차르트 K304번 e단조 바이올린 소나타가 오늘따라 애잔했어요.”
뜨락에 핀 산사나무 꽃의 여린 향이 침묵의 공간을 적셨다.

 선생을 처음 뵙기는 2003년 늦가을 이었다.
 “제가 선생님이 출간하신 책 52권을 읽었는데, 소묘집 〈往來〉는 비매품이라 구하지 못했어요. 여분이 있으신지요?”
 “무슨 일을 하시는데 제 책을 모으세요? 찾아봐서 나오면 연락드릴 테니 번호 남겨 주세요.” 추석이 지나고 혜화동 엘빈 커피 집에 한 권 맡겼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며칠 후 그 곳에 들르니 마침 선생이 계셔서, 역사적인 첫 대면이 이루어졌다. 서너 시간의 긴 대화가 있었는데, 나는 그간 선생의 책들을 읽으며 메모로 남겼던 음악. 미술, 연극, 무용에 대한 의문점들을 짚어나갔고, 선생은 어눌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일일이 답변하셨다. 선생께 드리기 위해 준비한 ‘Capet String Quartet'의 전집(cd5장)을 받고 기뻐하셨다.

 일지를 살펴보니 선생과의 ‘예술현장’의 동행은 음악연주회 13회, 화랑순례 31회, 국립박물관 관람 3회, 무용관람 2회, 대전, 대구로 지방여행이 두 번 등 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생과 식사 동행은 100여 번이 넘었다.
 ‘화가이며 시인이신 선생이 무용 쪽에 경도 되신 것 아닌가’ 해서 선생께 좀 더 많은 그림 그리기를 아뢰었고, 하여 도자화 작업도 내 주관대로 하게 되었다. 국민대 우수한 젊은 도예가가 백자를 빚고, 지하의 도예작업실에서 초벌구이 한 백자에, 코발트안료로 자유분방하게 그린 도자기가 20여 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꼬박 두 시간이 넘게 앉아서 붓을 휘두르던 삼매경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이대 후문 까페 ‘마비’를 무수히 드나들며, 선생의 그림들을 하나 둘 수집하기 시작했다. 선생의 동부이촌동 수정아파트에서 말년의 거소를 옮긴 혜화동 아남아파트까지 소위 ‘김영태 사단’이라 칭하던 많은 藝人들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다. 그 끝머리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도 있었다.
 나는 시집을 읽을 때는 침향을 사르고 마음을 정화한 뒤 책을 펴는 습벽이 있다. 그 것은 굴곡진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그리고 되새김질하며 모국어를 다듬어 토해 내는 이 땅의 시인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다. 특히 선생의 그 자그마한 손으로 밤새워 조탁한 문장들을 함부로 읽을 수는 없다. 산문집 그 어느 곳을 열어도 遊於藝[예술에서 놀다]의 격이 높은 경지를 마음 깊게 느낄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선생과 함께 이 찬란한 햇빛 속에서, 이 쑥부쟁이들을 일 년만 더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서울시립미술관 정원을 걷던 마지막 동행의 말씀이 되었다. 그 날 커피를 마시며 나는 가방에 있던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음반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Cantus in Memory of Benjamin Btitten)'를 카운터에 부탁 들려 달랬다. 두 사람 뿐인 텅 빈 공간을 울리는 그 곡으로 어쩌면 선생과의 이승에서의 전별을 예감했던 걸까?

 최종태 조각가의 연남동 작업실을 찾아, 존경하던 박용래 시인의 시비(詩碑)위에 앉은 청동 소녀상을 다시 보자던, 김익영 도예가의 파주 공방에서 커다란 도자 위에 발레극 ‘한 여름 밤의 꿈’의 ‘토슈즈를 묶는 헤르미아’를 그리자던, 길상사 담장 흐드러진 능소화를 보자던 그 작은 소망들도 빛바래 버렸다.

 중국의 문학가 누쉰(魯迅1881~1936)이 문사였던 취추바이(瞿秋白1899~1935)에게 한 말 “인생에 있어 한 사람의 지기를 얻으면 족하다(人生得一知己足矣)”
 그렇게 선생과의 5년의 이승 동행은 끝났다. 그러나 마음의 달은 언제나 서로를 비추고 있을진저.
이재준 삼가

 이재준
1950년 경기 화성 출생으로 아호는 松由齋(송유재)다. 미술품 수집가이자 클래식음반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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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김영태의 기차역


마종기_시인
 
 

 내 친구 시인 김영태는 몇 해 전 아파트 재건축에 밀려 엉뚱하게 혜화동에서 죽었지만 파랗게 조용하던 마지막 자리에서 한평생이 잠깐이네 하던 시든 목소리는 아직도 내게 머물고 있다. 친구가 살아온 길은 아무래도 눈감고 걸어간 몽상의 나그네. 그 말을 못 믿겠다면 문학이고 시고 무용이고 그림이고 음악이고 연극 안에서 푸푸 허우적대다 익사한 어부다. 두어 개가 더 있구나. 굽 높은 구두와 명주 목도리 헝클어진 머리털 속에는 예술 선동의 종이 그림들, 또 빈 주머니.

 바람 사이의 노래, 이별 사이의 노을, 네가 죽었다면 나도 그 근처고 다 죽은 뒤에는 살아남을 시가 있을까, 그는 끝까지 유럽 지향적이었지만 헤매던 관심이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사방으로 퍼지는 친구의 펜글씨에 나는 무조건 부적격 판정을 내려주고 싶었다. 움직이는 친구의 재능에 발이 찔려 피가 나기 시작했다. 눈치에 약하고 끈질기지 못한 이 빠진 펜에 녹슨 밤이 돌아왔다. 지친 여름은 하염없이 길었다. 결국, 봐라, 나도 그렇겠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지구 위의 조그만 방에 엉거주춤 앉아 친구가 그린 회색 바탕 표지 그림을, 오래된 책을 펼쳐 1968년에 쓴 글을 읽는다. 활판 인쇄의 글자들이 툭툭 튀어나와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스위스였나, 프랑스였나. 파울 클레의 기차역에서 시인은 글을 썼다가 지운다. 글을 그리는 표정으로 피도 없이 걷고 숨도 쉬지 않고 산다. 그가 가고 난 다음 날부터 문헌은 늙기 시작했다. 어색한 햇살을 털고 있는 목쉰 문장 오래된 관절염 때문인지 부기가 보이는 헌 종이가 아프다며 찢어진다.

 180쪽에서 잠시 선다…… 가을이 오면 파울 클레의 역에 가곤 한다. 선로 위로 내리 쬐는 햇볕, 텅 비어 있는 대합실에 망명객처럼 앉는다. 역사 뒤에는 교회당이 서 있고 자연의 풍만한 살점들은 찾아볼 수 없다. 온 신경은 송곳이 되어 탐색하고 약간의 혼합된 색채들이 적막을 잘 감싸주고 있다. 세피아 블루 계통의 석연치 않은 점선은 그나마 역의 분위기…… 그러나 가을이면 다시 클레의 역에 그를 마중하러 나간다. 이슬이 아직 묻어 있는 꽃다발 하나. 짧은 비가를 듣는 것 같다……

 강화도 전등사 뒤 언덕, 영태의 수목장 자리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동행한 후배 몇과 함께 군사훈련 제2 포복 자세로 헝클어진 풀과 함께 무릎 꿇고 절을 한다. 영태가 웃는지 킥킥 소리가 입을 맞춘 땅에서 올라온다. 표정 없는 보라색 이끼꽃 같은 게 가려진 풀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무르팍엔 어느 틈에 풀물, 그래, 네가 용기 있는 예술가였는지도 모르겠다. 비웃음의 눈과도 돈과도 또 가정과도 평생을 피투성이로 맞상대를 했구나. 지친 영태가 서둘러 클레의 기차를 탄다.

* 「김영태의 기차역」, 마종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67  「마흔두 개의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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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춤에 대한 글쓰기
- 시인 金榮泰의 경우


김태원_춤비평가
 


 나는 1985년 10월호의 「공간」지가 마련한 해방 40년과 관련된 여러 예술문화에 관한 주제들 중 춤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평론가와 대담을 가지면서, 무용문화에 대해 별다른 이해나 인식이 없을 그 잡지의 독자들을 위해 '해방 40년, 무용문화사적 측면에서의 중요 사건 개략도를 간략하게 만들어 본 적이 있다.
 그 속에 간단하게나마 지속적으로 전수 공연되고 있는 한국 전통춤의 흐름과 함께, 1920년도 중반에 일본인 이시이 바쿠에 의한 소위 서구식 현대춤의 소개에서부터 최승희, 배구자, 조택원, 문철민, 함귀봉 그리고 박외선, 육완순으로 이어져 와서, 1985년도의 『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의 출간까지를 언급해 보았다.
 그중 『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을 하나의 무용문화적 이벤트로 다루기에는 몇 번의 망설임이 따랐지만, 그의 그 책의 출간은 단순히 그 속의 글들이 진정한 무용평론이냐 아니냐 라는 논란을 떠나서 어떤 상징성을 띠고 있다고 보였기 때문에 하나의 무용문화사적 사건으로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그 책에는 현재 활동 중인 여러 댄서들(발레리나도 포함)에 대한 그의 특유의 유미주의적 인물 스케치, 그리고 통칭해서 ‘문화산책가’식 기사라고 보아도 좋을 각종 춤공연에 대한 소개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그가 그 책의 머릿글에 기록의 의의라고 밝혀놓은 것과 좀 다르게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한 말투로 그 책에 실린 글들이 80년대를 살고 간 한 시인의 외도이며, 그 결과로서 보아주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접한 순간부터 춤을 좋아하고 춤과 관계되어 있는 독자들뿐만 아니라 소위 다른 독자들인 평자들도 어중간한 위치에 놓이게 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해서 그 책을 본격적인 평론의 진지함이나 성실성의 범주에서 내던져버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옹호 또는 변호하여야 할 것인지 사이에서 우리들(독자들)도 방황케 됨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부분에서는 김영태식의 외도에의 유혹은 더 강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일종의 윤리적 영역들ㅡㅡ 즉 무용평론, 기록, 시인의 외도, 그리고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제3의 시선(또는 객관성)--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김영태식에 맞서는 어떤 자기 식의 태도가 요구되는데, 나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갈색 몸매들』을 무용평론집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무용수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적어도 두 가지 분명한 것은, 첫째는 그것의 책이라는 형태로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팽창·변모해가는 춤공연들에 대해 한 개인의 지속적인 관찰(때로는 그 흐름과의 동행)을 꽤 적절한 시기에 나타내어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 그것은 1985년도의 남북 공연예술단의 교류하고는 다른 의미를 갖는 무용계의 사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우리가 그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적어도 춤을 사랑하고, 실제로 한국 무용계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한다면)? 나는 작년 그 책의 출판기념회(6월 29일, 학림 까페)가 있기 전 부산산업대 콘서트홀에서 있은 홍신자의 공연을 보러간 적이 있다. 그녀의 공연 장소가 부산산업대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용가 남정호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명쾌한 얼굴표정과 무용과실로 빼끔 문을 열며 "교수님예“ 하며 찾아오는 학생들이 없었더라면 분명 어느 한산한 이류 영화개봉관의 극장사실을 연상시켜주기 알맞은 그곳에서 내가 그녀로부터 받아본 것은 자신의 공연 포스터며 프로그램들이었다. 미국에 그렇게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도 상대가 처음 대면하는 여성인지라 자연히 나는 말을 띄엄띄엄하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초반부터 이내 당황하게 되는 것은 나였다.
 무용과 학생들을 다루는 꽤 익숙한 솜씨로 연출에 관계하였던 내가 무용에 대해 정도 이상의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이 여간 자신에게는 대견스럽지 않아 보인다고 말을 떼는 바람에, 당황감과 함께(특히 한국인 남성에게 강한) 일종의 남성적 자존심 중 어떤 한 귀퉁이가 상처 입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침 나의 곁에 홍신자씨의 남편인 화가 이상만이 있어서 마음 든든했지만, 그녀의 또렷또렷 하고 그 용모나 자태의 선보다 좀 굵은 목소리의 정확성을 나로서는 어떻게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신이란 마주보고 있는 그와 약간 비스듬한 각도를 두고 앉아 그녀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듯하며 문제되는 부분에서는 그 모든 것을 이상남의 이상스런 지적(知的) 우겨댐에 다 맡겨놓는 것이다. 말의 오고 감, 화자(話者)들 사이에 내재된 심리적 상충, 논법의 흐름의 기류의 판단 등등에 있어 이상남은 나보다 몇 수가 위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이상의 방어벽이 없는 듯 여겨졌다.
 따라서 남정호의 또렷한 시선과 또렷한 화법 앞에서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비스듬한 침묵(silence)을 보이는 일이었다. 또는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식을 빌면, 내 행동을 스스로 제어시키고(action restricted) 미학적 태도를 취하는 일이었다. 이때, 나의 시선 아래 든 것은 남정호가 건네준 프로그램 속에 인용되어 있는 김영태의 글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 글이 꽤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남정호의 당당함에 짓눌린 나의 침묵과 그 글의 침묵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조우하였다고 생각한다. 남정호와 이상남의 대화 아래 나는 그녀의 『안녕하세요』『四人舞』『비밀의 뜰』의 공연평이 실린 그 프로그램을 한 번은 건성건성, 또 한 번은 꽤 찬찬히 읽어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실려져 있는 글 중 일부를 읽어보기로 하자.

 동작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움직임에 의한 무언의 구성 때문이다. 움직임의 문법은 목적을 향해 줄달음치는 경우도 있고 목표지점을 방기할 때의 허심탄회함이 뜻밖의 아름다움을 야기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일상사가 춤이 되어 네모반듯한 공간에서 숨을 쉰다. 평범하게 숨을 쉬는 것 같지마는 동작의 변이에 의해 숨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남정호의『안녕하세요』는 마치 우리가 우아해지기 위해 나타난 듯한 착각을 일깨운다......
 『안녕하세요』에서의 이른바 움직임의 문법은 들떨어진 것도 아니고 야무진 편도 아니다. 남정호가 객석 앞에서 숨을 쉰다. 하루일과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허리에 손을 갖다 대기도 하고 어깨를 몇 번 간헐적으로 추슬거리기도 하며, 구부렸다 튕기듯 의자 위로 올라서기도 하고 주위를 거닐다가, 호흡이 가빠지다가, 마음을 식히고 달래든가 조명을 죽이고 의자 밑으로 숨거나 파고들기도 한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아함에 대해 너무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도 든다. 요즘 세태에 비유되는 복권이란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남정호의 춤이 마치 시범을 보여주듯.


 사실 이 글은 「춤」지 1982년의 6월호에 실려 있는 것이고 『갈색 몸매들』 속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이 유독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것이 남정호의 공연에 대한 묘사이면서 이상스럽게 자신의 예술적 그리고 삶적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줄여 얘기하면, '우아함을 잃고 싶지 않은 방기(또는 허심탄회)‘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부분에서 복권(復權)이라고 표현해 놓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남정호의 춤이 너무 당돌하게 보여서일까?) 앞서 인용한 글 중, 특히 네 번째 부분은 남정호의 춤에 대해 아주 훌륭한 묘사를 보여준다.
 곧 소극장(공간 소극장)의 공간 내에서 춤을 보는 자와 추는 자의 가까움이 이같이 묘사되기도 힘들다. 추는 자뿐만 아니라 보는 자도 마치 온실 속의 식물들처럼 그 호흡만으로 얘기하고 춤추고 있는 듯 보여진다. 방기된 듯한 '펜의 자유스러움이 춤의 자유스러움과 구부렸다 퉁기듯 부딪치고 스스로의 영역 속으로 후퇴할 줄 안다. 또 즉물적이고 세세한 묘사보다는 대체적인 묘사에 그친다.
 그러한 방기된 듯한 시적 표현의 자유스러움이 『갈색 몸매들』 속의 글 중 여러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극장무용인 발레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는 “발레는 무대 위에 무슨 빛깔이든 남겨야 한다. 푸른색도 좋고, 분홍빛깔도 좋고, 하여튼 무슨 빛깔을 남길 수만 있다면”이라고 얘기한다. 즉 그에게는 발레의 세계란 우선 빛깔의 세계로 나타나 보인다. 주관적인 표현이지만 아름다운 감식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확하다. 왜냐하면 발레는 무엇보다 춤의 시각적 요소에 호소하는 것이고 또 그 것에 대한 것은 어떤 춤 미학을 옹호하고 나서는 논객에게서는 ‘인간 다리(脚)의 문학’(André Levinson)으로도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적 아포리즘을 동반하는 것으로 가령 춤과 시와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그는, “시와 무용은 그렇게 떨어져 있는 낯선 얼굴들은 아니다. 시의 표정(그것이 어떤 진지한 표정이라면)과 무용의 곡선은 그래서 같이 소리 낼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소리는 양자가 서로 끌어안을 수 있는 화음이다.” 라고 얘기한다.
 또 예술 일반에 대해 "모든 예술이 도달하는 개화의 정점은 간소화이다......사실주의에서 입체파로, 입체파에서 표현주의로 이어지다가 다시 추상주의로 그림의 예도가 끊임없이 변질되었을 때 우리는 사실주의와 추상주의의 간격에서도 그런 간소화된 대상의 형태와 질감을 쉽게 목격했었다.”라고 말한다. 그중 특히 시와 무용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인상적인데, 그것을 도식화시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전문적인 무용비평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김영태와 같이 시인이면서, 보들레르나 고띠에(현대무용비평의 개진은 모두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를 때로는 능가한다고 평가되는 근래에 작고한 미국 무용평론가 에드윈 덴비(Edwin Derby)의 자주 거론되는 발란쉰 안무의 『콘체르토 바로코』(Concerto Barocco)에 대한 묘사 부분을 옮겨보면, “그 고혹적인 아다지오 무브먼트에서 우리의 눈과 귀는 매우 놀랍게 난다. 가령 그 절정 부분에서 마치 광풍이 일기 전 바람 속에 선 나무의 표정인 듯한 코러스를 배경으로 발레리나는 그녀의 사지를 강하게 공중으로 뻗은 채, 그녀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들려져 반복적으로 좁은 반원형을 그리며 높이 추켜올려진다. 그리고 그 가장 고조된 부분에서 그녀는 천천히 내려진다. 이때 관객들은 그녀의 발과 다리가 아래쪽으로 가파르게 뻗어 있는 체 그리하여 그녀의 발가락이 무대에 닿아 어떤 한 특정한 지점에 그녀의 몸무게를 다 실어 정지할 때까지 천천히 그녀의 몸이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순간의 감동은 용의주도하고 단호하게 하나의 상처를 헤집는 것과 같으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음악적 강조와 이상스럽게 맞아 떨어진다"이다.
 물론 필자의 이 번역은 에드윈 덴비의 글을 영어 문장으로 읽어볼 때와 큰 괴리감을 피할 수 없겠지만, 덴비의 매우 날카롭고 일견 즉물적인 묘사력은 충분히 엿볼 수 있으리라 싶다.
 여기서 덴비의 글이 김영태의 것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고도로 훈련되어 있는 발란쉰의 발레리나의 춤의 움직임을 보고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고 펜으로 정확하게 '따라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시인 특유의 비유법적 문장력을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바람 속에 선 나무의 표정이라든지 눈과 귀의 만남", "상처 속을 헤집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관적 표현이 가미된 객관적 묘사력은 덴비의 글을 형식적이면서도 시적이게 보이게 한다.
 여기에 비하면, 김영태의 묘사력은 앞서 언급한 대로 개괄적이며 인상적이다. 또 사물의 표면을 덴비처럼 즉물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그의 표현대로 방기하듯, 그려나간다. 때로는 그 방기(放棄)가 즉흥이나 일종의 묘사의 ‘자동성’을 띨 때도 있다. 그것들의 어우러짐이 그의 글의 어떤 막을 자아낼 때도 있지만, 종종 불성실한 '흘려버림'으로 끝날 경우가 더 많다 특히 후자의 경우 자주 동어 반복이나 열거와 같은 자동성이 개입된다.
 가령 박명숙의 현대춤을 얘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몇 개의 정적』의 주제는 그 무너짐에 있다. 박명숙은 예리하게 그리고 무너지는 과정의 섞임조차 정적으로 몰고 갔다. 여러 사람의 섞임, 드레스가 형체만 남고, 거기서 빠져나온 눈송이 같은 지체들의 섞임의 미학을 박명숙은 강조하고 있다.

 『잠자며 걷는 사람, 잠자며 걷는 나무』를 보았을 때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주었다. 아름답고 싱거운 삶의 표정들, 변화하는 색감들, 뜨겁고 차갑게 드러나는 우리 마음의 풍선들......

 특히 이 글의 중간 부분에서 그가 무엇인가 강조하며 얘기하고 있는 듯한데, 그것이 어떻게 춤에서 보여지는지 정확하게 드러나 있고 비슷한 식의 비유가 계속된다. 또 그런 반복이나 흘려버림이 앞서 인용한 남정호의 춤을 얘기하면서 개인적 넋두림으로 빠질 때도 있고(그 글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는 것도 여러 종류인데 거품처럼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가시나무처럼 접근을 막을 듯 휘어지는 경우도 있겠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소도구라는 의자 하나로 그 주위가 넓기도 하고......"), 미학적 어투와 강하게 뒤섞일 때도 있다(가령 안무작품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기도』가 정신의 표백제라면 『교감』은 뜨거운 분신의 마찰 같은 것이다. 물론 분신으로서의 확인은 여러 개의 불똥을 거느린다. 일상의 권태, 저기압, 혹은 타오름을 냉각시키는 통풍도 마련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들이 어떻게, 또 얼마만큼 춤의 동작이나 안무의 세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일까? 또 어디까지 시인적 외도(또는 김영태적 방기)가 춤에 대한 글 속에서 허용될 수 있겠는가? 물론 에드윈 덴비적 객관성이 강한 묘사의 형식성과 김영태적 스케치풍이나 즉흥이 그 기법의 우열을 떠나 깊게는 엄청난 문화적 감각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태의 『갈색 몸매들』은 소위 우리들의 진지하거나 성실한 영혼들에 의해 너무나 깊게 다른 식으로 방기되어 온 부분에 대해, 즉 '춤, 또는 '춤의 예술에 대해-너무나 많은 것을 일차적 자료로 자료로서 확보해 놓고 있다. 그것은 그의 책이 주로 70년대와 80년대 전반까지의 소무용문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시기를 거의 혼자서 메꾸다시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비록 그 책의 많은 부분이 그의 사적 어투나 논법으로 방기되듯 언급되고 있지만, 몇 부분들은 많이 정리된 생각들을 모은 것도 있어 보인다. 나는 후자의 예들로, 그가 1975년에 쓴 여사의 현대무용에 대한 글, 덧붙여 커닝험, 케이지, 피나 바우쉬, 그리고 특히 쾰른 무용단의 라인 할트 호프만의 안무에 대한 글을 들을 수가 있다.
 해방 전 소설가 김동인이나 시인 김동환 등의 문인에 의해 옹호되거나 비호되었던 춤의 세계가 6-25의 동족상쟁을 거치면서 낯부끄럽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오해받으며, 다시 60년대부터 시인 김영태에 의해 문인의 외도적 무용론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평론가 조동화가 밝힌 대로,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김영태가 기여한 무용문화의 대중으로의 접근에 기여한 것에 대해서 나도 공감치 않을 수 없지만, 문제는 다음 세대에 의해 어떻게 시인 김영태가 보여준 그 방기된 영혼의 자유감을 "방심할 수만은 없는, 자유감“으로 바꾸는 데 있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 좀 더 성실히 춤을 관찰하고 춤의 문화에 대해서 논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부분 춤에 대한 좀 더 겸손한 접근과 사랑을 전제로 하여야 하는데, 김영태의 글을 읽고 평가하는 경우도 그런 시선 내에서 보아져야 하리라.
 즉 우리들 삶에는 약간의 무지함이 필요하듯이 춤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서도 비엄격성의 문제는 질타만 할 수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춤은 김영태가 『갈색 몸매들』 속의 어느 부분에선가 인용해 놓은 한 시구처럼'-그것이 편리한 발상만은 아니라면--흠집이 없을 수 없는 인간 영혼이나 육체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예술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 김영태를 기쁘게도 하고 또 괴롭히는 것이 춤 속에 있다. 그것은 춤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은 홀연히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 사라지는 신인들에 대한 것이며, 때로는 전혀 눈에 띄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성장한 듯이 나타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들을 위해 그는 배혜령에 대한 인물 스케치 속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얘기한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제일 기쁠 때가 뜻하지 않게 신인을 만났을 때이다. 내 나이는 이제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질 나이가 되었지만, 신인들의 출현은 반대로 언덕 위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다. 그런데 무용의 예를 들자면, 그 신인이 2, 3년 지나 이미지가 퇴색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까운 재질이 생활 속에 묻혀버린다 ....... 얼마 전에「대한민국 무용제」와 그 밖의 공연을 보고, 나는 신인들의 신진대사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배혜령, 문영철, 박경숙, 이순표 같은 신인들을 발견한 기쁨보다 자취를 감추었거나 무대에 선 유망주들이 빛을 내지 못했을 때의 실망이 더 컸다.
 언덕으로 굴러 떨어질 나는 그런 나이에 와 있지만, 내게도 생활신조가 하나 있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가 그것이다....... 나는 25년간 시에 매달려 있어도 아직까지 신인이다. 나는 언제나 신인의 자리에서 가능성을 향해 뛰고 있다.
 다시 무대에 복귀한 어린 별들에게, 그리고 지금 반짝이고 있는 신인들에게 나는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그가 안타까워하듯이 신인이 사라져버리는 현상은 유독 무용의 세계에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연극의 세계에서나 영화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독 왜 춤의 세계에 신인의 사라짐이 더 안타까움을 동반하는 것일까? 그것이 왜 남정호의 춤을 보면서 그가 애매한 표현으로 복권을 얘기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인이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것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러하길 바란다. 또 그것을 보고, 희구하는 것이 생활의 질서 속에 묻히지 않으려는 인간적 복권의 큰 원망 같아 보인다.
 그와는 좀 다르게 나도 오랫동안 방기 해 왔던 릴케의 시집을 우연히 펼쳐보며, 그 속에 유난히도 춤의 이미지가 많이 섞여있는 것에 놀랐다. 『두이노의 비가』는 물론이고 『올페의 노래』 첫줄부터 그러하다. 릴케가 시 속에서 읊은 생명과 정신의 도약은 김영태가 무대 위에 반짝이고 있는 신인(또는 지는 장미)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이나 그가 사라졌을 때에 본 실망과도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Da Stieg ein Baum, O reine ubersteigung
 (한 그루 나무가 솟아올랐다. 오 순수한 상승이여!)-릴케의 『올페의 노래 1』
 (1986, 2)

* 〈김태원 춤문화론〉(1991년 현대미학사 발간 수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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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_ 金塋泰 선생의 永眠에 붙여

장르 넘나들며 ‘자유’ 만끽했던 현장 예술가


장광열_춤비평가
 
 

 7월 13일 밤 삼성병원 영안실. 시간이 지날수록 추도식장은 눈물로 넘쳐났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지인들은 바람처럼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선생이 풍미했던 예술계와 예술가들, 그리고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회상했다. 선생이 1999년 현대무용가 이정희의 공연에 출연, 춤과 연기로 무대를 주름잡던 영상을 볼 때는 그가 얼마나 멋쟁이였고, 앞으로 그의 빈자리가 얼마나 클 것인지를 가늠하게 했다.

 김영태 선생님의 영면 소식은 이른 아침 내게 전해졌다. 운명한지 3시간 쯤 지난 뒤였다. 전전날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의 병상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여러 차례 무언가를 말했으나 불행히도 나는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지 선생의 동공은 점점 초점을 잃어갔고, 눈언저리는 더욱 촉촉해져 갔다.
 선생은 2007년 7월 12일 오전 3시 50분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4남 4녀의 장남. 유족으로는 부인인 정복생과 아들 목우, 이우가 있다. 경복고교,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1959년 「사상계」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월간 〈춤〉 〈공간〉 〈객석〉 등에 무용평을 발표, 무용평론가로 활동했으며, 1971년 이후 7차례의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1966년 자유극장 동인, 1976년 음악펜클럽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매혹〉〈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 17권의 시집과 〈갈색 몸매들, 아름다운 우산들〉〈막간〉 등 13권의 무용평론집, 〈춤으로 풍경을 만든다면〉〈징검다리〉등 12권의 산문집, 〈片道나무들〉 〈인간의 집〉 등 10권의 소묘집을 비롯해 무용자료집, 음악평론집, 서체집, 사진집 등 모두 60권의 저서를 남겼다. 현대문학상, 시인협회상,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 허행초상, 현대무용진흥회 댄스 하트 어워드상을 수상했다.
 앞서 언급한 추도식은 7월 13일 한국춤평론가회(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전신)와 한국시인협회 주최로 삼성병원에서 열렸다.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함께 자리해 생전 고인의 시낭송 모습과 공연에 출연, 무용가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을 달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선생의 유해는 7월 14일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 후 강화도 전등사에서 수목장으로 안장됐다. 한줌 재 되어 나무 밑에 묻히는 그날 전등사에서는, 선생을 위한 영결식이 치러졌다. 추모곡과 천도를 위한 살풀이춤, 조곡 등이 고인의 가는 길을 인도했다.
 선생은 2005년 12월 전립선암 판명 이후 병원과 집을 오가며 1년 7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해 왔다. 투병 기간 내내 고인은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앞으로 3년은 더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는 더욱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런 의지의 반영인지 투병 기간 동안 서체집과 평론집이 새로 발간됐고, 좌담, 월간지에 새로운 연재도 시작했다. 영면 며칠 전에 발행된 월간 〈객석〉 7월호 “김영태의 사에라” 코너에도 어김없이 고인의 글이 실려 있었다.
 선생을 아끼는 지인들은 그를 위한 공연과 그의 소장품들을 모아 바자회를 갖는 등 선생의 쾌유를 빌고 온정을 전하기도 했다.
 시인, 무용평론가, 화가. 고인의 이름 앞에는 늘 몇 가지가 함께 따라 다녔다. 선생은 무용, 연극, 음악, 문학, 미술 등 여러 예술 부문을 아우르는, 늘 현장에서 창조자들과 함께 숨 쉰, 전방위 예술가, 현장 예술가였다.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은 늘 선생의 독차지였다. 무용가들은 의례 그 자리는 선생을 위해 비워두었다.
 한 사람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고인의 그 많은 재주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때론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생의 무용평론은 세밀한 묘사와 아름다운 문체로 인상비평에 대한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선생의 시는 에릭 사티의 단순미와 정신세계를 사숙한, 여백의 미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자료와 작품을 통해 예술계와 소통
 
 선생의 아호는 초개(草芥). 지푸라기.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늘 어슬렁거리는
 조끼입은 기인


 〈빈자리〉라는 시에서 선생은 자신을 奇人에 비유했다.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하나 저 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또 〈누군가 다녀갔듯이〉에서는 자신을 선비에 비유했다.

 奇人과 선비란 시어 그 너머에는 애써 특별함을 쫓는 세속적인 지식인에 대한 은근한 질타가 담겨져 있다. 어눌한 말투에, 벙거지 모자 눌러쓰고, 늘 단장을 옆에 끼고 다니던 선생은 한 없이 자유로운 것 같았지만, 냉혹한 현실 비판과 저항의식으로 언뜻언뜻 주위를 놀라게 했고, 선생의 그런 숨겨진 내면에 익숙해졌을 땐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의 삶 자체가 무척이나 까탈스러운 기인의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무용계에서 선생은 춤의 전도사였다. 무용가들의 추상적인 몸짓은 선생의 그림으로, 시어로, 때론 산문집에, 서체집에, 그리고 평론집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다시 꽃피워졌다. 선생은 춤을 더 춤답게 만들어 대중들 속으로 훨훨 날려 보냈다. 피아노 그림에 춤을 담았고, 주옥같은 시어로 춤을 묘사했다. 무용가들의 공연 팸플릿은 선생의 독특한 서체로 인해 빛났고, 그가 쓴 무용 대본은 춤추는 뮤즈들에 의해 무대를 수놓았다. “툇마루” “춤타래” 등 그가 손수 지어준 단체 이름은 한국무용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고인은 자신이 평생 모은 대부분의 자료를 지난해 아르코 예술자료관에 기증했다. 국내외 공연장을 오가며 꼼꼼하게 남긴 기록들은 훗날 무용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춤저널〉 (2007년) 수록 
2017.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