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쿠쉬나메》 원작, 최지연 〈그 사람 쿠쉬〉 & 김선미 〈천〉
신선한 소재 발굴, 정체된 안무 감각
방희망_춤비평가

 페르시아의 방대한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를 원작으로 한 무용극 두 편이 12월에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최지연프로젝트의 <무용서사극: 그 사람 쿠쉬>(12월 3-4일,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 평자 3일 관람)와 무용창작산실 우수작품 공연 중 하나인 김선미무용단의 <천(千)>(12월 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이 그것이다.
 《쿠쉬나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한양대 이희수 교수가 창무품의 으뜸품장이고 작년 10월 창무회 포럼에서 관련 내용을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창무회 소속인 김선미, 최지연 두 안무가가 작품 창작에 탄력을 받은 듯하다.
 올해 1월에 《쿠쉬나메》의 번역본이 외교부 ‘공공외교 역량강화사업’ 지원으로 출간되었고, 이희수 교수는 책의 후미에 《쿠쉬나메》 연구의 향후 과제 중 ‘문화 콘텐츠 창작과 개발’을 첫 번째로 꼽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 쿠쉬>와 <천>이 모두 공공 지원금을 받아 (<그 사람 쿠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 춤 작품으로 탄생한 것은 그런 목표에 발맞추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공개된 최지연프로젝트의 <그 사람 쿠쉬>는 서사시 《쿠쉬나메》 자체를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번역본에서부터 달고 있는 부제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천년 사랑’이라는 테마를 놓고 보자면, 페르시아 왕자인 아비틴과 신라 공주 프라랑 두 주인공의 이름과 별개로 달린 제목 <그 사람 쿠쉬>는 《쿠쉬나메》와의 연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품에 등장하지도 않는 ‘쿠쉬’는 악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서사시 안에서도 서로 다른 두 인물을 지칭하는 명사라서 혼돈을 일으킬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목으로 삼은 것부터 그렇다.
 <그 사람 쿠쉬>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배우 손병호가 이희수 교수 역을 맡아 《쿠쉬나메》의 신라 관련 내용을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설명하며 극의 중간 중간 개입하여 서술하는 형식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효과적인 구조라 할 수 있다.
 생소한 인명과 줄거리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 상단에 자막을 두었고, 무대는 영상을 펼칠 수 있는 큰 막을 배경으로 세워 단순화시켰다. 그간 KB하늘극장에서 올라간 여러 공연들이 높은 천정을 가진 이 극장의 상·하단과 객석 공간까지 입체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등·퇴장로에만 약간 변화를 준 이번 공연은 굳이 KB하늘극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으며, 숨 가쁘게 진행되는 두 세대의 줄거리를 펼치기엔 집중력이 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은 공간의 문제라기보다 서사에 급급하여 중점을 둘 장면을 골라내지 못한 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소수의 무용수로 아비틴이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하는 장면과 신라 궁전에서의 연회, 폴로 경기 장면 등을 모두 소화하도록 했는데, 별다른 의상 변화 없이 진행시킨 것은 자막의 해설로 이해시키고 넘어가기엔 전달력이 부족했다.
 대규모 군무진을 출연시킬 수도 없고, 의상에 변화도 줄 수 없다면 음악과 움직임에 민속적인 요소를 넣어 페르시아의 것과 신라의 것에 차별을 두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최지연은 특이하게도 신라 공주의 아버지인 왕 태후르 역을 여왕으로 바꾸어 등장하였고,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은 전문 무용수가 아닌 배우 이창수가 맡았다. 이로 인해 주역에 무게감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쿠쉬나메》보다 훨씬 전부터 더 많이 알려진 서사시 《샤나메》(왕서 王書)에는 어진 임금 잠쉬드의 계보를 잇는 아비틴과 페르시아를 재건하는 그의 아들 영웅 페리둔,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때문에 최고 영웅 페리둔의 아버지인 아비틴이 신라공주와 인연을 맺었다는 《쿠쉬나메》의 내용들이 후속 연구를 통해 현실의 역사와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찾게 된다면 더욱 가치있게 다뤄질 만한 소재인 셈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중요한 인물 아비틴이 주인공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쿠쉬에 패하고 쫓긴 아비틴이 처참한 무력감에 젖어 있다가 지상낙원 같은 신라에 들어섰을 때 그 신세계에 매료되는 장면에서 그의 시점이 어떤 것이었을까 좀 더 많이 고민하고 섬세하게 꾸몄더라면, 30명 공주 중에 가장 아름다운 프라랑 공주를 내주기 싫어 태후르가 아비틴을 시험하지만 그가 숨겨놓은 프라랑을 현명하게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에피소드를 넣어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게 했더라면, 인물과 사랑 이야기는 더 매력적으로 살아났을 것이다.
 어차피 자막과 영상에 줄거리 전개를 의존하는 방법을 택했으니 페리둔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하는 후반부 장면을 줄이고서라도 아비틴이 신라에 들어와 머물고 사랑에 빠져 공주를 데리고 떠나기까지의 과정에 더 집중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우리가 먼 나라 페르시아의 신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명분은 결국 우리, 신라와의 인연에 있기 때문이고 창무회에서 풀어낼 수 있는 춤의 정체성과 역량 또한 우리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김선미무용단의 <천>(千)은 그런 선택과 집중을 잘한 편이다. 장삼가사를 연상시키는 붉은 겉옷을 걸친 김선미가 천도의식을 집전하는 만신으로 분(扮)하여 사랑하는 딸을 먼 타국으로 떠나보낸 태후르 왕, 이국 땅에서 남편을 잃고 쫓기다 삶을 마감한 공주의 슬픈 영혼을 불러낸다.
 작품설명에는 불교의식인 ‘영산재’(靈山齋)를 큰 틀로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바라춤을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넣은 것 외엔 구별되는 점을 찾을 수 없었고, 초혼하여 위로하고 떠나보낸다는 형식은 한국춤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왔다는 점에서 다소 진부하기도 했다. 사실 원작을 알고 작품설명을 읽은 입장에서만 알 수 있을 뿐, 무대 위에 펼쳐진 것만을 놓고 《쿠쉬나메》의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태후르 왕과 공주, 아비틴 세 인물의 감정선을 바탕으로 관계에 주력하여 춤으로 풀어낸 것은 <그 사람 쿠쉬>보다 한층 정돈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다. <그 사람 쿠쉬>에서 태후르로 나왔던 최지연은 여기서는 신라 공주 프라랑의 영혼이 되었는데, 아버지와 딸의 관계, 슬픔과 한에 집중되다보니 그 성격이 어둡고 소극적으로만 비추어진 점이 아쉬웠다.
 《쿠쉬나메》 속에서는 프라랑이 《천일야화》와 다름없을 정도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관능적인 사랑의 주인공이었는데, <천>에서의 그런 성격 설정은 아비틴 역이 검무 등을 통해 젊은 남성미를 발산하는 것과 비교되어 나이 차가 나는 세 역할 캐스팅의 부조화가 어쩔 수 없이 한층 더 부각되어 버리는 단점을 낳기도 했다.
 만신인 김선미와 군무진이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하얗게 꾸민 머리카락이라던가, 영혼들이 고통 속에 갇혀있던 영겁의 세월을 상징하도록 쇠사슬을 늘어뜨린 무대장치 등은 특별한 느낌을 갖게 했다. 쇠사슬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만신이 그것을 걷어낸다던지, 영웅의 능력을 묶어두는 장치라든지 그렇게 춤의 요소로까지 활용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한편, <그 사람 쿠쉬>의 음악에 ‘영산회상’을 넣고 <천>에는 ‘영산재’의 틀을 가져온 것이나, 두 작품에 황정남이 공히 영상감독을 맡아 방대한 서사극을 펼치기에 부족한 부분-전쟁 장면에서 군대를 그림자를 통해 숫자를 불려 표현한 점 등은 한 단체에 속한 두 안무가가 굳이 두 개의 작품으로 분산시켜 만들 만큼 《쿠쉬나메》가 중요한 소재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학계에서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을 서역 사람으로 보고 있으므로 《쿠쉬나메》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민간에서 있었던 처용 설화가 기록으로 남는 동안 왕실의 공주가 서역 사람과 혼인하여 떠났다는 내용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쿠쉬나메》의 내용 모두를 흔쾌히 받아들이기에는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이 신화에 접근하여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 동화나 판타지에 의거할 때,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남겨둘 때 훨씬 안전하고 납득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이희수 교수는 《쿠쉬나메》의 번역본 서문에서 이것을 처음 접했을 때 ‘선점하고 싶은 학문적 욕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두 작품을 접하고 난 다음 바라보는 평자의 생각도 실은 그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작품의 소재로 선점하고 싶은 다소 성급한 욕구 때문에 한 단체에서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 두 작품으로 무리수를 두며 만든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물론 <그 사람 쿠쉬>의 경우, 최지연의 다방면에 걸친 지인들이 이 프로젝트에 의기투합하여 어렵게 공연으로 이뤄낸 성과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이 소감을 이야기하며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한류’를 논하면서 본토에 수출하고자 하는 뜻을 꺼냈기 때문에, 어떤 섣부름을 느끼고 우려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문명이 보유한 무궁무진한 신화 속 이야기를 오랜 역사 동안 몸에서 몸으로 전승하는 인도의 전통무용을 떠올려보면, 페르시아의 신화를 우리 영역으로 품어올 때도 그만큼의 진중함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에서 우리 구미에 맞는 것만 쏙 빼내는 것 말고, 음악이나 무용, 미술 등 그 문화의 전반을 아울러 담으려는 노력과 함께 할 때 균형있는 교류가 이뤄질 것이다.

 만약 발표한 대로 이란 본토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둔다면, 페르시아와 관련된 장면을 꾸밀 때 협업할 부분을 고민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신라의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낼지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에 올려진 <그 사람 쿠쉬>와 <천>은 이국에서 비롯된 신선한 소재를 끌어오고 화제에 올렸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었지만, 천 년 전의 사랑을 애절하게 되살려내는 안무가들만의 감각적인 관점을 볼 수 없었던 점, 춤은 창무회의 기존 작품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안주한 것이 안타까움을 남겼다.

2015.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