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SIDance/ 마기 마랭ㆍ필립 장띠ㆍ돈*그누
무용으로 철학하기의 명암
한혜리_경성대 무용학과 교수

“모든 탐구는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과학을 구성한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옥중수고⌟에 나오는 말이다. 문맥으로는 과학에 대한 당시의 보편적 해석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 이해해야할 테지만, 그저 생경하기만 한 contemporary dance(동시대 무용?)를 볼 때면 되새겨지는 구절이다.
 지금은 화석 같은 것들이 되어 버렸지만 그 때는 새로웠을 생각(철학)들, 테크닉들, 매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적 무용이 되고 자료가 된다. 변화의 주기가 빨라진 20세기말 부터 21세기에 걸쳐 있는 그 시간들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 마기 마랭과 필립 장띠는 또 다시 새롭고 낯선 무용으로 우리를 단단히 휘어잡고, 지금에 머물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기대를 배신한 춤과 지식 자료가 된 규칙들을 해체하는 시간에 우리를 동참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의 무용 그것도 아주 특수한 그들의 무용을, 이미 지양된 과거의 방식으로 고찰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살아있는 화석 취급을 받는 터무니없는 시대착오자이거나, 무용의 변화가 두려워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진 무용을 거부하는 민속무용학자 취급을 받을 터이지만, 단지 무용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앞의 그 무엇이든 기존의 틀에 넣고 보면 판단하기 쉽고 그래서 곧 평가가 나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언제나 변화가 두렵고 자신의 생각을 개선하기 힘든 이유는 안정되고 균형 잡힌 상태에 안주하려는 나태한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끝없이 나를 개선하여 바꾸도록 만드는 우리 내면의 의지를 생성시킨다.
 무용은 그리고 예술은 타산적일 수 없고, 정량적 평가는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시대적 예술관에게 대중 매체의 수 많은 채널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서바이벌 게임 형식의 노래•춤•연기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지속성은 물론, 조직이나 방식의 변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권위적(위압적?) 속성을 내장하고서 지나간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문학을 위시한 각각의 예술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도구가(수단이) 되어버리는지를 적나라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수단 역할을 하는 것은 항상 이전에 목적이었던 것이라는 점이다.
즉 시니피에가 시니피앙으로 변하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로 변한다(Levi-Strauss).

 

 문화 콘텐츠로서의 무용이 상식어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면서 본능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게 하는 무용과 이성적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무용으로의 분류는 개인의 철학에 선택권을 주었다. 우리 시대에 ‘철학 일반(一般)’이 없는 것처럼 ‘무용 일반( 一般)’도 없다. 다양한 철학이 존재하듯이 다양한 무용이 존재하고 그 중 무언가 하나를 선택할 뿐이다. ‘무용에 대해 철학적’이라는 것은 결국, ‘무용의 역사성’을 깨닫는 것이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19세기 서구 낭만주의 발레리나의 어리고 가냘픈 몸과 중력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공기처럼 가볍게 공중을 떠다니는 움직임에 고착된 우리의 시각에 20세기 말 마기 마랭은 무용수들이 뚱뚱한 인형 옷을 입은 〈Grooslandz〉(1989)라는 작품을 만들어 날렵하지 않은 몸의 움직임이 주는 떠다니는 듯한 야릇한 경량감의 경험을 관객들에게 주었었고, 얼굴을 포함한 온몸에 뿌연 가루를 묻히고 안짱다리로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형식의 〈May B〉(1981)라는 작품은 공연 내내 어찌 보아야 할지 관점의 혼란으로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다.
 21세기 마기 마랭은 우리 앞에 또 다른 방식의 무용을 마주 세웠다. 나, 우리, 삶 -문화, 사회, 정치, 경제- 간의 복잡한 관계에서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마기 마랭의 무용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었다.
 시간 속 행위로서의 춤은 ⌜논어⌟가 제시하는 방법데로 보고(視), 자세히 보고(觀), 안무자의 의도를 헤아려 보는(察) 체계를 지키려고 집중하는 과정에서 윤리적인 나 자신과 마주하고, 종교적인 나 자신과도 마주하고, 문화적ㆍ예술적인 나 자신과도 마주하게 되는 <징슈필(Singspiele)>(9월 25일, 토월극장)의 유일한 무용수 다비드 망부슈(David Mambouch)의 춤은 보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적절히 배분해준 구성이었지만, 무용수는 상당한 에너지와 순발력으로 쉼 없이 달리고 있다는 느낌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도록 조직되었다.
 “무대 스케치”를 통해 발라메(Mallarmé)가 주장했던 ‘무용수는 여성이 아니고 형태의 양상을 요약하는 변신(상징)이며 일체의 문자 도구에서 해방된 시를 쓰는 것이지 그냥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망부슈의 춤으로 우리는 체험했다.
 공연 시간 내내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옷을 바꿔 입고 각도를 달리하며 자세를 만들 때 마다 처음에는 가면의 주인공을 보고 다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다음에는 그를 보는 내가 누구인지를 성찰하게 된다.




 마기 마랭은 '우리는 누군가를 어떻게 알아 보는가' 라는 질문을 작품 설명에 내걸었고 푸코를 참고 자료로 제시한 반면, 필립 장띠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뭐냐고 언어로 명확히 제시해보라는 당돌한 어느 한국 인터뷰어(기자?)의 질문에 ‘힘든 삶을 살아내는 각자의 내면적 혼란스러움에 위로를 주고 싶었다’는 작품의 의도와 개인적 세계관으로 답했다.
 그의 작품 〈Forget Me Not〉(9월 27-28일, 토월극장)이 공연되는 극장의 객석에서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영혼 없이 크기만한 용감한 웃음 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가 주고 싶었던 여유를 느끼려면 조금은 천천히 우리 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의 배경을 헤아려 보아야 했는데 21세기에 교육이 시작된 세대에게는 무대에 펼쳐지는 볼거리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던 모양이다.
 원래 예술적 기법은 다른 예술적 현상이 아닌 과학적, 철학적 사유의 다른 산물에 비추어 의미를 얻는다. 동원된 방청객 같은 즉각적 반응으로서의 웃음이 못내 염려스러운 것은 〈Forget Me Not〉은 보여지는 광경들에 의존하여 긴장을 제거하는 마약 같은 환상의 시간을 제공하고 또 다시 긴장과 혼란의 삶으로 우리를 몰아내는 매정한 작품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얗고 포근하기만 한 눈을 연상시키는 각양의 하얀 풍선(?)이 주는 고요와 평안으로 모순을 완화시킬 수 있는 생각의 완충지를 창조해 내면서 혼란스런 삶을 감내해야 하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정성들여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심각하게 무용으로 철학하기를 하는 다음 세대인 듯 보이는 돈*그누(Don* Gnu)의 〈Men in Sandals〉(11월 4일, 자유소극장)은 ‘그렇게 기억 속에 묻혀 한 낱 웃음거리로 꺼낼 수 있는 그 무엇,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그런 기억들이 점점 많아져만 가는 빨리 변하는 세상 속의 우리들은 정말 괜찮은 걸까? 나중에는 가벼워지고 희미해 질 것이란 걸 알면 지금의 삶이 지금 내 앞의 것들을 이미 지나간 것들처럼 미리 담담하게 보고 견뎌낼 수 있을까?... 그래서 두 무용수가 진지한 얘기와 아픈 춤을 뒤로 하고 웃음을 보여 주어도 그 자리에서 금방 웃어지지 않았다.




 무용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관객에게 보여주는 절제된 움직임과 단순화한 질문들은 내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한다. 그리고 쉽게 의도를 판단할 수 없어서 춤을 보는 내내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혁신은 언제나 비 성공적이고 성공적인 것은 언제나 비혁신적 이라고 하던가? 공들인 작품을 공들여 보지 않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무용들을 지식의 뒤에 숨어 염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용기는 가져야 하는 시대이다. 진정한 무용을 만났다면 의미는 살면서 내내 찾을 기회가 오고 또 올 것이니까...

2014. 11.
사진제공_SIDance2014/박상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