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장현희 〈그 ....순간을 기억하세요〉, 최두혁 〈new Revolution project 2011〉
대구 춤의 정신과 실험
권옥희_춤비평가

로큰롤(rock'n roll) 정신이란 게 있다. 청춘이란 단어와 친한 저항성, 폭발성, 더불어 올곧은 예술성까지 포함해 일컫는 록의 정신. 그중에서도 저항성은 이른바 록(rock)이란 이름을 가진 이 음악의 중요한 정신적 요소이다. <장현희의 그... 순간을 기억하세요>(대구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6월 11일)와 최두혁의 'new Revolution 프로젝트 2011' (대구 엑터스토리, 6월 18~23일)에서 '록의 정신'을 본다.

 

 장현희의 <그....순간을 기억하세요>

 현대춤 작가 장현희(장프로젝트 대표)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무대를 여는 시작점에 있다. 예를 들면 팸플릿에 인쇄된 공연 시각이 '7시 38분', 혹은 '5시 45분'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흔히 말하는 딱 떨어지는 시각이 아니다. 입장이 시작되고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좌석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무대에서 움직이고 있는 무용수들을 보게 된다. 이런 형식의 공연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은 당황하기 일쑤다. 관객들은 좌석을 찾아 앉으며 벌써 공연이 시작됐나 하며 연신 시계를 보거나, 목소리를 낮춰 무대 위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느라 수런거린다. '낯설게 하기'다. 춤 공연에서 '낯설게 하기'는 일반적인 공연의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 찾기를 의도하기 위한 장치다. 게다가 낯선 상황을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긴장하고 집중하게 된다. 지금부터 무대에서 전개될 상황에 집중을 요함. 영리한 선택이다. 이렇게 장현희는 객석조명이 꺼지고 본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무용수들을 무대에 세워두고, 걷게 하거나 혹은 소품을 사용하게 하는 등의 형식으로 늘 무대를 연다. 익숙하고 진부한 것에 대한 저항이다.
 이번 무대도 어김없이, 무용수들이 걷고 있었다. 음악은 없다. 무대에 놓인 의자들, 5명의 무용수들이 서 있고 5개의 의자 위 무용수들. 음악이 흐르면 무용수들이 강한 비트에 맞춰 머리를 흔든다. 클래식한 연미복 상의에 다리를 벌리고 의자에 앉아 헤드뱅잉을 한다. 스케일이 큰 음악에 맞춰 사정없이 긴 머리채를 흔들어 대는 군무는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은 강한 욕망으로 읽힌다. 몸으로 샤우팅을 하는 것 같은 폭발성이다.
 

 

 

 


 장(章)이 바뀌면 검은색과 빨간색 의상의 무용수들, 강박증이 있는 것처럼 불안하게 자신들의 몸을 만지고 쓸며 수를 세듯, 웅얼웅얼 걸어 다닌다. 두려움이 보인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도 '빠르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낙오'될 것이라 주문처럼 되뇌며 움직인다. 두렵지만 움직일 것이다. 주문처럼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그리고 반드시 다르게. 무용수들의 춤에서 드러나는 장현희의 인식세계를 본다. 무용수들은 마치 음악의 음표처럼 움직인다. 제자리에 선채 앞, 뒤 혹은 옆으로 손가락은 세워 들고, 강한 음악에 맞춰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한 명을 주시한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방만하게 서 있다. 다시 바뀐 장(章). 새 울음소리와 함께 서정적인 움직임이 주를 이룬다. 김여주, 이은빈, 정위경, 하지혜의 힘있고 통일된 움직임에서 그 연습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 주은화, 김지윤, 권효원, 서해영의 춤은 좀 더 정적이고 현대춤 동작이 많다. 겉옷 색은 다르나 안은 검정으로 통일한 쟈켓이라든가 한 쪽 소매만 있는 의상. 헝가리 무곡과 크로스오버된 바흐의 코랄(choral), 모짜르트의 레퀴엠, 엇갈리는 1대 3의 춤의 배치 등 장현희는 세련되고 모던한 안무감각을 여지없이 무대에 풀어놓는다. 소극장 공연과는 달리 1시간 남짓한 작품은 안무자의 이야기에 여유 있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이다. 추상적인 이미지 나열로 모호하던 뭔가가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기도 하다. 동어반복처럼 늘어지는 춤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안무자는 자신의 시간을 과거와 미래 현재로 나눠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의 등(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오버랩한 춤을 무대에 풀었다.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의 시간을 되돌아 볼 나이가 된 것이다. 남자무용수 없는 여자무용수들의 춤으로만 꾸민 무대로 그 의미가 더 확장됐다.
 

 

 

 특이할 만한 점하나. 무슨 공식처럼 춤 공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무대영상이 없었다.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으나 이 점은 오히려 무용수들의 춤에 집중, 춤을 보는 재미와 작품의 의미를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작업을 할 때 작가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부분이 아니어도 어떤 것이 유행한다면 생각 없이 무조건 가져다 쓰게 된다. 남들 다 하고 있는 것을 안 하면 뒤떨어지는 것 같고... 작품에 자신이 없을 때 그 정도는 더 심해진다. 춤이든 무대든 내용 없이 치장하지 않고, 남들 다하는 것은 하지 않는 배짱과 용기. 장현희에게는 그런 것이 있다. 



 
New Revolution 2011


 '젊은 안무가들의 New Revolution 2011' 소극장 공연이 막을 올렸다. 지난 해 이 공연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일회성 공연으로 그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말 그대로 우려였다. 정체되어 있는 대구의 춤이 앞으로 이러한 소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다시 활기를 띄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희망한다.

 "소극장 특성화에 맞춘 작품을 창작하고 제작, 유통까지 레파토리화... 도전정신으로 젊은 안무가들의 새로운 혁명. 즉흥과 구성을 통해 새로운 장르 발굴, 젊은 안무가들의 잠재된 창의력과 독창적 테크닉을 구체화시키고 다양한 움직임의 모든 장르를 무대에서 난장...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젊은 안무가들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가능성과 정체성을 찾아 새로운 공연예술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 총연출과 예술감독을 맡아 무대를 마련한 최두혁(대구예술대)교수의 의도이다. 한마디로 저항과 반항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시도를 위한 무대라는 것이다. 왜 이런 무대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의도한대로 잘 가주기만 한다면.
 올해에는 하루에 세 명의 작가 작품을 이틀씩 공연하는 형식으로 6일간 모두 10작품(마지막 날은 네 편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19일(일요일)무대와 23일 무대를 봤다. 그러나 21일 무대, 권효원의 , 김현태의 <탈출>, 장우정의 <그녀에 대하여...그리고>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지방의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는 일은 그들의 작품을 열심히 봐주고 같이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쉬웠다. 

 19일(일요일) 무대. 예효승의 <발자국 이야기>. 춤에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상체부분의 근육과 관절을 경련하듯 뒤틀며 쓴다. 무대중앙에 매달린 마이크, 종이봉지를(샌드위치와 물이 든) 움켜진 채 휘적휘적 걸어 나와 마이크 앞에 서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더니 툭하고 마이크를 친다. 허공을 가르며 내는 윙윙대는 마이크소리가 극장 안 공기를 흔든다. 쪼그려 앉더니 봉지를 열곤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곤 물을 마신다. 갑자기 극장 안은 부스럭거리는 종이봉투 소리, 샌드위치 냄새, 무용수의 움직임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의 기운이 뒤섞여 숨쉬기가 불편하다. 마치 4D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이 무대의 모든 상황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는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냥 걸어 나와 봉지에 든 빵을 먹고 물을 마셨을 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뒤이어 보여 주는 고통의 춤이 이미 오버랩 되어 보이는 것이다.(예상할 수 있었다는 말이 맞는 표현이다) 셔츠를 벗고 팔을 비틀어 맞잡고는 그 속에 자신의 머리를 우겨넣고, 셔츠를 목에 끼운 채 오른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한쪽으로만 밀어대는 춤. 그는 고통, 슬픔 따위의 감정을 그를 보고 있는 객석으로 빠르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작품이 어딘가 헐겁고 하다가 만 말 같으나 순간에 몰입해서 보여주는 춤의 기운은 단단하다. 소극장 공연이 주는 재미는 이런 것이다. 말 그대로 무용수와 호흡을 같이 한다. 무용수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실제 그의 오른쪽 어깨와 왼쪽 팔에는 문신이 있었다) 모양과 의미에 대해 쓸데없이 궁금해 하고, 엉뚱하게 작품과 연결해보기도 하는, 무대와 의외의 거리가 존재하는 곳.

 다나카 에미리(일본)의
〈bbuugg〉 . 다나카를 세 번째 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무대에서 작품을 끌고 가는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것. 지난해보다 몸의 근육이 더 많아 보인다. 성실한, 매력 있는 작가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착오, 또는 시스템 오작동의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의 잘못을 말하는 (bug)에서 착상. 자신의 몸(컴퓨터)과 작은 로봇벌레(버그)의 설정으로 깨지기 쉽고 불확실한 사고와 신념을 추상적인 춤으로 명징하게 전달한 작품이었다. 조그만 곤충 모양의 작은 로봇과 철제 간이의자 소품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게 만든, 깊이 있고 넓게 확장된 그녀의 춤은 빼어났다. 태엽을 감은 로봇이 자신의 몸을 기어 다니게 한다거나, 로봇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 뒤 추는 춤의 우아함은 움직임의 상식을 깨는 반전이었다. 뒷짐 지고 앉은 채 앞으로 전진, 일어서서 손가락을 사용해 우주와 교신을 하는 듯, 잔뜩 홀린 우아하고 느린 춤은 마치 실수로 지구에 온 이가 우주로의 귀환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많은 훈련에서 나오는 정직하고 분명한 움직임(현대춤)은 쉽게 그녀의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친절한 열쇠다. 로봇의 태엽을 되감으며 철제 의자위에 올라서 마무리하는 다나카는 반짝였다. 춤과 작품에 대한 자신감으로. 


 서승효의
〈urban〉 . '도시의 블루스'라, 재즈와 힙합으로 도시의 정서를 다소 거칠게 풀어낸 작품이었다. 7명의 남녀(실제 출연하는 무용수들)가 노는 것을 기록한 영상을 보고 있자니 문득 드는 생각 '청춘들에게도 도시의 정서는 버겁나보다.' 7명의 무용수들은 카카오톡으로 수다를 떨다가 정작 현실공간에서는 혼자서 논다. 보고하듯 자신들의 일상을 찍어 가상의 공간에 올린다.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하나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 갈린다. 영상에 술병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술병을 들고 무대 뒷벽에서 나와(서승효) 벽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코너에 발을 뻗고 앉는 장면은 영화기법과 닮았다. 고독과 좌절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반면 새로울 것 없는 움직임의 힙합군무와 특히 웃고 우는 양면 그림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번갈아 보여주는 움직임은 표현의 수준은 단순함을 넘어 장난처럼 보인다. 걸러져야 할 동작들이었다. 내용 없는 군무춤의 나열은 소극장 무대에 적절치 않다. 


 23일(목요일)무대. 퍼포밍 아트그룹 맨발의 <놀이 (Nol-i)>. 팸플릿에 놀이(Nol-i)를 비롯해 얼씨구, 지화자, 그렇지 등의 추임새 단어를 굳이 영어발음으로 옮겼다. 춤 그룹의 국제성 추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님 그냥 영어로 모양을 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다만 춤을 본다.
 남자가 걸어 나와 구두를 벗고 무대에 누웠다가 일어나더니 다시 신발을 신고 겉옷을 벗어 들고는 건반으로 가서 앉는다. 건반주자가 벌인 해프닝이다. '재미와 충격, 즉흥성 예술성' 추구. 그룹 맨발이 내건 기치이다. 건반주자가 한 해프닝은 재미도, 충격적이지도, 예술성도 없다. 싱겁기 짝이 없다. <놀이>는 장고, 건반, 소리(아리랑을 편곡해 부른다), 춤으로 "아트믹스를 시도" 한 작품이라고 프로그램에서 읽었다. 반면 한국춤을 전공한 김가영은 타이트한 검정치마에 짧은 흰색상의, 검정브래지어를 입었다. 춤추기에 다소 불편해 보이는 의상은 오히려 김가영의 응축된 춤과 잘 맞았다. 제대로 발을 뻗어 들 수도 뛸 수도 없는 의상을 입고 주저앉아 있는 상태에서 두 발로 제대로 서보려 애쓰는 상황을 묘사했다. 한국 춤사위는 없다. 그저 앉아서 뒤로 물러나 손을 뒤로해 벽을 잡고서 일어서다 번번이 주저앉는, 그러다 마침내 일어서는 움직임의 과정이 그대로 소리꾼이 부르는 아리랑의 정서였다. 제대로 춤춰보지 않은 무용수한테서는 나올 수없는 응축된 춤의 에너지가 돋보였다. 이승대는 김가영과 손, 팔꿈치 등을 이용해서 접촉즉흥을 시도해 보지만 즉흥의 재미는 전달되지 않는다. 국제 즉흥춤 축제(서울)에 참가했던 작품이었다.(여자무용수는 안지혜) 그 때 본 공연은 즉흥이라고 언급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즉흥에 대한 연구와 공부가 더 필요하다. 이승대는 (춤은 추지 않고 등을 보이고 앉아만 있었다) 서울공연 때와는 달리 움직임에 에너지가 넘쳐 춤을 보는 재미를 더 해준다. 춤집이 좋은 무용수다. 허나 이승대가 앞으로 고민해야할 문제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는 춤 스타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 자신만의 독창적인 춤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노진환의 솔로작품 <죽음을 기억하라>. 신화에서는 죽음을 모든 것이 생겨나는 근원으로 본다. 오이디푸스 신화, 흰두교의 여신 샤크티 '마더 칼리'. 대지는 모든 생명을 피워 올리고 그 죽음을 다시 받아들인다. 어머니를 대지와 바꿔 말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오이디푸스를 낳은 이오카스테는 자신이 낳은 생명과 결합한 뒤 죽음을 선택한다. '샤크티'의 원뜻은 모든 것이 비롯하여 생겨난 근원, 우주적인 힘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노진환은 자신의 존재이유와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가져온다. 파도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좁은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안개, 바닥에 가득한 얼굴모형 위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하체 모형. 무엇을 찾는 듯 허우적거리기를 한참하다 얼굴모형을 하나씩 집어서 들여다보곤 버린다. 얼굴도 없고 다리도 없다. 벗어날 수가 없다. 무대 벽을 부서져라 주먹으로 두드리다 지친 듯 벽에 기대서자 30여분 동안 온 몸으로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땀에 젖어 지친,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조명으로 벽에 문을 그려낸다. 벽을 두드린 행위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노진환은 작품소재 뿐만 아니라 실재 그의 모습 또한 매우 철학적이다. 온 몸으로 인간존재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듯, 조용하고 진지하고 부수수하다. 그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문제에 얼마나 근접해 가고 있는가. 객석에 앉아있거나 같은 무대에서 춤춘 후배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그들이 무대에서 온힘을 다해 춤추고 있는 그를 보고 있다. 고무적이다.

 신필경의 <공존>. 힙합의 틀을 깨는, 움직임이 신선한 작품이었다. 작품의도를 옮겨본다. "염(厭), 좀비. 두 형체 모두 사람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대상이다. 두 형체 모두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관심 받고 싶어 하는, 때론 누군가의 관심이 싫은, 필요하다가 때론 불필요하다가..." 검정색 민소매의 7부 길이의 바지를 입은 남자 둘,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듯, 강제로 움직인다. 한사람이 걸어 나가면 다른 이가 잡는다. 잡으면 일어서고, 앉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 움직임이 주는 이미지가 마치 감옥 같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공간의 황폐함이 조명으로 잘 드러났다. 조명의 효과로 둘로 나뉜 공간. 어두운 쪽에 한 명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으면 밝은 쪽의 다른 한 명이 춤을 추는, 대화형식의 춤이 반복된다. ㄷ자의 무대 벽을 거꾸로 타면서 추는 춤은 순수 춤에서 읽을 수 있는 예술성과 다르지 않다. 무대중앙에서 레슬링 하듯 엉켜 구르는 모습은 서로를 원하는 영혼의 춤 같다. 안무자는 힙합을 강의하고 있다. 힙합의 움직임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춤 스타일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무한하게 변이 확장시킬 수 있는 감성과 재능이 있는 안무자며 춤꾼이다. 주목해봐야 할.

 지방 무용계는 이미 순수춤 전공자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 여파가 무용학과 폐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 보니 순수춤 전공 작가들의 강의와 작품활동 등은 위축되고 따라서 순수춤 전공의 재능 있는 무용수와 작업하기 또한 쉽지 않게 되었다. 무용수뿐만이 아니라 무대미술을 비롯한 타 예술장르와의 협업 또한 마찬가지로 열악하다. 안무자가 의도한 대로 맘껏 무대에 다 풀어놓지 못하는 지방의 이러한 작업 여건은 늘 작가들의 발목을 잡는다. 안쓰럽다. 한국의 지방 춤작가들에게 록의 정신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 젊은 대구의 춤작가들은 록의 저항정신으로 작업하고 있다. (전재:공연과 리뷰,2011, 가을호)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