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성수픽업그룹 & 핀란드 WHS 〈투오넬라의 백조〉
핀란드의 설화와 만난 다매체 시청각적 조합
문애령_춤비평가

 안성수 픽업그룹과 핀란드 WHS 서커스, 그리고 시벨리우스 음악이 만든 <투오넬라의 백조>가 9월 26일 핀란드 초연에 이어 아시아 초연(10월 23-25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을 가졌다. 무대 절반을 채운 음악가들은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 기념공연을 강조하듯 피아노, 타악기, 첼로를 감명 깊게 연주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안무가 중 하나인 안성수는 조화로운 연출력을 과시했고, 핀란드 현대 서커스그룹은 여러 신기한 이미지로 무대를 빛냈다.




 WHS 서커스는 핀란드 헬싱키를 근거지로 활동 중이며, 비디오 아티스트 겸 마술사 칼레 니오, 저글링의 영역을 넓혔다는 빌레 왈로, 그리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 안네 얌사가 공동 창단했다. 이들의 공연에서는 마술을 주요 기교로 사용하고, 비디오 이미지를 활용해 마술을 능가하는 초현실적 상황을 만든다. 그러나 영상보다 춤이 중요한 <투오넬라의 백조> 제작에는 칼레 니오가 빠졌고, 빌레 왈로가 출연을 겸한 연출자로 나섰다. 안네 얌사의 의상과 무대는 이번에도 중요한 파트너십을 발휘했다. 따라서 <투오넬라의 백조>는 시각예술과 현대서커스를 결합한, 협업의 장점을 익히 실천해온 이 단체에 클래식 음악과 춤이라는 새로움을 덧붙인 계기적 작품이다.
 종합적 현대예술로 탄생한 옛 이야기 <투오넬라의 백조>는 핀란드 민속 설화를 다룬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네 개의 전설> 중 세 번째 것의 제목이다. 네 조곡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죽음의 섬 투오넬라 주변을 헤엄치는 신비한 백조 이미지를 그렸다고 한다. 짧은 조곡인 만큼 음악은 시벨리우스의 다른 작품들, 한국음악, 연주자들의 즉흥적 반주까지 수용했다. 줄거리는 전설의 주인공 레민카이넨이 백조를 죽일 임무를 띠고 갔으나 독이 묻은 화살에 맞아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투오넬라로 가 아들의 시신을 주워 모아 다시 살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번 무대는 이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따르지만 그 자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시각적 조형이 용이한 단편적 사건 제시를 통해 줄거리의 맥을 짚어간다.




 막이 오르면, 세로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줄에 걸려 넘어가는 포즈를 보인다. 그 옆으로 백조 모형을 등에 태우고 굴러 이동하는 군무가 등장한다. 목 부분까지만 제작된 이 백조 모형은 여러 이미지를 만드는 주인공이다. 신부의 드레스 형상을 띠거나, 남자의 흰 다리를 몸통 삼거나, 엎드린 남자의 하체 위에 셔츠를 걸치고 올라가거나, 흰 장갑 여러 개와 연결돼 착시현상의 신기함을 보여준다. 작은 보트를 타고 들어온 서커스 전공자 노라 유피와 픽업그룹 단원 양희원의 조심스런 듀엣은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남자가 배 한 쪽을 잡아주면, 장대에 매달린 여자가 왈츠 리듬에 여러 곡예적 포즈를 취한다. 무용과 서커스의 이상적 만남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다.
 부채 역시 중요한 소품이다. 배경 막 앞에 놓인 커다란 장식용은 신비한 공간 연출에 도움을 주고, 흰 부채 하나씩을 든 군무는 꽃모양을 슬쩍 만들며, 커다란 깃털 부채는 예쁜 치마가 되기도 한다. 또한 한 남자의 의상에 두 여자의 다리 하나씩을 넣은 마술쇼는 공중 부양 같은 포즈로 흥미를 돋운다. 영상을 통해 혼령처럼 등장한 첫 장면의 여인 모습까지, 다매체의 성공적 조합이 도드라진다. 긴 붉은 가발을 쓴 여자와 그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는 남자, 드라이어를 총처럼 사용하고, 발레 연습용 바에 올라서서 줄을 타듯 걷고, 바를 이동시키며 광폭하게 움직이고, 잘려진 인체 모형이 날아다니는 난장 연결된다. 두 남녀의 시신이 담긴 보트가 이번에는 관이 되어 재등장한다. 배가 회전하면서 살아난 두 사람, 모두 돌아서 배를 들고 짙은 안개 속으로 퇴장한다.




 핀란드의 전설을 독창적 연출로 묘사한 <투오넬라의 백조>는 이기적인 중심을 지녔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과감한 삭제와 강조로 나타나 구성에 일조한다. 백조, 강, 배를 묘사하는 방식만 보더라도 머리만 있는 인형, 사람들이 모여 구르기, 일인용 보트처럼 구체성을 부여하는 취사선택의 기준이 명확하다. 내용 묘사에서도 연결성보다 은유적 형상을 강조해 마치 서커스나 마술 창작을 위해 시벨리우스의 교향시가 이용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특정 기념공연이라고 해서 각 예술 고유의 매체를 방기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개성을 칭송해야 할 연출 감각이다. 고급진 연주단을 무대에 올린 이유도 어쩌면 그런 감각적 우려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이처럼 단단한 구성 틀을 지닌 WHS 서커스에 끼어든 안성수는 놀랍게도 공동 창작이란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이주희 김지연 김현 등 네 명의 무용 전공자는 강물 역을 하거나 백조의 날개 짓을 대신한다는 부채춤을 추며 스며들었다. 한국 춤사위를 변형한 안성수 특유의 방임적 휘돌리기와 빠른 발동작, 활력 넘치는 몸짓 리듬은 서커스나 마술과는 또 다른 볼거리로 등장했다. 소품이나 리듬에 따라 각각의 느낌을 지니는 안성수의 춤이 이번에는 시벨리우스와 핀란드라는 색다른 음감과 분위기를 반영한 공연 요소가 되었다.
 각 예술이 자신의 개성을 죽이지 않고 조화를 이뤄 보다 큰 완성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원. 융합. 복합 등의 의미를 깨닫게 한 무대다.

2015. 11.
사진제공_예술의전당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