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공연 ‘all about dance'
자신만의 춤의 어법으로 말하기
권옥희_춤비평가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공연 ‘올 어바웃 댄스’(11월 26-27일, 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서울과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30대 중후반에서 40대까지의 젊은 안무자들의 작품으로, 비교적 수작이라 평가받은 컨템포러리 댄스 소품으로 꾸민 무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혁진, 이경은, 박순호, 이재영과 대구시립무용단 소속의 신승민, 장이숙 모두 6명의 안무가 작품을 이틀에 걸쳐 감상. 무대에 오른 작품을 통해 ‘지금’을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내면을 그들의 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혁진의 <동행>. 남자무용수의 듀오. 춤의 어조가 서정적이고 매력적이다. 춤인 듯 아닌 듯 유려한 춤의 어조가 독특하다. 둘은 무심히 제 춤을 추며 우주(무대)를 누빈다. 같은 길을 걷겠다는, 혹은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의지로 보이는 두 무용수의 춤은 음악을 몸에 싣고 무심하게 흐른다. 두 세 개의 작은 조명을 배경으로 둔 채 추는 춤은 얼핏 고독해 보이는 ‘동행’. 춤의 잔영은 무대가 어두워지고도 음악처럼 남아 공간을 떠다닌다. 유려하게 흐르던 춤의 잔영이 아직 그 어둠속에서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또 다른 춤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음악은 둔 채, 자신들은 어둠속에 고요하게 있으며 춤을 상상하게 만든다. 섬세한 춤과 영리한 연출이다. 섬세하다는 것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이경은의 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안무자(이경은)의 어머니인 듯, 경상도 말로 하는 대사 내용을 미루어 짐작컨대 안무자는 40세쯤이고, 그녀의 엄마가 죽음을 무릅쓰고 낳은 생명이다. 무대 바닥에 누워 팔다리를 휘적거리고, 앉고, 일어서고, 뛴다.
 무대의상은 70년대 버스 안내양의 모습과 흡사하다. 앞섶 단추를 단단하게 채운 파란색 상의와 일자바지, 무대 막에 가득 피어오르는 연기, 번개를 그려내는 조명, 연기 안에 갇힌 이은경의 움직임의 조합에서 ‘부토’의 이미지를 본다. 두 번을 봐도 작품과의 소통은 삐걱. 잠깐씩이나마 움직임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 녹음이(혹은 자신이 살아온 내밀한 이야기가) 민망한 듯 웃고 난 뒤에 풀어놓는 이야기가 춤보다 재미있다. 그것은 마치 음악 같고 춤 같다. 아이를(이경은) 낳으러, 넘어서던 문지방이 이승과 저승의 경계였다는. 담담하게 풀어놓는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춤으로 녹여 쓴다는 것, 발상과 용기가 범상치 않다.




 신승민의 〈Half Time〉. 몇 개의 정육면체의 상자를 쌓고, 분리하고, 다시 결합하면서 무용수들이 앉고 서고, 눕고, 끌어내는 등의 동작의 연결을 보여 주는 이미지의 연결. 한 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팔위에 턱을 괸다. 생각한다. 잠깐. ‘half time' 이다. 끌어내리고 계단을 만들고 올라가고, 내려오는 움직임, 또 생각한다. 거듭되니 생각하는 척(?)의 연결이 된다. 여자, 물을 마신다. 헬리콥터 소리. 조난당한 이들이었나.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 중인가. 생각만 한다고 상황이 변할 것 같지는 않으나, 생각 없는 것 보다는 ’half time' 동안이나마 생각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세련된 춤은 없으나, 촌스럽지 않다. 춤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을 사유케 하려면 ‘half time’보다 좀 더 길고,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박순호의 〈人-조화와 불균형〉. 판소리 ‘별주부전’의 사설에 움직임을 입혔다. 택견 동작을 연상하게 되는 움직임과 춤판 구성은 마당놀이. 소리를 하는 이가 무대 가운데로 나와 무용수의 몸을 북삼아 두드리고, 사설을 몸으로 연기하는 무용수의 연기가 객석의 지루함을 걷어낸다. 다소 거칠게 구성한 면이 없지 않으나, 춤에서 움직임과 휴지부분, 소리를 적절하게 밀고 당기는 적절한 배치로 작품이 예술성이란 옷을 입었다. 현대춤으로 풀어낸 우리 것의 번역이 유창하지 않아 다행. 상투적이지도 않아서 또 다행. 우리 것의 권위(?)에 억눌리지 않고 단순하게 풀어 춘다는 것은, 그것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재영의 <이퀼리브리엄>. 두 명의 남자 무용수의 접촉에서 시작, 대응, 비교, 조화로 이르는 움직임의 변주가 인상적인, 춤의 어법이나 어조를 치밀하게 구성, 발전 확장시킨 작품이었다. 안무가의 의도를 개략적으로 파악하면 이렇다. 10센티미터 정도의 키 차이가 나는 두 무용수. 같은 키가 되기 위해(왜, 꼭,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균형 잡힌 질서’를 위해 혼란의 시기, 몸을 과도하게 쓰는 ‘무질서의 과도기’를 거친다는 것. 이들의 불균형, 차이와 다름은 단지 키뿐만이 아닐 것이나 어쨌든 키가 큰 쪽이 작은이에게 맞추는 것으로 정리한다는 것. 서로 마주선 뒤 큰 키의 무용수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무릎을 구부린다. 드디어 강제된 균형으로 ‘평형상태’가 된 것이다. 키 작은 이가 손으로 서로의 키를 재본다. 평형.
 ‘평형’을 맞추기 위한 방법으로 작은 키의 무용수를 어딘가에 올라서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무자는 큰 사람이(가진 이가) 키를 낮추는(가진 것을 내어 놓는) 걸로 결정한다. 소품을 사용하는 것보다 쉽게 간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굳이 안무자의 의도였다고 읽는다. 옳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방법은 ‘균형’ ‘질서’ 라는 개념에 갇히지 않는 것. 춤은 다소 지루했으나, 안무자의 의도를 넘어선(?) 작품으로, ‘다름’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에 이의 제기를 하는 것으로 읽힌다. 제청이요.




 장이숙의 〈Remember(don't forget me 중에서)〉. 무대에 오른 다섯 작품과는 다른 시대에 위치하고 있는, 춤의 어법이 90년대쯤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남자가 여자의 몸에 찌르듯 들이대는가 하면 여러 개를 한꺼번에 여자에게 안기는 알전구(폭력)의 상징성, 선명하고 돋보였다. 하지만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고통을 그려내면서 선정성을 걷어내지 못한 오류를 범했다. 예컨대 붉은 색의 긴 드레스(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에서 붉은 색 드레스(천), 그것은 마법적인 매혹과 뒤섞인 두려움 절망감을 일깨우는 모든 것의 촉매역할을 한다. 희생이라는 플롯을 설정했다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남녀 무용수들의 거친 호흡소리는 고통이 객석으로 전해지기는커녕, 작품을 신파로 만들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고통을 제대로 직시하고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 선택이 섣불렀다. 사실을 미화하거나 이용하면 안 된다. 감정을 추슬러 올리고 지성을 자극, 고양된 정신 속으로 사실을 추켜올려야 한다. 이때 그것들을 표현하는 춤의 언어가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의 소란에 대해,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고통, 특히 위안부 문제를 깊은 눈으로 그 고통의 근원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고 말하는 것, 위험하다.




 안무가들의 모든 이야기. 같은 이야기지만 다르게, 혹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이야기로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남과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직 없었던 세계를 춤으로 펼쳐 보이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를 춤으로 펼쳐,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일조차 쉽지 않다. 자신의 세계가 모호하여, 춤에 대한 사유가 아직 명확한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모호성은 어떤 상태에 이르기 위한 도구로서 유효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가보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더 이상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다른 이를 만나지도 성장하지도 못하는 젊은 안무가를 보게 되는 일이다. 안무자들의 건투를 빈다.

2014. 12.
사진제공_대구문화예술회관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