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유빈댄스 〈기억 흔적〉
몸을 통한 진지한 사유, 경계해야할 자가복제
방희망_춤비평가

 안무가 이나현의 유빈댄스는 2014년 신작으로 <기억흔적>(Engram)을 무대에 올렸다.(10월 25-26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이 작품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 무용분야 선정작으로, 이나현의 작업에 신혜진이 조안무로 참여하고, 김윤아, 김수진, 박성현, 최희재, 강요섭, 전건우, 하권재 등의 댄서들이 출연했다.
 이나현은 그간 감정을 배제하고 몸 자체의 확장 가능성을 최대한 타진하는 건조한 색채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번 <기억흔적>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경험을 저장했다가 반복, 재생하는 익숙한 ‘기억흔적’을 벗어났을 때 몸이 보여줄 수 있는 낯선 감각,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막이 열리자, 관객들이 낮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꼬마전구들의 불빛이 꽃밭처럼 깔려 있다. 가운데 원 안에 뒤엉킨 네 명의 육체는 차츰 분리를 시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데 세포가 분열할 때 염색체들이 나란히 배열되는 모양을 연상케 한다. 이번 달 한팩 솔로이스트 프로그램에 참가한 최문석의 〈Going below〉도 기억상실을 주제로 하면서 전류가 흐르고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으로써 ‘인식’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세포 내 자극의 전달이 전기(電氣) 반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두 작품에서 모두 ‘전구’를 소품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꼬마전구 다발을 모두 바깥으로 끄집어 낸 뒤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진 춤은 인체가 움직이기에 익숙한 방향을 거스르는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상반신은 뒤로 돌아보며 회전하는데 하반신은 고정되어 있다. 뒤늦게 따라간다던지, 발레의 턴 아웃을 넘어서서 무릎 관절까지 바깥으로 꺾어 신체의 전면을 오픈시키는 등 특히 고관절에 무리가 갈 법한 극한의 동작들이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
 일단 무대에 오르는 모든 움직임이 철저히 의도된 것이라 한다 해도, 이나현은 그 중에서도 일부러 자연스러움을 역행하는 쪽만 골라서 집중한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춤을 연마하면서 각성(覺性)을 추구하는 고집스러운 구도자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군무에서는 좌우로 이동하다가 서로 순서를 바꾸어 서는 장면들을 통해 신경세포 말단의 변화, 뒤죽박죽된 기억의 재배치를 스케치하려고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니멀한 무조음이 단조롭게 반복되면서 자연스러움을 비트는 안무와 합쳐진 후반부의 상당 시간은 관람하는 입장에서도 두통을 유발할 만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고, 마지막 2인무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흘려 넣어준 부드러운 음악에 비로소 숨이 트일 정도로 안무가가 안내한 여정은 녹록치 않았다.




 이나현의 꾸준한 작업을 통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더라도 몸을 통한 사유, 진지한 탐구를 포기하지 않는 근성 있는 안무가와 무용수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선호하는 표현 방식이 제한된 탓에, 미리 정해진 양식에 따라 소재나 주제를 세팅하면서 자가복제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석가모니가 6년간의 고행 수도 끝에 마을에 내려와 처녀로부터 우유를 받아 마시고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던가. 분방한 쾌락주의도 경계해야겠지만 엄격한 금욕주의 역시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예술에서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제 조금은 말랑말랑한 감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14.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