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LDP 정기공연
공포로부터의 지배와 탈피, 그리고 균질한 춤
방희망_춤비평가

 Laboratory Dance Project(이하 LDP)의 제16회 정기공연이 열렸다(3월 11-13일,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이번 정기공연에서는 벨기에의 LOG와 협력한 작품 〈Nerf〉와 안남근의 공식 데뷔작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부제: Swan Lake〉를 선보였다.


 



 LOG를 창단한 Samuel Lefeuvre와 Florencia Demestri의 공동 안무작인 〈Nerf〉는 불어로 ‘신경(神經)’을 뜻한다. 팸플릿에 실린 작품의도를 그대로 옮겨오면 ‘우리가 황무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생기는 두려움이 좀 더 잘 조직된 사회의 소외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갖는다’인데 사실 이 문장이 가독성이 좋지는 않다. 특히 ‘소외된(영어 번역으로 alienated)’이라고 표기된 개념은 공연의 실제 내용을 보고 판단했을 때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류가 탄생하고 진화해 온 역사도 아주 짧은 축에 속한다지만, 새롭고 낯선 환경이 주어질 때마다 거기에 적응하며 생존전략을 모색해온 과정은 실제로는 아주 지난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개념이 부여되기 이전 그러니까 단순한 생명체로서 생존을 터득해온 모습을 그린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은 세포 하나처럼 혹은 벌레처럼 쉴 새 없이 흐느적거리거나 꼬물거리며 모여서 군집을 형성하기도 하고 그렇게 모인 채로 이동하면서 겨우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굉음과 함께 무대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들어오면서 그들의 안정은 깨지기 시작한다. 집단에서 한 명씩 떨어져 나와(나중에는 듀오-트리오로 발전한다) 춤을 추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혼란을 뜻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반작용이 된다. 특히 여성 무용수 한 명이 독립하여 나머지에 맞서 ‘시선’을 던지는 장면은 인간이 ‘개성’을 자각하는 최초의 순간을 그리는 듯 했다.
 이어 집단이 몰려와 그녀를 에워쌌고, 태엽 감는 소리 속 획일화된 군무는 집단주의라던가 인간의 기계화까지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양손을 옆 사람의 신체에 얹거나 잡아 자발적으로 서로를 촘촘히 얽어 덩어리를 만들고 모두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는 것으로 마무리한 마지막 장면은 휴머니티로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억이나 신경과 같은 미시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을 무용수들의 신체와 움직임을 통해 가시화하는 작업은 언어 전달이 불필요하게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장르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굳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무용수들의 기술이 현상을 모사하는 데 낭비되기 쉬워 본전을 찾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지적인 접근일 수는 있으나, 매력적인 주제로 변모되기 쉽지 않다.
 이번 작품은 각종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 기술된 것처럼 ‘종교, 테러 등 사회적인 이슈로 인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움직임’까지 건너다 볼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본다.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 자체가 목적인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무언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던 것인지 어정쩡했다. 작품과 한 발짝 떨어져(어쩌면 마치 안무가는 인간이 아닌 듯한 입장에 서서) 냉정하게 관찰하고 묘사하겠다는 기조가 주제의식을 토출하는데 소극적이 되도록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색의 단순한 의상, 텅 빈 무대를 통해 신체와 움직임에 최대한 집중하도록 배려한 절제된 연출과 (이를테면) 하등 생물부터 고차원적 존재의 움직임까지 한계 없이 표현해낼 수 있는 LDP 단원들의 균질한 실력이 깔끔한 그림을 완성했다.


 



 전복적인 한 방은 안남근의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부제: Swan Lake〉가 선사했다. 이 작품에서 안남근은 고전 발레 영역의 다양한 버전들뿐만 아니라 매튜 본의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압축적으로 복기하면서 동시에 해체 작업에 들어간다. 남녀 주인공을 아름답고 늠름하게 그리도록 확립된 전통을 부수고, 역할에 대해 일관된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배역에 해당하는 무용수를 장면마다 바꾸거나 아예 삭제시키는 등 선과 악의 대응구도가 의미 없게 하였다.
 첫 장면부터 지크프리트와 로트바르트는 이미지와 행위가 교차되어 구별이 쉽지 않다. 암전 속에서 등불을 들고 옷장에 갇혀 퍼덕이는 여자와 약에 취해 늘어진 남자를 비춘 이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일견 ‘왕자’ 지크프리트일 거라는 착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가 환각파티를 조종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누레예프나 그리가로비치 버전에서 볼 수 있었던, 지크프리트의 의식을 조종하는 자로서의 로트바르트가 더 과감하게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무대의 컨셉트는 ‘닥터’ 로트바르트가 조종하고 지배하는 실험실 내지 정신병원이다. 마츠 에크는 진작에 〈지젤〉의 2막을 정신병동으로 연출했었는데, 숨 막힐 듯 아찔하고 고결한 순백의 이미지가 조금만 뒤집으면 ‘언덕 위의 하얀 집’과 연결되는 것은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지 새롭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작품들에서 백조는 ‘정상’인 인간과 대비되는, 저주에 갇힌 ‘비정상’적인 존재였으나 여기서는 약에 취해 늘어진 지크프리트나 태엽인형 같은 오데트보다 건강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입장이 상반된다.
 매튜 본의 경우에 네 마리 백조춤은 건장한 성인 남성의 육체미를 돋보이게 하는데 머물렀다면 여기서는 똑같이 남성무용수를 쓰면서도 무릎을 꿇게 하여 키를 낮춘 상태에서 락킹, 팝핀 등을 구사하도록 해 보다 젊고 유쾌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기존 발레에서 흑조가 관객을 유혹하며 마성의 기교를 뽐내던 장면의 음악을, 강압복을 입은 오데트가 사지를 묶인 채 질질 끌려 다니는 장면에 사용함으로써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10월 안성수 픽업그룹 × 핀란드 WHS의 〈투오넬라의 백조〉에서 손을 구부려 백조의 머리를 만드는 동작들이 평범한 수준에 머물러 아쉬웠던 차에 이번 LDP 공연에서 기발하고 시원스럽게 구현되어 만족하였다.


 



 한편 초반의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작년 SPAF에서 선보인 피핑 탐의 〈À Louer〉를 연상시키는 바도 있었다. (1부 〈Neuf〉를 안무한 사무엘 르프브르가 피핑 탐의 단원이었고, 작년 내한공연의 리허설디렉터 겸 조안무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이미지들을 강박적으로 채웠어도 딱히 감성적인 접점을 찾기 힘들었던 〈아 루에〉보다 빈틈은 많지만 비틀어야 할 포인트를 몇 개라도 딱딱 짚어낸 이 작품이 한결 흥미로웠다. 다만,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거나 목을 졸라 살해하는 등의 장면은 영화 등에서 워낙 흔해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데, 기존의 성(性)적 역할 부여에 머물거나 오히려 후퇴한 것 같아 보기 불편한 부분이었다. 현실을 풍자하기 위함이었다면 연출을 좀 더 세심하게 고려하였으면 좋겠다.
 LDP의 제 16회 공연이 펼쳐지던 기간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로 세간이 떠들썩했다. 13일의 7시 마지막 공연은 이세돌의 신승으로 희비가 엇갈린 직후기도 했다. 리뷰를 위해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모두 관람한 평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작품을 대하는 기분에도 다소 변화가 생겼다. 공포에 지배당할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외양은 다르나 같은 맥락을 지닌 LDP의 두 작품을 보면서 역사적 사건이 주는 충격을 나름대로 완화시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2016. 0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