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지숙·김재덕· 최수진·변지연의 작업
새로움은 춤을 확장시키는가?
김채현_춤비평가

 춤은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춤들이 있기에 춤은 머물지 않는다. 예술에서 새로움의 척도는 다면적이다. 궁극에는 새로운 춤들에서 완성도를 묻게 된다. 완성도가 낮은 춤에서는 그 춤이 갖춘 새로움의 의의도 낮춰진다. 지금 춤에서의 새로움은 전체 춤계의 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현장에서의 주요 화두인 춤의 확장을 새로움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를 위해 몇몇 공연작들을 살펴본다.



∎ 이지숙 안무 <헬프>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는 압권(壓卷)이었다. 지금부터 근 40년 전 호르헤 돈이 추고부터 더 그렇게 되었다. 마야 플리세츠카야, 실비 길렘이 베자르의 <볼레로>를 추었고, 또 얼마나 많은 대가, 중견, 신참 들이 그에 매료되었던가. 55년 전 베자르가 처음 무대화했을 때 더러 뒷공론이 있었어도 그의 <볼레로>는 족보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지숙의 <헬프(Help)>(4월 18-19일, M극장)는 라벨의 <볼레로>를 다르게 대한다. 압권의 춤 <볼레로>에서처럼 <헬프>에서도 라벨의 음악이 그대로 쓰이지만, <헬프>는 ‘베자르의 <볼레로>가 곧 라벨의 <볼레로>이다’와 같은 등식과는 거리를 두었다.




 구조가 절박한 처지에서 부르짖음마저 아무 메아리도 얻지 못하는 세태는 오늘의 일상이다. 독무 <헬프>에서 이지숙은 도움이 절실한 익명의 그 누구를 그려낸다. 플로어에 밀착된 움직임을 중심으로 몸부림 류의 동작과 표정 연기를 섞어가며 아우성을 쳐내지만 주변은 냉랭할 뿐이다. <볼레로> 선율이 고조되는 것과 함께 호흡하며 움직임과 동작과 표정연기가 아주 고조되어도 주변은 아랑곳없이 고요하다.
 <헬프> 무대는 대형 종이 박스를 벽채처럼 무대 가운데를 가로질러 (시위대 차단벽 모양으로) 쌓아두었고, 그 벽면은 캠코더로 독무 출연자의 공연 실황 영상을 투사하는 스크린으로 활용되었다. 스크린이 폐쇄회로 티브이처럼 그의 절규와 아우성을 기록 전달해도,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공연 후반부에 깜박대는 백열등이 절박한 그 사람의 눈물 또는 경보 사인 구실을 해도 주변에서는 아무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독무의 이점을 살려나간 이 작품에서, 최종 절정부의 순간에 출연자는 벽채 뒤로 사라지는데, 이러한 결말 처리는 그 이전에 지속적으로 크레센도된 절규를 희석시키는 감이 있었다.




 모리스 베자르 류의 <볼레로>가 욕망의 분출로 다가오는 데 비해, <헬프>에서 <볼레로>는 배제와 억압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벨 <볼레로>는 확대 해석된다. 반복되는 템포와 함께 크레센도되는 욕망이 리듬을 타도록 조직되는 베자르 류 <볼레로>는 섬세한 리듬감을 감당해낼 정교한 수련을 요구한다. 춤을 하는 사람이라면 꽂힘직하다. 그래서 베자르의 <볼레로> = 라벨의 <볼레로> 등식이 무의식처럼 통했을 것이고, 춤꾼들이 베자르가 제시한 구도 내에 머무는 경향은 완강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지숙은 이런 상식을 딛고 <볼레로>를 구원 없는 이를 위한 <볼레로>로 뒤바꿔놓았다. <헬프>에는 신진다운 결기가 담겨 있다.



∎ 모던테이블 김재덕 안무 <속도>

 모던테이블의 <속도>는 모던테이블의 진화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6월 5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김영길 아쟁 명인의 독주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번 작품 <속도>는 모던테이블의 경향에 새로운 목록을 추가하였다.
 




 <속도>는 속도를 우리가 상황을 감지하는 척도로 간주한다. 예술감독 김재덕에 의하면, 우리는 공간 안에서 “빠르면 두렵다고 느끼고 보통의 속도는 지겹다고 느끼며 느리면 안주한다.” 이번 공연이 춤과 음악의 줄기와 다름없을 속도라는 보편적 인자에 주목한 것으로 미루어 <속도>는 모던테이블의 행보에서 모종의 변화가 있을 것을 예감케 한다.
 모던테이블의 전작들은 인간적 사연들을 기저에 깔아두었다. 일례로, 수년전 거듭 공연된 <킥>에서 사랑에 차인 사람의 절절한 심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던 순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속도>에서는 사연이 전혀 눈에 띄지 않은 상태에서 말 그대로 속도를 통해 움직임을 재구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여기서 한국무용의 움직임 요소들이 아쟁의 절주(節奏)와 호흡을 함께 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속도에 대응한다. 한국무용을 분해하고 이를 춤으로 재구성하는 의지가 뚜렷한 <속도>는 한국무용 계열의 컨템퍼러리 댄스 작업의 일환으로서 주목된다.




 모던테이블을 이끄는 김재덕은 잘 알려졌듯이, 무대에서 ‘특유의 목청, 흥얼거림, 그리고 심지어는 꽁지머리와 결탁하여 일종의 몬스터로 돌변한다’고 언급된 바 있다. 그 자신의 디엔에이가 곧 춤인 듯해서 관객은 그의 신명에 곧잘 동참할 수 있었다. 이번의 <속도>에서는 감정 노출이 매우 절제되었고 김영길 명인이 연주하는 아쟁의 꿋꿋한 정서와 조화를 이루었다. 흰 바지 저고리의 일곱 남자들은 몸과 소리 간의 정제된 대거리를 화통하게 펼쳤다. <속도>의 속도는 전반적으로 빨랐고 무예적 움직임이 좀 강해 보였다. 한국춤의 웅숭깊은 맛이나 삭은 맛 또는 깊은 호흡의 맛도 구현될 만하겠는데, 컨템퍼러리 댄스의 종 다양성 면에서 <속도>는 새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판단된다.



∎ 최수진 안무 <더 시크릿>

 지난 연말부터 최수진은 김수로 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얼론(Alone)>, <새드니스(Sadness)>, 그리고 이번의 <더 시크릿(The Secret)>(7월 16-19일,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까지 세 공연을 올렸다. 이들 공연은 모두 방송 배틀 프로그램 ‘댄싱9’ 출연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널리 짐작되듯, 이 일련의 작업이 방송에서 거둔 성과를 무대 현장으로 유입해서 춤에 활기를 더할지 주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얼론>을 서울역 RTO에서, <더 시크릿>을 언더스테이지에서 공연한 데서 보다시피 김수로 춤 프로젝트는 춤의 새 구역을 개척하고 있다. 이와 함께 <얼론>의 경우 스탠딩 관객 이동형의 무대를 구성하였고, <더 시크릿>에서는 패션쇼 런웨이를 연상시키는 T자형 무대에서 진행되었다. 춤에 대한 기성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이런 방식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 프로젝트는 테크닉의 장르 구분마저 적극 일탈하고 있다. 이는 ‘댄싱9’에서 경험한 현대무용, 발레, 비보이, 하우스 등 장르 뒤섞임에 크게 힘입은 것으로 판단된다.




 <더 시크릿>은 관객이 손에 쥘 팜플렛을 만들지 않아서 관객은 관련 웹사이트 소개 내용을 참조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관객이 작품을 수용할 여지를 크게 남기는 이점이 있고, 오늘의 대중 취향과도 맞닿아 있다. 누구에게나 꼭 한 가지 비밀은 있다고 서두를 꺼낸 소개문은 “두 여자의 비밀, 비밀을 알려고 하는 남자, 비밀이 된 남자, 비밀의 상처가 된 남자...” 식으로 주로 남녀(간)의 비밀을 말하는데, 무대 출연진은 두 여자(최수진, 정혜민)와 다섯 남자(이선태, 윤전일, 하휘동, 홍성식, 손병현)이다.
 <더 시크릿>의 젊은 두 여자가 어떤 사이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어느 순간, 한 여자는 한 여자의 분신으로도 읽힌다. 갈등할 만한 비밀을 품은 여자를 둘러싼 다섯 남자의 갈등을 춤으로 설정해가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나름의 화두를 연상해내며 그 갈등을 소화해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상상되는 갈등은 오늘의 젊은 남녀 세태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것들, 즉 돈이나 사랑이나 나이 같은 그런 것들일 것이다.




 <더 시크릿>은 여성 출연진들의 고혹적인 움직임과 남성 출연진들의 파워 무브를 주축으로 전개된다. 몸과 움직임에서 출연진들이 저마다 갖춘 강점들이 밀도 높게 표출되는 것은 <얼론>에 이어 이번에도 재확인되었다. 신체 라인과 동력이 최대한 살려지는 몸짓들은 관객을 보다 농밀한 춤 세계로 안내하였다. <더 시크릿>에서 비밀의 실체는 상당 부분 관객이 해석해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이번 공연에선 스토리의 흐름을 잡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다.
 그간 김수로 춤 프로젝트처럼 출연진들의 수월(秀越)한 움직임에 방점을 두는 공연은 권장될 만하되 그 점에 치중할 적의 부작용도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가창력 있는 가수의 노래일지라도 잘 짜여진 가사를 동반할 때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시선으로 스토리 틀을 재정비한다면 이 프로젝트가 순항할 가능성은 배가될 것이다.



∎ 댄스컴퍼니 미르 변지연 안무 <여기 다시 태어나다, 신굿>

 부산의 중견 안무가 변지연의 무용단 미르가 발표한 <여기 다시 태어나다, 신굿>(Born Again Here, 6월 17일,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은 악(樂)과 무(舞)의 새로운 만남을 겨냥하여 신(新)굿이라 부제를 달았다. 사전적 의미로 춤과 노래로써 사람의 운명이 선도(善導)되기를 기원하는 행위가 굿이다. 수많은 춤이 굿과 연접해 있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춤을 함으로써 굿을 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굿은 무당이 주관하며, 무당이 전업 무당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굿과 무당은 예술과 예술인으로 확장된다. <신굿>은 굿을 넓게 포용하는 시각에서 오늘의 악과 무로 새롭게 조성해내었다.
 




 대극장에 스펙터클한 규모로 설정된 <신굿> 무대는 툭 트였고, 대자연을 암시하는 나무 줄기 장치가 내려걸린 가운데 때로는 유명 퍼커셔니스트 최소리의 웅장경쾌한 타악 연주가 박력 있게 펼쳐진다. 음양오행에서는 청적황백흑(靑赤黃白黑) 오방색으로 우주와 삶의 구성과 순환을 풀이한다. 오방색을 토대로 <신굿>은 태초의 존재(청), 강한 생명력(적), 신 내림(황), 신명나는 죽음(백), 생명의 근원-과거와 현재의 이음(흑) 장을 옴니버스 식의 구성으로 펼쳤다.




 <신굿>을 이끄는 위무와 신명은 벽사춤 류의 창작춤, 최소리의 타악, 앉은반의 사물연주 그리고 국악 창으로 형상화된다. 이들 요소가 어우러져 표현되는 정서는 객석에 상당히 역동적으로 전달된 것 같다. 삭임이 강한 변지연의 춤은 현대판 춤 굿을 선도하였고, 박성호는 진폭이 크고 활수한 춤으로 굿판을 뒷받침하였다. 전반적인 흐름면에서, 다섯 개의 장은 그러나 분절되어 있었던 한편 음악 퍼포먼스와 춤 퍼포먼스가 나열되어 있어서 악과 무의 만남이 유기적이지 않은 부분도 눈에 띄었다. 이런 구성의 문제는 향후의 과제로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신굿>은 월드 뮤직 유형의 현대적 감각에 바탕을 두어 전개된 양식과 아울러 그런 양식을 소화해내는 춤을 통해 굿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다지는 바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2015. 08.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