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팩토리 1+1+1 〈살롱 드 팩토리〉
무대 관행을 흔드는 탈서사적 스탠딩
김채현_춤비평가

춤 단체 팩토리 1+1+1은 최근 공연에서 무대와 마주보는 고정 좌석을 싹 치우고 이른바 스탠딩 방식(우리 공연은 자리가 없어요, 일어나서 다 함께 즐겨요!!)으로 <살롱 드 팩토리>를 펼쳤다(국립극장 별오름극장, 9. 29. ~10. 1.). 잘 알듯이 프랑스 등지 서구 옛 귀족과 상류층의 응접실이나 사교장(社交場), 전시회장을 살롱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살롱은 공적이면서도 특정 집단의 사적인 성격이 가미된 그런 사교장이며, 오늘날 클럽은 사교장의 현대적 형태라 하겠다. 살롱 드 팩토리를 굳이 풀이한다면 팩토리 1+1+1의 클럽일 것이고, 공연의 흐름에 비춰 살롱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열린 곳 구실을 한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축배’는 <살롱 드 팩토리>의 주제가로 칠 만하다. 관객들이 입장할 때부터 분위기를 고양시킨 ‘축배’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축배를 들어라 오늘을 위해서, 축배를 들어라 내일 향해서!...” ‘축배’의 분위기가 마냥 축제이지 않았던 것처럼 <살롱 드 팩토리>에는 페이소스나 센티멘털리즘이 간간이 묻어난다. 이 공연의 음향이 전적으로 ‘축배’에 기댄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축배’는 이 공연 흐름에서 주도 동기 같은 축을 이루었다.

<살롱 드 팩토리>는 왜 올려졌을까?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가 존재하는 사회를 여러 감정으로 느끼자는 것이 춤 단체가 소개하는 바이다. 그렇다. 그런 정서가 교차한 현장에서는 출연진과 관객 사이에 울림이 있었고, 관객과 관객 사이에도 울림이 있었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일부 관객의 손을 잡고 친절히 안내하는 한편 사람들이 줄이어 입장하는 사이 제 위치를 잡아 관람 자세를 준비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춤꾼이 몸을 굴려 돌발적으로 시원스럽게 미끄러지는 도입부에서부터 출연자와 관객은 서로 어울리는 순간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배경 음악으로 울리는 ‘축배’의 도움으로 그들은 이미 가상의 축배로 상기되어 있었다.

 

 

 


소개된 대로 <살롱 드 팩토리>에서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의 이미지들이 짧게 이어진다. 불특정의 젊은이들 모인 곳들에서 웬만하면 백수 아닌 백수, 취업 재수생, 비정규직을 먼저 연상해도 어색하지 않은 지금의 세태에서 그러나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어엿한 직장을 다닌다 해도 살기가 팍팍해진 터에 경쟁, 좌절, 슬픔의 대열에 예외가 있을까.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가 보편적인 그들을 향해 <살롱 드 팩토리>는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 올려졌다. <살롱 드 팩토리>에서는 감상거리를 찾기보다 공감에 몰두하는 것이 한결 적절한 태도이다.

 

 

 


가족 갈등, 계층 갈등을 암시하는 짤막한 대사들, 관객을 끌어들여 간단한 움직임으로 함께 어울리는 장면들, 관객과 주고 받는 신상(身上)에 관한 문답들(지금 어디 거주하세요, 올해 몇 살이시죠?)이 종종 삽입되는 이 공연에서 절반 이상의 주재료는 물론 춤꾼들의 역동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센터 플로어에서 행할 만한 집단적 사위들로서 회전, 미끄러지기, 상체 너울대기처럼 움직임 이면의 정서 상태를 관객이 쉽사리 간파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의 순간들을 직면한 관객이 그때마다 움직임 이면의 정서를 밀도 높게 직감하도록 하는 것은 춤의 힘이다. 이런 흐름들 속에서 손영민은 관객을 안고 바닥에 등을 대고 스핀을 도는 방법으로 열정을 고조시켰으며, 김기훈은 하얀색 낮은 상자들을 스무개 남짓 잇댄 손바닥 무대 위에서 우수(憂愁)가 어린 발라드 곡조를 타고선 존 트라볼타의 디스코와 진 켈리의 탭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김기훈 자신의 파워풀한 동력으로 터뜨렸다.

 

 

 


경쟁, 좌절, 슬픔 그리고 이보다는 훨씬 드물게 기쁨, 환희가 교차하는 오늘의 삶은 <살롱 드 팩토리>의 중심 소재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일견 평범해 보일 것 같다. 게다가 얼핏 장난질이나 하는 공연으로 비칠 법하게 작품 구성마저 단순하다. 과연 그럴까.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함에 있어 채택된 <살롱 드 팩토리>의 방법들 즉 양식들은 작품 전반의 축배(혹은 축제) 분위기와 어우러졌고, 공감대의 밀도 면에서 스탠딩 방식에 힘입은 바 컸다. 다시 말해 작품이 축제성을 지향하면서 염두에 둔 스탠딩 방식이 프로시니엄 무대에서의 정면 고정 좌석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무대(춤판)와 객석의 무경계가 유발하는 공연자와 관람자의 뒤섞임이 유효적절하게 활용될 만한 공연으로서 <살롱 드 팩토리>는 당연히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관객에게 강력한 정감을 환기하거나 감정이입을 지향하는 공연에서는 특히 스탠딩 방식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을 <살롱 드 팩토리>에서 확인하게 된다. 거꾸로 평범 단순한 소재일지라도 작품의 궁극적 주제로서 환기되는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의 정서가 명확하면서도 강렬하기 때문에 <살롱 드 팩토리>는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다.

<살롱 드 팩토리>의 살롱은 앞서 언급된 것처럼 클럽과 유사하거나 클럽과 같다. 클럽 문화에 익숙한 세대는 이런 공연을 수용하기에 스스럼없을 것이어서, 이 작품은 극장 문화와 클럽 문화를 융합시킨 결과로 보인다. 따라서 프로시니엄을 절대시하는 관점에서는 <살롱 드 팩토리>의 살롱 분위기를 착상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개 살롱에서도 두서없는 대화들이 건네졌을 테지만, 클럽 역시 그와 유사한 태도를 전제로 할 것 같다. 정장하고 정색해서 대화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살롱이나 클럽은 산발적인 느슨한 대화가 무시로 가능해지는 여유가 있다. 생각건대, 이와 같은 유연성은 이번 공연에서 통일된 전개를 벗어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의 에피소드가 순서를 지어 제시된 것도 아니고 하나의 시퀀스 다음에 어떤 시퀀스가 나오는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딩 관객이 매 순간들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로 즉각 적응할 수 있은 것은 이미 클럽 풍의 유연성을 작품의 구조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살롱 드 팩토리>에서는 ‘서사적 통일성에서 빗나간’ 이미지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되 이면의 주제 정서에 의해 느슨한 구조로 연결되어 나름의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춤 단체 팩토리 1+1+1은 단체 이름부터 묘연하다. 팩토리가 아마도 춤 공장을 뜻하는 데서도 특이함이 감지되기 마련이지만, 이보다는 더욱 1+1+1 부분이 시선을 끈다. 1+1+1가 1+1+1+1+1+1이 될지 말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무한정의 전개를 시사하는 듯한 이런 표현은 지속적인 발생과 유동성에 우월한 가치를 두는 들뢰즈적 시각으로 보면 더욱 흥미를 자아낸다. 팩토리 1+1+1의 주체가 지금의 세 사람에서 언젠가는 백 사람으로 불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만큼 그들은 예측불허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살롱 드 팩토리>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즉 앞에서 들은 그런 장면을 비롯하여 또 특정 관객 앞에서 춤을 선사하는 장면, 관객에 접근해서 일부 사람들을 점지해서 아이들 몸 놀이 하듯 간단하게 어우러지는 여러 장면들, 그리고 바이올리스트가 관객 속에서 연주하고 출연자나 관람자가 악보를 들어 펼쳐서 응대하는 장면, 출연자가 다수 관람자들을 무작위로 점지해서 자기 머리 위로 손들을 모으게 하여 천장을 만들고선 놀이하고 풍선을 두 사람 틈새에 끼워 함께 터뜨리는 장면들... 이러한 이미지들에서 인터액티브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상호작용하는 이미지는 동적인 상황 속의 가변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 이미지는 기존의 그런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반성을 촉발하는 메타 이미지로 해석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얼핏 장난질이나 해대는 공연으로 비칠 법하게 단순해 보이는 작품 구성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그 이미지들은 매우 함축적인 것이다.

 

 

 


<살롱 드 팩토리>에서는 분절된 시퀀스들이 주제 동기를 충족시키는 선에서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다. 직선적 서사가 붕괴된 지점에서 고조되는 유연성은 이미지들을 부유(浮游)하도록 만들고 이미지를 찾아 대기하는 스탠딩 쪽의 정서는 매우 유목적이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면서 관람자들은 이미지들을 나름대로 계열화하고 내면화했을 것이다. 경쟁, 좌절, 슬픔, 기쁨, 환희가 중첩되고 서로 뭉개지는 이 현장을 벗어나면 그들은 다시 현실로 복귀할 테지만 그래도 현장의 여운은 강렬하지 싶다. 게다가 얼마간의 활력마저 얻었다면... 그만큼 이 공연은 시사적(時事的)이다. <살롱 드 팩토리>의 장난, 물론 권할 만한 장난질이다. 장난도 다듬으면 예술이 아니겠는가.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