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승무의 미래와 승무의 과거
승무를 다시 본다
김영희_우리춤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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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금의 <승무>는 형식만 남았다. 장삼 자락을 날리며 정성스럽게 춤사위가 이어지고, 기다란 장삼소매가 허공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북놀이의 다채로운 북가락에 관객들이 집중하지만, 춤꾼의 몸짓과 표정에서 승무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북치는 대목에서 박수가 나오긴 해도, 북가락을 잘 쳐서인지, 관객의 감동을 끌어냈기 때문인지도 자신할 수 없다. 승무는 한국 전통춤 중에서 정수 중의 정수이고, 가장 한국적인 춤이라지만, 승무의 감상포인트는 무엇인가. 승무가 중(僧)의 춤이라 하고, 불교적 고뇌를 표현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승무가 관객에게 주는 영감(靈感)은 무엇이란 말인가. 현행 승무는 현란한 형식만 남았다.
 그렇다면 승무의 의미, 승무가 갖고 있는 내용, 이야기, 배경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승무가 민간에서 추어진 춤이었기 때문인지, 승무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고 성경린 선생이 정리한 <승무>의 유래설이 있다. 크게는 불교의식무용으로서의 유래설과 민속무용으로서의 유래설로 나뉘는데, 이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민속무용으로서 승무의 유래설은 다섯 가지이다. 첫번째는 지족선사(知足禪寺)를 파계시킨 기생 황진이(16세기 말~17세기 초)의 무용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둘째는 상좌중이 스승이 나간 틈을 타서 평상시 스승이 하는 기거(起居) 범절(凡節)과 독경설법(讀經說法)의 모습을 흉내내는 동작에서 유래하였다는 설(童子舞說). 셋째는 소설 『구운몽』(1687)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 성진(性眞)이 길을 가던 중 8선녀가 노니는 광경을 보고 인간으로서의 괴로운 연정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불법에 귀의함으로써 법열(法悅)을 느낄 수 있었다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하였다는 설(性眞舞說). 넷째는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고 북을 두드리며 추기 시작한 춤이 승무의 기원이라는 설. 다섯째는 가면극에 나오는 한 장면인 노장춤이 승무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1)
 이상의 승무 유래설들을 성경린 선생이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정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유래설들이 승무를 천착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성경린 선생이 1930년대 이왕직 아악부원 시절부터 1960, 70년대까지 위와 같은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승무들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 다섯 가지 유래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승려가 관련되어 있으며, 등장인물이 승려이지만, 승려 혹은 주변 인물의 인간적 면모 때문에 발생하는 번뇌, 갈등, 희롱 등이 승무 전개의 내적 동기(動機)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래설들이 현행 승무를 통해서는 별로 비쳐지거나 상상되지 않는다. 그래서 승무의 유래설에서 볼 수 있는 승무의 모습들을 찾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1950, 60년대와 일제강점기 승무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현행 승무와 그로부터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추어진 승무들을 살펴보면, 우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승무가 있다. 한영숙류와 이매방류가 있는데, 한영숙류 승무는 1967년에 지정되었고, 한성준(1874~1941)으로부터 비롯된 승무이다. 한성준이 손녀 한영숙(1920~1990)에게 이어주었고, 한영숙이 1970, 80년대에 크게 보급하였다. 그리고 이매방류 승무는 1987년에 지정되었는데, 목포에서 활동한 스승 이대조(? ~ ?)로부터 전승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승무이다. 춤사위와 북놀음에서 다채로운 짜임으로 추어지고 있는데, 이매방 선생의 승무는 스스로 변천과정을 갖고 있다. 한영숙류와 이매방류 승무는 공히 엎드려 시작하고, 염불, 타령, 굿거리, 당악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북놀음이 있다. 또한 두 승무가 장삼을 끝까지 벗지 않고 진행되는 점이 동일하다.
 그런데 한성준의 승무에서 ‘바라무’가 추어진 적이 있다. 그가 설립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7년부터 1941년까지의 공연에서 승무가 주로 추어졌지만, 1940년의 공연에서는 한영숙이 <바라무>로 추었다. 바라무는 장삼춤에 이어 북놀음 대신 바라를 들고 추는 춤이다. 북놀음을 위해 세워둔 북 한가운데에 태극 문양이 있어 일제가 이를 문제시하자, 북놀음 대신 바라를 들고 추었다고 한다. 당시 춤계의 흐름에서 승무 구성의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이 바라무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주요 멤버였던 장홍심(張弘心, 1914~1994)에 의해 1984년의 ‘명무전’에서 <바라승무>로 추어졌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승무 외에도 여러 승무가 있다. 충남 서산 중심으로 활동한 심화영류 승무는 충남 무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된 춤으로, 고 심화영(1913~2009)의 외손녀 이애리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넓은 가사를 두룬 점이 특이하고, 춤의 전개에 있어서 좌우대칭이 분명하고 춤사위와 동선이 복잡하지 않다. 또 경기도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된 김복련의 승무, 대구의 권명화가 추는 박지홍류 승무, 도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였던 김숙자류 승무도 있다. 또한 남원에서 활동했던 조갑녀(1924~ )의 승무가 근래 복원되었는데, 양 쪽 어깨에 붉은 색 띠와 초록 색 띠를 하나씩 매고 춘다. 이 승무들은 자기 지역을 기반으로 하며, 한영숙류나 이매방류와는 다른 스타일과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재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순서의 <승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순서의 승무는 강태홍류 승무로, 강태홍(姜太弘, 1893~1957)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다. 강태홍은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부산에서 활동했고, 한순서가 피난지 부산에서 그에게 승무를 배워 그대로 추고 있다. 한순서, 즉 강태홍의 승무는 장삼을 입고 춤추다가 북 치는 대목에서 장삼과 고깔을 벗고 북을 치며 번뇌를 토한 후, 북을 다 치고 나면 장삼을 집어들어 어르다가 어깨에 매고 퇴장한다. 그래서 강태홍류 <승무>는 한영숙류나 이매방류가 무대 중앙에서 합장으로 끝내는 방식과 다르며, 드라마틱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염불장단과 타령장단에서 수도자의 면모보다는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데, 한순서의 다양하고 솔직한 감정 표현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북 치는 대목에서 북가락은 매우 다양하게 구사되었다. 성경린의 승무 유래설 중에서 네번째인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고 북을 두드리며 추기 시작했다는 설이 떠오른다.

 

 


 더욱 다채로운 구성의 승무도 있다. 해서지방 악가무에 모두 능통했던 고 양소운(梁蘇云, 1924~2008)이 춘 승무의 제목은 <성인인상무(成仁人常舞)>이다. 해주권번에서 장양선 선생에게 이 승무를 배웠다고 하는데, 양소운 추모공연에서 그의 아들 차부회(중요무형문화재 61호 은율탈춤 보유자)와 박일흥(중요무형문화재 61호 은율탈춤 보유자)이 추었었다. <성인인상무>는 장삼춤과 북놀음, 허튼춤, 독경(회심곡)과 바라춤이 이어진 독특한 구성의 춤이다. 먼저 장삼에 고깔을 쓴 춤꾼이 염불장단에 맞춰 엎드려서 춤을 시작한다. 장삼춤이 전개되다가 북 치는 대목을 마치면, 장삼을 벗어던지고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허튼춤을 추다가, 불의(佛意)를 깨달은 듯 퇴장한다. 그리고 정갈한 모습으로 꽹가리를 들고 다시 무대에 나와 회심곡으로 판을 정리하고 바라춤을 춘다. 바라춤이 끝나면 그 사이에 무대 뒤에 가지런하게 포개놓은 장삼과 가사를 받아 양 손에 경건하게 받쳐들고 무대 중앙에 나와 깊게 인사하고 춤을 맺는다.
 중간에 승복을 벗은 채 허튼춤을 추는 대목은 마치 파계하고 범인들과 더불어 신명을 다해 춤추는 것을 보여주며, 회심곡과 바라춤을 보인 후 무대에서 다시 승복을 입고 합장하는 과정은 다시 불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 춤의 작품설명에서도 ‘성인인상(成仁人常)이란 참 도의 근본은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행하는 도에 있음을 뜻한다. 도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수련을 하던 스님이 사람들의 흥에 이끌려 같이 어울리며 법의(法衣)까지 벗는 오류를 범하지만, 그 안에서 참도를 깨닫고 다시 돌아와 도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내용의 춤이다.’라 했다. 스님이 수도 중에 번뇌하고 타락했다가 다시 불교에 회귀한다는 승무의 유래설과 일맥상통하며,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킨 승무이다.
 그리고 <성인인상무>는 요즘 가장 많이 추어지는 한영숙류, 이매방류 승무와 비교해보았을 때, 여러모로 다른 양상이다. 장삼놀음의 동작은 크게 기교적이지 않았고, 북놀음도 길지 않다. 의상에서 장삼 위에 넓은 가사를 왼쪽 어깨에 두르고, 그 위에 오른쪽 어깨에다 붉은 띠를 또 걸쳤다는 점이 특이하다. 종아리에 행전도 찼다. 해서지방 탈춤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행전을 차고 춤춘다는 점에서, 또 해서지방에서 불리어진 회심곡을 승무 중간에 부른다는 점에서 양소운의 <성인인상무>는 해서지방 악무의 특색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이매방 선생도 1980년대까지 행전을 차고 승무를 추었다.) 또 양소운의 승무는 인간적 번뇌와 환희, 또한 참회가 다른 승무와 비교했을 때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승려가 파계를 했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과 전개과정이 분명히 그려지는 승무인 것이다.
 이외에 1980년대 명무전에서 구히서에 의해 소개된 승무들이 있다. 마산에서 활동한 김애정(金愛情, 1923~1993)의 승무, 평양과 서울에서 활동한 김정연(金正淵, 1913~1987)의 승무가 있고, 담양에서 활동한 조모안(曺模安, 1909~?)의 승무는 사방에 대고 한 번씩 합장하는 동작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광주에서 활동한 한진옥(韓鎭玉, 1911~1991)의 승무도 소개되었다. 한진옥이 스승 이창조에게 배운 춤 중에 <줄승무>는 줄타기를 하면서 줄 위에서 추는 승무이고, <황진무>는 개성 기생 황진이가 만덕을 유혹하는 춤으로 그 역시 승무의 한 유형이라고 했다.2) 이러한 승무들과 더불어 앞에서 설명한 강태홍류 <승무>나 양소운의 <성인인상무>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승무의 다양한 구성들을 확인할 수 있다. 승무의 상상력과 폭은 더욱 넓어지고, 성경린이 정리한 승무의 유래설들은 실제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편 신무용가 조택원의 <가사호접>을 통해서도 20세기 초 승무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 조택원의 <가사호접>은 1933년 초연 때 <승무의 인상>이란 제목으로 초연된바, 당시 추어지던 승무에 대한 인상을 춤춘 것이다. 그 인상 속에는 인간의 고뇌하는 모습이 더욱 선명하다. 이 춤에 북놀음은 없지만, 장삼을 벗어서 크게 뿌리며 바닥에 던졌다가, 후반부에서 다시 집어들어 받들며 고뇌하기 때문이다. 이 춤이 당시 추어지던 승무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랐을 수도 있고, 혹은 승무의 유래설 속에 포함된 승려의 이야기들을 모티브로 삼아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가사호접>을 통해 조택원이 보았던 일제강점기 후반 승무의 한 면을 가늠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승무에 관한 자료가 있다.3) 그것은 평양기생이 승무의 복색을 갖추고 찍은 사진인데, 속이 비치는 흑장삼을 입었다. 장삼의 모양이 현행 승무의 의상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르다. 장삼의 품이 넓고, 소매의 길이는 짧고, 소매의 폭은 넓다. 장삼의 깃과 동정도 매우 넓다. 평양과 인접한 황해도 지역 탈춤에 등장하는 중의 의상과 유사하다. 즉 일제강점기 승무의 의상은 지역의 특색을 반영했을 것이며, 춤 또한 달랐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승무의 의상에서 현행과 같이 긴 소매로 변하는 변천과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20세기 초반에 추어진 여러 승무의 다양한 정황들은 <승무>의 모습이 단일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즉 현재로부터 시대를 거슬러 20세기 초반으로 갈수록 전국에서 추어진 승무들은 그 설정이나 전개과정, 춤사위에서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사방재배로 춤을 시작하거나, 춤 중간에 장삼을 벗기도 하고, 북놀음 대신 바라춤이 들어가기도 하고, 붉은 가사와 띠를 겹치거나 양쪽 어깨에 걸치기도 하고, 회심곡을 부르기도 하였다. 즉 <승무>에 의식(儀式)적 요소가 들어가 있거나, 한 인물의 스토리가 반영되어 있거나, 춤 외의 예술형식이 첨가되어, 승무 구성에 있어서 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가능했던 이유는 승무의 배경이 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황진이를 만났던 지족선사에 대한 일화로부터, 조선시대 내내 승려들의 수도과정에서 발생한 일화들이 쌓이고 쌓여 승무라는 춤의 다양한 배경과 모티브를 제공했을 것이다. 다섯 가지나 되는 승무의 유래설은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린의 승무 유래설은 막연한 설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추어졌으며, 승무가 20세기를 거치며 정형화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또한 1980년대 초반에 전국의 전통춤꾼들을 조사했던4) 구히서는 여러 승무들을 보고 들으며 ‘이런 각종 형태의 승무들은 대개가 기방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쳤고, 연희되어 온 승무의 여러 갈래의 형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5) 고 했다. 다시말해 구히서는 20세기 초중반의 승무를 한 가지로 유형화하지 않았으며, 승려의 파계와 번뇌, 불의(佛意)에 대한 갈등을 담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정황들을 확인했던 것이다.



3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전 승무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승무>에 관한 기록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보려한다. 일제강점기 내내 기생조합과 권번 기생들의 승무 공연은 계속되었었다. 1927년 7월 10일부터 20일까지 광무대의 특별흥행에서 승무가 추어졌고,6) 1920년 3월 27일에 문락좌(文樂座)의 공연에서 가야금 명인 심정순의 장녀 심매향(1907~197)이 승무를 추어, ‘장삼입고 고깔 쓰고 요요한 허리를 재여 추는 승무는 실로 사람의 혼을 살을듯 합디다.’7)라는 평을 받았었다. 또 1913년 11월 17일에 의주기생조합소가 설행한 연주회에서 홍란의 승무가 있었고,8) 조금 더 일찍 1907년 12월에 궁내부 기생들이 발기한 경성고아원을 위한 자선연주회에서도 승무가 추어졌었다.9) 1907년 궁내부 기생들의 자선연주회 프로그램 중에 승무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승무가 어느 정도 정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승무가 정형화된 시기는 19세기로 올라갈 수 있다.
 19세기 승무에 대한 기록이 매우 드물게 보인다. 우선 1864년 정현석에 의해 편찬된 『교방가요』에 ‘승무’라는 명칭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오늘날 독무 형태로 추는 승무와는 달리 기생과 풍류랑(風流郞), 노승(老僧)과 상좌(上座)가 등장하는 일종의 무극(舞劇)이다. 풍류랑과 노승과 기생의 삼각관계가 극으로 전개되는데, 중이 기생을 희롱하다가 파계한다는 내용은 전국의 탈춤에 들어가 있고, 경상도 지역 오광대놀이와 야류에도 있다. 다만 『교방가요』에 기록된 승무는 탈을 쓰지 않으며, 기생인 여성 연기자들이 행했다는 점이 다르다. 진주교방의 이 승무는 현재 진주의 <한량무>10)로 계승되어 추어지고 있다
 그리고 1848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 사행길에 올랐던 이우준의 『몽유연행록』에는 평안도 의주에서 <무고>, <포구락>, <발도가>, <항장무>와 함께 <승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름만 있어서 어떤 승무인지 알 수 없다. 1866년 홍순학이 쓴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