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주정민ㆍ조희경 홍은예술창작센터 공연
일상에 놀이가 쏟아질 때
김채현_춤비평가

홍은예술창작센터(이하 홍은센터)의 ‘시즌 2 춤, 열다’ 가운데 주정민과 조희경은 그곳의 옥외 공간을 무대로 춤을 펼쳤다(10월 22~23일 저녁). 서울 북서지역 주택가에 위치한 홍은센터는 옛 서부도로교통사업소 건물 내부를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과거 관공서들이 대개 그러했듯 기다란 2층짜리 본관 앞뒤로 마당이 있다. 두 안무가 모두 마당을 옥외 공간으로 활용했으며, 뒷마당에는 높은 옹벽이 둘러쳐 있고 그 위로는 소형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일상의 전환과 일상의 유지
- 주정민 안무작 ‘블랙’

주정민 안무작 ‘블랙’이 앵글을 들이댄 것은 불통(不通)의 현상이었다. 공연 전부터 뒷마당에 준비된 작은 상차림에 감, 엿장수 가위, 쌀, 돈, 붓, 과자, 떡, 실타래, 꽃, 담배, 옷가지(슈트)가 널려져 있어, 돌상을 연상시켰으면서도 꽃이나 담배, 옷가지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삶을 기원 예언하는 돌상에 함께 올린 꽃이나 담배, 옷가지는 삶의 다른 면을 암시한다. 한편, 가위를 여아 돌상에만 올린다는 관습에 비춰보면 혹시 이 작품은 여성의 그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공연 내내 두 여성 연기자는 각자 내면을 드러내는 데 몰두할 뿐 서로간의 교환도 없었으므로 표면상의 갈등도 없었다.

작품 ‘블랙’은 반장화 구두와 일상복을 착용한 춤꾼이 바닥과 옹벽에 분필로 알듯 모를 듯한 낙서를 갈겨대는 데서 시작하여 수도 호스로 옹벽에다 물을 갈기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 사이에 비틀대기, 바닥에 드러눕기, 엿장수 가위 놀리기, 외마디 소리 지름과 같은 의도된 동작들이 종종 등장하고 탈의(脫衣)와 착의(着衣) 행위, 오체투지(五體投地) 같은 동작도 쓰였다.

‘블랙’에서 인상적인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기교 측면보다 작품의 의미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순간들이라는 뜻이다. 먼저 앞부분에서 상차림에 놓인 엿장수 가위 두 자루를 치켜들고 춤꾼은 허공을 휘저어나갔다. 점점 고조되는 가위 휘젓기는 팔에서의 움직임을 넘어 온몸 휘젓기로 이어지고 마침내 공중제비 도는 듯한 움직임으로 증폭되었다. 또 공연 중반쯤에 장갑을 끼고 땅바닥에 손을 대어 미끄러지면서 멀리서부터 꽤 오랜 시간 걸려 춤공간으로 들어오는 동작은 무릎과 이마를 땅바닥에 대지 않았을 뿐 오체투지(五體投地)를 방불케 하였다.

여자 아이의 손재주가 많기를 염원하는 것의 상징인 엿장수 가위를 활용한 움직임 부분 그리고 무한한 겸손과 무한한 신앙심을 상징하는 오체투지는 ‘블랙’에서 원래의 상징성을 넘어 보다 폭넓게 해석된다. 이 부분들에서는 불통의 삶을 감내하는 처지가 강하면서도 명료하게 드러나며, ‘블랙’의 부제로 내세워진 ‘순환의 막힘’은 이렇게 공감 있게 처리되었다.

돌상차림 같은 것이 어떤 제의성(祭儀性)을 의도했는지는 불투명할지라도, ‘블랙’에서는 광의의 제의성이 감지된다. ‘블랙’의 두 사람은 멈칫 멈칫, 수그림, 실신, 배회와 같은 대개는 상심(傷心)을 나타내는 일상 동작들을 매우 자주 표현하였다. 더 결정적으로는, 봉사처럼 허공을 더듬거리며 삶을 축원해야 할 돌상에 이르러서는 앞의 가위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나 돌상에 얹힌 옷가지로 옷을 바꿔 입어야 하는 것, 어느 모로 보나 등장인물들의 삶은 돌상을 받을 때나 그후에나 그다지 행복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아 보인다. 게다가 돌상에 놓인 유리 수반에 처박혔다 치켜든 얼굴은 이미 검게 염색되었고, 또 다른 춤꾼이 상의를 벗고서 속옷 차림으로 날뛰며 어깨와 얼굴을 손으로 쳐댈 적마다 검정 손도장이 난무하였다. 작품 말미에 한 춤꾼이 통곡의 벽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옹벽을 향해 망연히 있을 동안 다른 춤꾼이 호스로 옹벽에다 물을 갈기는 것은 일종의 씻김 제의(祭儀)로 수용된다.

‘블랙’에서 검정은 상식적인 검정색 관념과 유사하다. 부정적 이미지로서 검정색에서는 막힘, 폭력, 위축 등이 떠올려질 만하다. 말하자면 작품 ‘블랙’에서 두 춤꾼은 일상의 어두운 삶의 기억, 특히 여성들이 마음으로 느낄 기억을 제시하였다. 일상의 공간이 춤 공간으로 전화되는 속에서 일상의 동작과 색채 이미지가 일상과 흡사한 의미를 유지함으로써 ‘블랙’은 일관된 설득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처럼 ‘블랙’의 미덕은 무엇보다 이 같은 합리적 일관성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고, 이는 관객이 함께 공감대를 갖도록 한 주요 장치였다.

  

놀이 심리 일깨우기
- 조희경 안무작 ‘관계/경계’

조희경의 이번 공연은 자신의 ‘몸-자연 프로젝트’의 세 번째 연작으로서 ‘관계/경계’라 명명되었다. 공연을 시작하면서 조희경은 설명하기를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관계 그리고 환경과 몸의 관계를 찾는 데 이번 공연의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실제 공연은 홍은센터 본관 앞뒤 마당, 그리고 본관 복도와 옥상으로 이동하며 펼쳐져 그 같은 주안점이 어떻게 실현될지 호기심부터 불러일으켰다.

‘관계/경계’는 홍은센터 앞마당에 승용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진입하고 두 춤꾼이 내리면서 시작한다. 두 남녀는 마당의 벤치에 앉아 몸을 밀착시켜 잠시 포옹하며 엉키고 쓰러지는 것으로 관계를 제시한다. 그들은 이미 옷 속에 스펀지나 천 같은 것을 쑤셔 넣어 몸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켰고 그리하여 배와 다리는 기형적으로 부풀려져 자연스런 모습을 의도적으로 벗어났다. 이어 두 남녀는 좁은 앞마당을 매우 빠르게 뛰어다니면서 오가다가 뒷마당으로 이동한다. 그들이 이동하면 관람자들도 함께 이동하는 것은 이 공연 내내 기본 구조였다. 뒷마당에 이르기 전에 이동을 멈추고 두 춤꾼은 둘러싼 관람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시선을 맞추는 과정이 이어진다. 괜한 눈 맞춤은 잠깐의 어색함을 뒤로 하고 출연자와 관람자가 곧 친숙해지는 유별난 비일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잠시 후 뒷마당으로 이동한다. 뒷마당에서 본관 2층 유리창에서 얼굴을 살짝 보이는 사람과 여성 춤꾼이 마치 발코니의 줄리엣과 로미오처럼 그러나 정형화된 식으로 전해지는(구시대의?) ‘줄리엣과 로미오’와는 아주 다르게 둘은 멀거니 무덤덤하게 쳐다보기를 반복한다. 교교한 소리 같은 것이 짧게 여러 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관람자들의 시선은 그 두 사람은 물론 주변의 옹벽과 그 위의 아파트 등 이리저리 주변 공간을 향하였다.

이후 꽤 기다란 뒷마당에서 여러 춤꾼들이 등장해서 갑자기 질주하기, 현관 처마 지붕 올라가기, 건물 배관 타고 내리기, 대형 쓰레기 수거 박스 속으로 잠입하기, 옹벽 차기, 그리고 옹벽에 등을 붙여 몸을 기울이거나 물구나무서기, 바닥에 매복하기 같은 집단 동작을 펼쳤다. 그런 후에 춤꾼 집단은 잔디밭에 이르러 거기서도 드러누워야 할 유혹에 응했으며, 이어 한 춤꾼이 랜턴을 들고 어둠을 밝히며 본관 안으로 들어가 중국 노래를 부르면서 계단을 올라가서 옥상으로 관람자들을 인도한다. 칠흑 같이 어두운 옥상에서 한 춤꾼은 드러누워 이내 그 상태로 있었고 다른 춤꾼들은 더러 낮은 옥상 난간에 올라 불빛으로 식별되는 도시 모습들에 시선을 주고선 잔잔히 사라졌다.

‘관계/경계’에서 스토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져야 할 것이었다.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만든다와 동의어로 쓰여 무방하다. 관객이 만드는 그런 것. ‘관계/경계’에서는 물론 관객 참여형의 공연이 기본으로 전제하는 관객 반응이 핵심이어서 출연진들은 반응을 유도하는 촉매제이며, 그래도 이 촉매제 없이 반응은 생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관객들은 어떤 반응(어떤 관계)을 느낌으로 가져갔을까. ‘관계/경계’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관계, 환경과 몸의 관계, 본관 앞뒤 마당과 건물 사이의 이런저런 관계, 춤꾼들과 관람자들 간의 관계 더욱이 음향과 춤꾼들의 관계, 심지어 스탠딩 관람자들 사이의 관계를 모두 소재로 하므로 소재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다. 그 순간 관람자에 따라 경험에 차이가 날 것은 당연하며, 관람자들이 어떤 울림을 간직했을지 상당히 유동적이고 다의적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울림들이 극단적으로 상반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이번 공연은 홍은센터 공간에다 일테면 잔잔한 파동을 물들이는 비일상적 방식으로 그만큼 일정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전에 엑스 니일로 단체가 거리춤 ‘날봐’를 서울 문래동과 일산 호수공원에서 공연했던 적이 있다. ‘관계/경계’의 잔잔한 분위기는 일테면 거칠며 거센 움직임이 주도한 ‘날봐’가 보는 맛과 느껴지는 의미에서 서로 불균형을 이룬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관계/경계’에서 다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뒷마당의 여러 순간들인 것 같다. 그 부분의 소개를 반복하자면 급한 질주, 현관 처마 지붕 올라타기, 건물 배관 타고 내리기, 대형 쓰레기 수거 박스 속 잠입, 옹벽 차기, 그리고 옹벽에 등을 붙인 채 몸을 기울이거나 물구나무서기, 바닥 매복 같은 모습들을 아마도 관람자들도 도심의 좁은 뒷골목에서 간혹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음직하다. ‘관계/경계’는 흔한 뒷마당을 놀이 공간으로 치환시켜 우리들 관람자의 놀이 심리를 자극한 것이 분명하고, 심지어는 실험해보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옥상에서의 드러눕기나 배회는 자신에로의 침잠 아니면 도심 공간 속에서의 소멸, 혹은 관계/경계로 해석될 수 있을까.

(* 전재: 홍은창작센터 리뷰, 2012. 1.)

2012.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