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21)
한영숙 춤예술의 생성미학적 의미지평을 찾아서
채희완_춤비평가

1.
한영숙 선생은 삼일 혁명이 일어나던 이듬해에 태어나시고 88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 이듬해에 돌아가시었습니다
 70년 세월, 선생이 사시던 때는 그 3분의 1이 넘어 일제강점기였고 그후 해방, 동란, 혁명을 거쳐 경제근대화와 정치민주화투쟁이 한참인 때인데. 남북분단 시기는 해방 이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의 강압통치와 함께 다가온 한국의 근대 시기는 민족의 자주 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동족상잔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겪으면서 쏟아지는 외래문물 속에 남북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경제근대화와 정치민주화는 민족적이고도 시대적인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던 거지요.
 이러한 때 한 사람의 예술가가 어떻게 삶과 예술로써 시대와 사회와 민족을 마주했는가가 그의 예술사적 위상과 평가의 규준점이 될 터입니다. 모든 예술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개인활동의 소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하고, 또 동시에 그 산물을 수용하고 자기화하는 향수자의 사회적 공감권 아래 유통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요. 이 시대, 이 사회, 이 공동체가 요청하는 바에 어떻게 공감하고 어떻게 실천했는가가 탄생 백년을 맞아 한영숙 선생(1920.10.18.~1989.10.7.)을 기리는 일에 첫 담론 주제가 될 것입니다.
 한영숙 선생은 열 네 살때인 1933년에 엄격하고도 자상한 할아버지 한성준선생(1984.6.12.~1941.9.3.)의 지극 정성 아래 춤의 첫 디딤새를 디딘 후 열 여덟살인 1937년 부민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첫 발표회를 승무, 태평무, 살풀이로 실어 올렸습니다. 1941년 4월 조선예술진흥을 위해 〈모던〉일본사에서 설정한 조선예술상 수상자로 한성준선생이 받고나서 축하회 자리에서 손녀 한영숙 양의 후원회가 결성된 것은 한 예술가의 사회화에 든든한 배경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가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크게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곧이어 할어버지가 세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이어받아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재기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1941년부터는 만주지역과 일본의 동포들을 찾아 순업 공연을 하고 전국의 순회공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영숙 선생 춤 활동의 초창기에 할아버지 한성준선생은 그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고, 손녀 한영숙은 조부이자 스승인 그의 춤관과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을 받아 실행하는 전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한영숙 선생의 춤의 역사적 위상과 예술활동의 기여를 가늠하고 평가하는 데는 한성준 선생의 춤이념과 춤활동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2.
“사람이 태어나면서 춤이 있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춤 아닌 것이 없다. 일동작이 장단을 타면 곧 춤이다.”
 한성준 선생이 일제 때 어느 신문기자와 대담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춤의 일상화와 일의 거룩함을 일깨우는 한성준 선생의 이런 춤이념은 춤이야말로 빈부격차, 신분격차를 막론하고 일하는 이라면 누구나 출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춤추는 이는 거룩한 일을 하는 것임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삼라만상이 춤의 활동을 부추기고 생겨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일을 극진히 율동적으로 하면 그게 인간활동의 본연이고 근원적 생명력의 기화(활동상)인 것이지요. 이는 연면히 내려온 조선춤의 정신을 체득한 바였습니다.
 춤꾼에 대한 지독한 사회적 천대와 비예술이라고 멸시하는 사회적 여건을 뚫고 조선춤의 강인한 인본정신(천지인 3재사상)과 “사람이 한울”이라는 동학정신을 펼치는데 더할 나위없이 몸을 던진 것입니다.
 그가 확보하고 개척한 각종각양의 조선춤의 원형과 100여 가지도 넘는 창작춤의 개방성은 우리춤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봉건사회 해체기에서 근세로, 이에서 다시 일제통치 아래의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와 함께 삶과 예술활동를 펼쳐 근대춤 형성의 산모이자 태두인 바가 되셨습니다.
 같은 시기 근대춤의 또 한 갈래인 이른바 신무용의 적지않은 소스가 되기도 하고, 또 이를 일면 수용하면서도 비판하기도 하셨는데, 그러한 앞선 이의 너그러운 판별력은 그럴수록 조선 인민의 일춤, 각종 직업인 춤을 개발하고 창안해내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춤역사에서 근대성 갖게하는 한 지표입니다.
 그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우리춤 언어를 광범위하고 수집하고 갈고 닦아 집대성하고 체계화 시키는 일과 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이 한글로 언어생활을 하듯이, 이를 위해 일제때 주시경 선생이나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비견되는 것으로, 움직임 언어의 모국어화를 위해 민족적 시대적 사명에 부름 받아 실행하였습니다.
 이 일의 동반자이자 선두 실행자 또한 한영숙 선생이 아닐 수 없는 바이지요. 스러져가는 조선춤언어를 찾고 가꾸고 다듬는 일은 그것으로 통용하여 사회소통력을 근원적으로 확보하는 시대적 민족적 과제의 실행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3.
“사람이 태어나면서 춤이 있었다“는 말은 한국근대춤 기초를 마련한 한성준 선생의 장엄선언입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성경 유한복음), “태초에 율려가 있었다”(강증산)는 말에 비견됩니다. 이는 춤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되면서, 한편 춤이 생겨나는 원초적 생성력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춤의 생성론적 접근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춤이고 춤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 삶의 동작에 장단을 맞춘다면 그게 모두 훌륭한 춤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때 장단을 맞춘다는 것은 율동성을 불어넣어 ‘놀이’로 바꾸어 생명의 리듬을 타게 하는 ‘신기’를 담지케 하는 겁니다. 곧 춤은 일놀이굿입니다. 일하는 게 거룩해지는 것이 춤입니다. 일에 노동성과 유희성과 거룩함이 더하여 삶의 궁극형태가 됩니다.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삶을 알리요.”(그노스도 교의 잠언)
 이는 어쩌면 동학에서 말하는 혼연지일기(混然之一氣)가 실제 현실에서 작동된 것이라고도 보겠습니다.
 이로부터 춤에 대한 생성론적 물음은 다시 시작합니다.
 춤을 추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춤은 일상동작의 유형화이고 한 단계 고양된 삶인 것.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의 길을 알리요”
 춤은 삶의 자기정위, 삶의 근원자리의 활동상(活動相)이고, ‘생명력의 자기분출’일 뿐.
 여기서 춤에 대한 생성론적 접근이 이루어집니다.
 “생성은 존재의 어머니이다. 존재가 생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생성이 존재를 낳는다, 유기적 개체와 존재자와 세계를 낳는다. 삼라만상을 낳고 활동케 하는 비유기적인 잠재적 전일체로서 생명을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보편적 생성이란 잠재적 다양체인 생명의 현실화운동이라고 합니다. 잠재적 바탕, 그 보이지 않는 질서에서 나오는 발생적 에너지가 끊임없이 변화, 진화, 감화하는 생명의 활동상에서 춤의 접화군생(接化群生)적 의미를 도출해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생명의 세계를 찾아나선 이의 궁리진성(窮理盡性), 고무진신(鼓舞盡神)의 태도와 활동상을 통해서 춤의 생성론은 생성되고. 우리는 그것을 바로 한성준 춤활동에서 그 한 실마리를 찾아나서 보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드러나지 않은 질서’에 대한 탐구가 생성론이라면, 근원생명의 활동상인 보이는 춤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생명질서를 궁리하면서 한국춤의 생성론으로써 스스로 고무진신해 보는 것이다.“라고 문제의식을 세웁니다.


4.
이제는 한영숙선생의 예술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 춤, 한영숙 살풀이춤.” 이 말은 한영숙춤을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관찰하고 감득하고 향유한 빼어난 춤감식자(구히서)의 발언입니다. 이 말에서 한영숙 춤예술에 대한 생성론적 의미지평을 찾아나가서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한영숙선생의 예인 정신이기도 합니다.


5.
이제 한영숙 선생의 춤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일로서 조선춤 언어 확보와 개척 과제가 있습니다. 이는 한영숙춤의 생성론적 접근의 첫 과제이어야 당연했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춤 활동의 산실인 한성준선생의 활동에서부터 찾아올라가는 데서 출발합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한 바이지만 우리춤언어의 확보와 확장문제입니다.
 우리춤언어 생활의 원활한 소통과 함께 앞날을 밝게 열어놓는 언어생활의 토대구축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우리춤이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인 1935년에 한성준선생은 당시 전통춤을 집대성하여 첫무대 공연을 올리셨습니다. 나이 예순 둘이셨고, 춤종목이 20여 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춤의 백미로 꼽히는 승무와 살풀이도 이때 무대공연물로 첫선을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후 한성준선생님이 추신 춤종목은 전통춤이 40여가지, 창작춤이 100여가지로 제목이 문자로 알려진 것만 해도 예순 가지가 넘습니다.
 선생님은 춤에서 음악장단이 나왔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리듬의 원천이 몸움직임이라는 것이지요. 몸짓말이 율동을 낳는다는 것은 우리춤언어의 바탕이 무한한 생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려서 어릿광대놀음과 줄타기와 춤을 익혀서 장단의 명인으로 명고수가 되었고, 명고수와 피리명인으로 명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체득하고 섭렵하고 익힌 종목은 무속가무악을 비롯하여 예인, 재인청 가무악, 놀량패 가무악, 기방 가무악, 판소리 창극 민요 등의 노래춤, 풍물, 탈춤, 불교의례춤 등 실로 당시 한국 전래춤의 전종목에 이른다 하여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의 춤언어는 전통사회 춤언어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야말로 풍성하고 다양한 언어구사입니다. 선생님은 이를 집대성하고 하나하나 무대작품으로 창작해내신 것입니다. 소재와 주제의 광활함도 이에 따른 결과입니다. 지금은 승무, 살풀이, 학무, 태평무로 압축 선택되고 있을 뿐 선생님의 풍요롭고 다양한 춤언어활동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춤 활동하는 분들이 무슨 말을 쓰고 있는가. 문학자가 훈민정음 이래의 우리말을 잘 쓰고 있듯이, 한국에서 춤 활동하는 분들이 이 땅에서 잘 소통될 수 있는 친근하고 아름답고 또렷한 우리춤의 언어를 써야하지 않겠는가, 한성준 선생의 춤을 생각할 때마다 이에 무엇보다 먼저 깊은 뜻을 되새기게 됩니다.
 선생님은 음악의 장단마저도 춤에서 나온 것으로 보시면서, ‘3천뼈마디의 춤’이라든지 ‘춤은 노동의 연장’이라든지 하셨지요. 학춤만 보더라도 비록 궁중학춤에서 틀을 잡았지만 새로운 학춤을 위하여 학을 실제로 방안에까지 들여놓고 그 생태를 면밀하게 관찰하셨다지 않습니까. 하늘과 사람에 대한 공경심만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공경심이 그 춤의 토대를 이루고있다고 봅니다. 천한 노릇을 하는 자로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간절하게 우리춤의 바탕을 지키시고 근대춤언어로 새로이 갈고 닦아 전통춤을 근대예술세계로 이행, 정립해 놓은 것이지요.

우리춤언어로 춤을 추고, 서로 서로와 잘 소통하고, 나아가 우리춤언어를 공경하는 계기가 되길 한영숙선생 탄생 백주년행사를 맞아 축원합니다.
 

(한영숙 선생 탄생 백주년 기념 춤축전 “ 한영숙 춤, 역사와 창조” 학술행사 〈여는 글〉)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 ​ ​ ​ ​ ​​ ​ ​ 

2020. 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