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젊은 안무가 서상재·권효원·심현주의 신작
서로 다른, 강인한 춤의 서정
권옥희_춤비평가

 7월, 쉽게 피할 수 있는 더위가 아니었다. 더위의 한가운데를 가른 세 명의 젊은 안무가의 작품을 관람했다. 그동안 묵묵히 혼자 작업을 해왔거나(권효원), 무용수로 무대에서 빛났던 이들이 이제 막 자신의 이야기를(서상재,심현주) 하기 시작한 작품은 산만하게 해체되는가 하면, 평범한 서술도 상식적 해석도 거부한 작품이었다. 이들을 주목한 이유이다.



 서상재의 〈블루마블〉 (7월 17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블루마블〉, ‘푸른 구슬’. 지구를 이르는 말. 낮은 구릉을 연상케 하는 무대 바닥. 바닥에서부터 뒷막까지 두꺼운 비닐이 무대를 덮고 있다. 다른 공간인 듯, 로만셰이드 커튼처럼 비닐이 말려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무대바닥, 낮은 비닐 구릉이 만들어내는 황폐한 공간. 어떤 존재(무용수), 일어나서 뒤편에 쳐진 비닐 막을 잡아 뜯어낸다. 마치 죽음을 걷어내듯. 더 낮아진 비닐의 구릉. 무대작업을 하듯 일상복을 입은 두 명의 스탭이 대형선풍기를 들고 들어와 비닐 한 쪽 끝을 잡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가로로 누운 길고 큰 비닐 원통으로 무대(소극장)가 가득 찬다. 부풀려진 원통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또 다른 존재(서상재). 팔과 다리로 비닐풍선을 밀어올리고 잡아당기고, 어깨에 짊어진다.


 



 ‘블루마블’ 어느 공간에 위치한 ‘화이트마블’. 공간, 공기, 살아남았다. ‘블루마블’과 ‘화이트마블’이란 적대관계와 협력관계. 대등한 두 힘의 긴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화이트 마블’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살아남은 자의 현실이 있다. ‘화이트 마블’ 밖 저쪽은 자유의 공간이다. 갇혀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등으로 비닐 안의 공기를 떠받쳐본다. 예상치 못한 에너지에 비틀. 손으로 전투하듯 잡아 뜯는다. 공기층에 구멍이 난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공기. 쉽게 가라앉지도 꺼지지도 않는다. 서로 맞서는 두 힘이 소강상태에 이를 때까지 춤의 선율은 사라지고, 두 힘의 균형에 자주 위기가 오면서 무대는 지리멸렬과 변화무쌍을 오간다. 어느 순간 ‘화이트마블’에서 벗어나는 존재.
 다음 장. 뛰고 구르고 달리는 4명의 남자군무, 맥락도 의미도 없다. 안무자는 ‘블루마블’의 위기를 논하고자 하는 춤의 주제의 크기 못지않게 섬세한 춤 작업과정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그 섬세한 작업이 큰 그림의 완성을 돕는다는 것도.
 마지막, 서상재의 솔로. 안무자(서상재, 30대)는 한국춤 전공자로 이미 단단한 에너지와 아름다운 춤의 선을 가지고 있다. 오늘 무대, 다른 춤을 춘다. 한국춤의 날렵하고 섬세한 선도 호흡도 음악도 없다. 힘이 있으나 힘이 보이지 않는 춤. 말하자면 기어코 살아남은 이의 춤이 아니라 어쩌다 ‘살아남아버린’ 이의 춤. ‘블루마블’의 위기를 춤으로 풀어 보겠노라는 젊은 기상으로 ‘춤의 블루마블’도 꿈꿔볼 일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춤을 추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춤이었다.


 



 춤으로 어떤 것을 희망하고 있다면 그 희망한 춤과 자신의 거리를 메워낼 수 있는 춤을 출 수 있을 때만 자신이 희망한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춤에 초월이 있고, 춤으로 안무자가 춤의 해방을 위한 꿈을 꾸고 있다면 반드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권효원의 〈또 다른 관점〉 (7월29~30일, 대구음악창작소 창작홀)

 벌써 네 번째 개인 공연. 주목을 받든 받지 못하든 지원금을 받든, 못 받든 상관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춤 작업을 끊임없이 하는 안무자. 자신을 춤으로 들여다보는 작업,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런데도 묵묵히 하는 젊은(30대) 안무가가 권효원이다.
 무음, 나란히 서서 추는 6명의(박정아, 권준철, 김수지, 김현선, 김가영, 권효원) 같은 동작.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의 등 뒤로 자신들이 말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뜬다. 다양한 춤의 전공과 이력을 대구 말로, 풀어놓는다. 자신의 인터뷰 영상에 맞춰 춤을 추기도. 춤도 영상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춤을 시작하게 된 평범한 사연들과 전공한 춤 장르로 자신을 규정하고 소개한다. 춤의 전공여부가 자신의 (춤)정체성은 아닐 터. 말로 소개한 자신의 춤 이력과 상관없이 춤을 추고, 그 춤들이란 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이 또한 소통부재다. 소통을 위한 영상과 춤이라면 좀 더 구체적이고 솔직해야 한다.


 



 일테면 다음 장. 남자무용수(권준철)이 여자무용수들이 선 위치, 얼굴표정, 시선 등을 자신의 의도대로 디자인한다. 무용수의 몸에 배터리를 넣듯, 동작을 하고 주문을 건다. 마이크, 권준철이 마이크를 들고 옮겨 다니며 여자무용수에게 준다. 말을 하나,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다른 이야기들을 한다. 여자는 줄넘기를 하고, 권준철은 랩을 하듯 말을 빠르게 쏟아놓는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남이 무슨 말을 하고 있든 나는 그저 뜀뛰기를 하고 줄을 휘두른다. 둘이서 마주보고 번갈아가며 웃는다. 발작적으로 번지는 웃음. 소통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소통이 되지 않게 풀어놓은 좋은 장.
 이어 3명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서 더 많은 것을 읽게 만든 조명. 남자와 여자. 그 위로 뜨는 단어, 흑백의 그림처럼 교차되는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영상이 현대회화 같았던 조명이 감각적이다. 상처를 입고, 상처로 꿈을 꾸는 젊은 안무가. 작은 상처가 뜨고, 몇 줄 건너 큰 상처. 긁혀진 마음은 세상으로 더 다가서기 어려웠을 것. 불구하고 상처 등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근사한 회화처럼 상처는 언젠가 춤으로 위로받을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내가(권효원) 연약하여 그 세계가(춤) 안쓰러운지도 모른다.


 



 마이크를 잡은 김현선, 말을 하다가 급기야 소리를 지르며 외친다. 소리로 변하지 않는 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권효원 자신이 하는 춤 작업이 이런 것은 아닐까 반문하고 있는지도. 이어지는 여자 남자의 느린 움직임. 지루한 반복. 그리고 6명의 춤. 음악에 맞춰 움직이며 호흡을 뱉고, 숨이 차오르게 움직이며 애쓴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있고, 앞으로도 춤을 출 것이라는 안무자의 의지로 보인다. 창작작업이란 것이 무릇 이렇다. 작정하고 보여준 그 의도는 읽혔으나, 더 세심하게 다듬은 결과물을 관객에게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동작의(안무) 정교함이 더 필요하다.
 이어 당연한 것, 자유라는 문장. 안무자가 춤으로 무엇을 기다리는 하염없는 그리움이 넓게 가라앉는다. 권효원의 춤이 주는 울림은 낮고 둔중하다.




 심현주의 〈겨슬好〉 (7월30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겨슬’ 경상도 방언으로 겨울이라는 뜻. 좋을 호好. 작품 속 남녀는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로도, 모자의 관계로도 읽힌다.
 심장이 뛰는 음향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암시. 어둠 속, 손전등의 조명 속에 감지되는 봇짐. 긴박한 상황을 두 개의 손전등으로 잘 풀었다. 봇짐을 진 이들이 짐을 벗고는 팔을 뻗어 서로 손을 잡거나 돌고, 힘을 겨루듯 하는 4명의 춤, 그 가운데를 가르는 남자(김학용)가 누군가와 헤어지는 상황을 그려진다.
 여자무용수가 무대를 가로 지르자 긴 두 가닥의 천이 무대 공간을 둘로 가른다. 분단 상황을 그린 듯. 두 가닥의 끈은 심현주가 걸어 나와 가운데에 이르자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쉽게 읽히나 감각적인 무대는 아니다.
 김학용과 심현주의 듀오. 남녀가 입은 짙은 와인색과 어두운 초록색의 승무복, 모자가 달려있다. 무겁다. 상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춤을 추는 이들의 관계에 집중, 춤이 잘 드러나고 그 춤을 설명해주는 것이 무대의상이다. 이들의 춤은 사랑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상황을 추는 듯도, 아닌 듯도…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호好’. 동일한 상황, 다른 해석을 낳는 ‘호好’의 설정으로 춤은 보는 이의 마음을 따라 흐른다. 아주 멀리 떠나온 듯도, 떠나보내는 듯 하는 사랑의 춤이 펼쳐진다.


 



 안무자(심현주, 40대)는 섬세하고 차분한 춤의 선을 가지고 있다. 춤동작은 한정적이나 호흡을 가둔 뒤 천천히 풀어내는 춤이 인상적이다. 몸의 선이 가는 데 비해 의외로 춤이 단단하다. 이어지는 여자 5명의 군무, 식상하지 않은 춤동작과 그 연결이 자유로운 반면 남자군무, 힘은 있었으나 맥락 없는 연출이었다. 남녀 출연진들의 군무 속에 김학용이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를 헤매지만 여자, 돌아오지 못한다. 마지막에 흐르는 가요 〈애수의 소야곡〉은 시대적 공간을 불러온 장치로 보이나,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위험한 선택.
 무대 한 곁에 영상이 뜨고 여자의 손을 잡은 어린 남자아이의 그림. 이내 어린 남자가 모래처럼 사라지자, 남자도 사라진다.
 6.25 전쟁을 춤으로 푼 것, 식상한 주제이다. 하지만 ‘겨슬’로 얼어붙은 공간을, 좋을 ‘호好’로 사랑을 풀어보겠다는 의도는 어떤 추모로도 읽힌다. 사랑에도 기원이 있으며, 과거와 그 추억이 있다. 벌써 반성되고 해석되어져야 하는. 하여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저 미래로 투사되는 길목에서 사랑을 톺아보겠다는 안무자의 의도가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없다.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춤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익숙한 것은 익숙한 것만 보게 하여 다른 많은 것을 가린다. 봐야할 것마저도. 그것은 필요하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춤의 반복되는 양식은 습관을 부른다. 춤의 나쁜 습관에 매몰되거나 중독되지 말아야 한다.
 이제 막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이들 세 명의 안무가가 받은 춤의 세례는 창작에의 자유와 작품에 따르는 책임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부디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6.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