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무(無)의 관점에서 살펴본 즉흥과 창조의 춤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을 중심으로
손인영_경희대학교 강사

* 본 논문은 대한무용학회논문집 제 72권 1호에 게재된 내용임


Ⅰ. 서론

Ⅱ. 창조의 시원으로서의 무(無)
 1. 노자의 ‘무(無)’와 그 창조성
 2. 무명(無名), 무형(無形)의 도(道)
 3. ‘황홀’의 경지로서의 도(道)

Ⅲ. 무(無)의 관점에서 살펴본 즉흥과 창조의 춤
 1. 창조의 개념과 즉흥춤의 역사적 의의
 2. 진주교방 굿거리춤에 드러난 무(無)의 춤

Ⅳ.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한국 정신사에서 ‘무(無)’의 개념은 문화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예술에서 여백을 중시하는 사상이 그러하고, 백의민족의 백색이 가지는 기호학적 중요함이 그러하다. 혼과 백을 믿는 무속적 삶의 자세와 앞뒤로 트인 전통 가옥의 한산함에도 ‘무(無)’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이렇듯 ‘무(無)’는 다방면에서 한국인의 문화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무(無)’ 개념의 시원을 찾아가면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는 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노자 사상은 도교로 이어지면서 유교와 더불어 동양사상사의 바탕을 이루어 왔다. 노자의 ‘무’사상은 빛나는 신세계를 추구하고 앞으로만 전진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없음’을 통해 ‘있음’을 도드라지게 하는 그의 사상은 물질적 욕망 추구에 몰입되어 있는 이 시대에 대안적인 정신적 가치로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자의 사상은 ‘무(無)’의 빈터에서 생기의 풀무질1을 함으로써 세계의 정신사를 담금질할 것이다.
 노자의 무(無)사상은 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정중동(靜中動)을 추구하는 전통춤에서 ‘정(靜)’의 여백이 없다면 춤은 그 맛을 상실하게 된다. ‘춤’은 몸짓이고 몸짓은 기억의 드러남이다. 기록으로 남아 전래되는 역사적 사실보다 더 깊이 뿌리내려서 길게 이어지는 것이 몸의 기억이다. 태고의 기억은 몸에 은밀히 숨어 있는 가운데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역사의 흔적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의 민속춤에서 나타나는 풍류정신의 자유로움도 열려지고 비워진 무(無)의 즉흥성과 창조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의 즉흥성과 창조성은 예인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에서 여실히 보인다. 여유와 여백이 넉넉한 완자걸음의 저정거림은 새로운 움직임의 즉흥적 탄생을 기대하게 하고 춤과 음악 사이를 엇박으로 노니는 소고춤의 풍류는 보는 이로 하여금 흥을 불러온다. 미분음의 소리를 구사하는 김수악의 구음에서 즉흥성은 절정에 달한다.
 춤이란 것이 정신의 드러남이며 사상과 예술이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용계에서는 동양철학에 대한 논문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들어 춤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도한 논문들이 제출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탐구는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 등에 두루 걸쳐 있는데, 노장사상 쪽에서는 특히 이미영(이미영, 2008, 2012)과 이화진의 논의(이화진, 2010, 2011, 2013)가 주목할 만하다. 이미영은 노장사상의 관점에서 진주교방 굿거리춤과 승무를 고찰하였는데 ‘무위자연’, ‘도’, ‘소요’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화진(이화진, 2010, 2011)은 장자사상에 비추어 병신춤과 범부춤 등을 고찰하는 작업에 이어 노장의 미학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춤의 심미관조(審美觀照)를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하였는데(이화진, 2013), 전자는 장자사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후자는 노장의 도(道)와 무위자연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아직까지 한국 춤에 대한 논의에 있어 춤의 정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노자의 무(無) 사상에 대한 탐구는 없다.
 이제 이 논문에서는 노자의 무(無)사상이 한국 춤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새로운 고찰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 일차적 과제는 노자의 무 사상에 함유돼 있는 창조의 힘과 맥락을 밝히는 것이다. 노자의 무는 ‘무명(無名)’과 ‘무형(無形)’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천지간의 무한한 창조 가능성을 그 안에 배태하고 있다. 노자는 그 창조가 ‘황홀’ 또는 ‘홀황’2의 형태로 구현된다고 하는데, 미학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논문에서는 『노자(老子)』 원전을 직접 검토하고 분석하는 한편 철학 분야의 다양한 논의를 수렴하면서 노자의 무 사상에 깃든 창조 미학을 새롭게 정리할 것이다.
 이어질 논의는 그러한 무 사상의 철학적 특성이 한국춤에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피도록 하겠다. 무의 관점에서 보는 즉흥과 창조의 춤은 한국춤에 광범위하게 내제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김수악류 진주교방 굿거리춤에 집중하여 춤 움직임 자체의 구조와 특질을 분석하는 ‘미시적인 분석’(신상미, 1998, p.227)에 의하여 진행고자 한다.



Ⅱ. 창조의 시원으로서의 무(無)



 1. 노자의 ‘무(無)’와 그 창조성

 노자가 말하는 ‘무(無)’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 ‘무(無)’이다. 노자에게 있어 ‘무(無)’는 ‘유(有)’를 생성하게 하며 만물을 태동하게 하는 가능태로서, 기(氣) 운동을 발생하게 하는 원기(元氣)가 된다. ‘없음’은 ‘있음’의 바탕이며(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노자』, 제40장), 그 바탕은 빈터가 아닌 수많은 ‘있음’을 가능하게 해 주는 창조의 시원이자 수많은 것들의 탄생을 준비하는 생명의 공간이다.
 ‘무(無)’ 개념은 노자로부터 비롯되는 독특한 사유3로 2500년 동안 동양사상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노자의 ‘무(無)’는 ‘도(道)’와 같은 것이고, 그것은 ‘허무(虛無)’가 아니며, 오히려 세상만물의 생성자요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는 우주의 시작이요, 창조적 역동성과 같은 것이다.”(김동원, 1996, p.147) 결국, ‘무(無)’라는 허공에서 수많은 것들이 해체되어 나오게 되니, 이것은 바로 창조4의 샘이며 생성을 가능하게 한 천하의 어머니(可以爲天下母. 『노자』, 제25장)인 것이다. 허허로운 하늘의 공간도, 비어있는 방의 빈 공간도, 텅 빈 찻잔 속도, 수레바퀴의 구멍도 다 그 나름의 기능을 위하여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빈 공간은 빈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 열려있는 생기의 공간이다 “가득 찬 것은 비어 있는 듯하나 아무리 써도 끝이 없다.”(大盈若沖, 其用不窮. 『노자』, 제55장) 이것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한 경계의 지점이며 있음과 없음의 사이이다. 이러한 무와 유의 경계에서 창조가 이루어진다. 노자가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나 피리와 같다! 텅 비어서 막혀있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내 놓는다”(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노자』, 제5장)고 한 것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무(無)에서부터 유(有) 즉, ‘천(天)’과 ‘지(地)’가 생기고 그 둘이 아래와 위로 나누어지니 그 사이에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 “빈 허공이 빈 허공으로 생각되는 까닭은 그것이 천·지를 나눈 ‘사이’이기 때문이다. 천지의 대대법적인 상관적 차이는 무명이라는 빈 허공의 무가 그 사이에 끼어 있기에 가능하다.”(김형효, 2004, p.42) 이 허라는 바탕은 일종의 공간을 형성하며 그 공간의 ‘중묘지문(衆妙之門)’5을 통하여 만물의 생성이 이루어진다. 결국 이 근원적 ‘무(無)’에서 비롯된 천지 개념으로부터 동양 사상의 시원을 이루는 태극과 음양사상 등이 나오는 것이다.6
 이러한 ‘무’개념은 ‘사고하는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이며 인식론적인 사유의 근거가 되었다.7 “무(無)는 ‘창조’의 시원이며 인간사고, 즉 없음과 있음이라는 차별과 차이를 구별하는 인식의 근거를 만들어 주는 사유의 시초가 된 것이다.”(김충렬, 2004, p.141) 이름이 없던 본원 존재인 ‘무(無)’ 즉, 고요하고 텅 비었으나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무(無)’를 노자는 ‘도(道)’라고 명명하자고 했다.

도(道)는 무언가 뒤섞여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었구나! 홀로 서서 바꾸지 않고, 두루 행하지만 위태롭지 않으므로, 가히 천하의 어미가 된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자(字)를 붙여 도(道)라고 한다.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 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노자』, 제25장)


 ‘도(道)’라고 이름을 붙이고 난 다음부터 ‘무(無)’는 한정되고 고정화된 우리의 ‘의식’으로 대상을 구별 짓고 명칭을 부여하면서 만물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만든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이름이 바로 ‘도’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천지만물이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무’의 개념을 우리의 사유 속에 포함시키고 이를 ‘도’라고 명명하게 되자 도는 무와 같은 신비주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도(道)는 이제 ‘인식불가’라는 신비주의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윽한’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것은 ‘유’만을 대상으로 하여 사유하던 습관이나 인식 능력에서 본다면 그윽한 이 도(道)는 분명 불가지, 무명, 불가도, 불가명한 것으로 비쳐져서 이름이 없는 이 ‘無-道’라는 것은 마치 불가사의한 어떤 것이라고 그려질 수 있으나 사실, 이 무(無)는 ‘창조’의 시원이며 인간사고, 즉 없음과 있음이라는 차별과 차이를 구별하는 인식의 근거를 만들어 주는 사유의 시초가 된 것이다.(김충렬, 2004, p.141)

 ‘도(道)’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것과 저것의 같음과 다름을 분별하는 ‘의식’이 명확해진 것이다. 결국 이름을 붙이고 붙이지 않는 것은 의식의 유무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으로, ‘있음’이라는 존재의 형(形)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 형(形)에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명과 무형은 노자의 ‘무(無)’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제 절을 달리하여 이 ‘무명과 무형의 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무명(無名), 무형(無形)의 도(道)


 『노자』 제1장은 도론 전체의 주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가장 먼저 이름이 없다는 내용부터 시작한다. 이는 이름이 있고 없는 문제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로 시작하는 노자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자.

도(道)8를 말로 표현하면 그 도는 늘 그러한 도(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이 비롯되고, 이름 있는 것에서 만물이 태어났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노자』, 제1장)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일종의 ‘있음’을 확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동적인 어떤 것에 인위적으로 속성과 질서를 부여하고 유형화시켜 인간의 사유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이는 위치 지움과 차이 지움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행위이다. “이름은 곧 질서이다. 그리고 체계이며 특정한 내용을 담은 규정이며 정의이다. 그것은 정지이고 닫힘이며 배타적이자 불변적이다. 축적이자 방향이고 강제이며 남성적이다. 직선적 발전이며 힘이며 꽉 채움이며 역사이다.”(최진석, 2001, p.303)
 결국 ‘없음’은 열려진 것이고 포용하면서 끝없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방향이 없이 열려진 것이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이며 빈 허공이다. 이렇게 형태 지어지지 않고 뭐라고 명명하지 않는 열린 상태의 흐름은 마치 물이나 기처럼 온갖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시시때때로 새로운 형을 만든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는 흐름이고 즉흥적 변화이며 무한대로 생성되는 다형이기에 이름을 지을 수가 없다.
 “무명(無名)이란 시원적 자연 상태인 동시에 ‘만물’로 명명되는 온갖 분별적 존재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김일도, 2009, p.26) 이것이 노자가 말한 바,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으며 텅 빈 기로써 조화를 이룬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中氣以爲和. 『노자』, 제42장)고 하는 말의 의미가 된다. 노자는 또한 무명의 도(道)를 “음유하고 조용히 반본(返本)하는 비합리적인 혼돈”(노재옥 편저, 1989, p.18)의 상태라고 해서 ‘무형’이라고 한다.
 무형의 도에 대해 『노자』는 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뭐라고 따져 물을 수 없으므로 섞여서(混) 하나를 이룬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이어지고 이어지지만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 다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니, 이를 일러 모양 없는 모양이라고 하고, 사물 없는 형상이라고 하며, 이를 ‘황홀’이라고 한다. 그것을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가더라도 그 뒤를 볼 수가 없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修(噭)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노자』, 제14장)

 앞도 없고 뒤도 없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즉 감각적으로 분별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으로 사물 없는 형상을 ‘도’라고 하였다. ‘본다’는 것은 ‘있다/없다’를 인식하는 중요한 행위다. 다시 말해 “도는 차별적 한정적 인식방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근원의 세계이므로 감각작용을 통하여 표상화 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자유 작용을 통하여 추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닌 것”(김일도, 2009, p.33)이다. 그러나 ‘도’가 허무는 아니라고 한다. 조민환은 도(道)는 절대적 허무는 아니며 상, 물, 정을 포함하고 있는 진실한 존재로 설명하면서 도가 무색, 무성, 무형의 미분화된 일종의 심미적 시공 연속태라고 하였다. 즉 ‘도’는 인간의 감각 작용으로 표상할 수는 없지만 진실한 존재인 것이다. (조민환, 1997)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억지로 붙인 ‘도’는 ‘모양 없는 모양’이며 어리벙벙한 상태라고 하여 ‘황홀’ 또는 ‘홀황’이라고 하였다. ‘도(道)’의 형태적 속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단어가 바로 ‘황홀’이다. 이제 이 ‘황홀’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3. ‘황홀’의 경지로서의 도(道)


 ‘황홀’의 경지에는 생기의 에너지가 넘친다. ‘무’는 이러한 ‘황홀’함에서 비롯된다. ‘도’ 또한 황홀하다.

‘도’는 ‘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 속에 만상이 있고 만물이 있으며, 또한 신비로운 생명의 에너지가 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근원인 ‘도’, 즉 ‘무’는 삼라만상의 생성의 에너지요, 그의 영원한 활동의 ‘장’이다. 그러므로 황홀하다. 창조의 생명은 황홀하다. 그리고 이 황홀함 속에 존재가 있다. 생성이 있다. (김동원, 1996, p.159)

 ‘창조’는 황홀하다고 하였다. ‘황홀’은 생성의 에너지요 존재의 시원이다. 이러한 황홀한 도는 무색, 무성, 무형의 미분화된 것으로 우리의 감각기관으로는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미분화된 도에 대해 장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얼굴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구멍이 없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없다는 것인데 감각기관이 없으면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눈이 있어 사물을 구별할 수 있고, 또 귀는 소리를 구별하고, 코는 냄새를, 입은 맛을 구별한다. 구별한다는 것은 인식작용을 말하며 인식작용은 감각을 통하여 사물을 구별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의식 작용이라고 하며, 의식이 작용함으로 말미암아 아(我)라는 집착은 시비하고 분별을 한다. (노승만, 2000, p.32, 재인용)

 장자에 따르면, 인간의 7개의 구멍은 인간의 ‘아(我)’를 강하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 구멍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원적 혼돈의 경지로 돌아가야 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며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지점에 머무름으로써 구별 지움의 인식을 버려야지만 미분화되고 감각기관이 없는 황홀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의 세계이며 무의 드러남이다. ‘황홀’한 상태는 무지(無知)라기보다는 근원적 관조의 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일종의 ‘초월’ 상태인 것이다. 김일도는 이런 무분별 상태를 “일종의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서 의식의 고도의 정적 상태에서 주어지는 내적 직관에 의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무(無)대상의 대상”(김일도, 2009, p.33)으로 바라본다. 이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직관’이라는 개념이다.
 ‘직관’이란 대상에 대해 인과관계를 따지는 추론적 사고를 넘어서서 대상을 직접적으로 감지하는 인식 행위이다. 직관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감성적이다. 즉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모종의 방식으로 촉발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노자는 인위적이고 분별적이며 현상적인 인식보다 본연의 직관을 중시하고, 그러한 순수하고 중립적인 직관을 통해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도의 형체를 온전히 느끼고 체화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이런 유무와 모호함에 대한 성찰 자체는 인식 지평의 확대인 것이다.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한 도(道), 즉 황홀한 도는 시비를 가리는 인식능력이 없으며, 직관과 관계하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는 모호함을 가진다. 도는 “배타적 본질을 가지고 실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없는 것이고, 그것이 세계의 존재 형식이나 운행 원칙으로 모든 것의 존재와 운동에 관여하는 기능을 한다는 의미에서는 ‘있다’.”(최진석, 2001, p.193) 이것은 일종의 ‘초월’한 경지이며 이 초월한 경지에서 만물이 ‘스스로’ 창조된다.9
 창조는 직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며 나선적이다. ‘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파와 같은 것이며, 나선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경계에 앉아서 넋을 놓고 휴식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언제라도 창조를 향한 즉흥적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고 서있는 가능태이다.
 즉흥은 창조, 즉 ‘유’를 생성하게 하는 운동성향을 지닌다. 『노자』 제 2장에서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의미를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아주고 있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없음이 있고 없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있음이 있으나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생하여 주는 근원이 된다고 설명한다. 결국 ‘유무상생’은 창조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10
 ‘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도’를 언급하였으며, 무명이면서 무형인 ‘도’를 이해하기 위해 ‘황홀’이란 개념을 도출하였다. 황홀한 경지는 감각기관도 인식능력도 없는 애매모호한 알 수 없는 ‘무’의 상태로 일종의 ‘초월’에 해당하는 경지이다. ‘무’는 모든 것의 존재와 운동에 관여하는 생기이며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창조는 직관적이며 나선적이고 즉흥적이다. 춤은 이렇게 즉흥과 창조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III. 무(無)의 관점에서 본 즉흥과 창조의 춤

 



 1. 창조의 개념과 즉흥춤의 역사적 의의

 1) 창조의 개념정리

 즉흥은 창조의 바로미터이다. 노자가 말하는 즉흥과 창조는 ‘황홀’한 경지에서 발생되는 일종의 생기의 기가 촉발된 것이며 유무의 나선적 운동 속에서 드러나며 전파와 같이 직관적이며 초월적인 것이다. 노자의 창조관에는 신이나 주재자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창조개념에는 신이 중심에 있다.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것은 전제가 없는 창조인 탓에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적인 영역의 것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전통에서 창조는 고대나 중세에 이르기까지 크게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즉 “고대 이래 창조성은 신성한 힘에 의한 개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창의적인 인간은 영감으로 채워진 빈 용기로 여겨졌다. 플라톤에게 시인은 뮤즈가 지시하는 것을 받아 적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김현남, 2008, p.42) 따라서 오늘날의 예술적 창조 개념은 서양 근대의 낭만주의 발생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양 근대의 낭만주의에서는 특히 예술을 중심으로 창조의 문제가 강조되었고 신적인 위치에 대응할 독특한 인간으로서 ‘천재’가 대두되기에 이른다. 즉 “예술적 행위는 과거에 신들만이 하는 작업이라고 여겨졌지만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행하는 작업으로 바뀌었다.”(박미영, 오율자, p.76) 결국, 현대 예술적 천재의 출현은 인간의 ‘독창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는 "18세기 중반부터 모방미학이 점차 약화되고 ‘독창성’이라는 새로운 미적 가치가 중요하게 부각된 것“임을 보여준다.(오희숙, 2010, p.78) 그런데 이런 서양의 창조 경시 흐름에 대해 가장 내재적인 비판을 행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니체일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창조는 ‘천재’개념과 통한다. 즉 “그의 미학은 합리성으로 굳어진 전통미학을 붕괴시킴으로써 힘으로 충만한 생동하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강영계, 2000, p.19)
 니체의 경우만 하더라도 서양의 전통미학을 합리성으로 굳어진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낭만주의 이전의 서양의 전통적 맥락 안에서 창조는 신이라는 초월자를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대두된 낭만주의에서는 신에 대응하는 천재 개념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동양적 맥락의 창조 개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심지어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나의 몸, 나의 신체’라고 해서 몸의 주체인 ‘나’는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장정윤, 2009, p.314) 서양철학의 창조 개념에 인간 중심을 배재하고는 논의의 진행이 되지 않는다. 결국 동아시아의 전통 미학에서 서양적 의미의 초월적 신 개념과 낭만주의적 의미의 천재 개념과 실존주의 철학의 실존인 ‘나’는 부재한다.
 이것은 신 개념과 ‘나’라는 주체와 인간중심을 철저히 배제하는 노자의 사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노자의 창조적 생기는 자연의 기의 흐름으로부터 비롯된다. ‘황홀’이라는 신비주의적인 내적흥분에 의해 촉발되는 동양적 사고의 창조는 도의 현현이며 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맥락을 전제로 무의 관점에서 즉흥과 창조의 춤인 한국춤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춤의 특징인 즉흥성의 배경

 한국춤의 특징을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즉흥성11과 자연성이다. 심지어 민속춤에서 즉흥성과 자연성에 위배되는 춤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즉흥성을 논하게 되면 ‘풍류’와 ‘신명’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에서 풍류의 역사는 유구하며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려면 한국 기층문화를 형성하는 사상사의 근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12 풍류는 일종의 신명으로 한국춤을 추거나 볼 때 ‘신이 난다’ 또는 ‘신명이 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추는 사람의 신명으로 인해서 보는 사람도 같이 신명이 나게 하는 춤이 바로 제대로 된 한국춤이라고 말한다.(최미연, 2008, p.156) 오늘날 전통춤과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3수 분화는 즉흥춤이 한국춤의 특징이 되는 근거를 밝히는데 중요한 논제이므로 그 간단한 역사적 근거를 밝혀보도록 하겠다.
 한국춤에 유불도를 비롯한 샤머니즘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 문화의 근간을 형성하는 문화원형으로서 2수 분화와 3수 분화적인 유형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이는 한국 전통문화의 특징이며 역사적 흐름 속에 내재된 문화적 혼용이다. 2수 분화와 3수 분화의 유형구분은 사회학자인 우실하에 의해 제기된 논의인데, 그는 동아시아의 문화 원류를 크게 2수 분화의 유형과 3수 분화의 유형으로 구분했다.
 그가 제시하는 3수 분화 유형은 북방 샤머니즘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이는 이후 삼재론(三才論), 삼신사상(三神思想), 신선 도가사상, 풍류도 등으로 분화된다. 이 유형은 ‘초월적, 탈세간적, 영적 세계 중시’란 특징을 갖는다. 반면 2수 분화의 유형은 음양론, 역사상, 선진유학, 성리학으로 분화된다. 이 유형의 특징은 ‘현세적, 합리적, 인간 중심적’이란 특징을 보인다.13 우실하는 이런 구분을 전제로 해서 동양예술미학을 대체로 유가의 미학과 도가의 미학으로 구분한다.(우실하, 1998b, p.256) 그는 유가미학과 도가미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유가미학(儒家美學)은 5음과 12율의 질서정연한 짜임새를 통하여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도(道)를 드러내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도를 괘상(卦象)으로 드러내는 『주역』(周易)은 유가에서 가장 존중되는 경전(經傳)이다. 필자는 유가의 미학을 ‘역(易)의 미학’이라고 부른다.(우실하, 1998b, p.256)

그러나 도가(道家)의 입장에서 볼 때, 5음과 12율을 배당하는 유가의 음악관은 너무도 타율적(他律的)이고, 인위적(人爲的)이며, 도덕적(道德的)으로 본인다. 그래서 이들은 자율적(自律的)이고, 무위적(無爲的)이며, 심미적(審美的)인 미학을 발전시켜 간다.(우실하, 1998b, p.257)

 그 특징에서 분명한 차이가나는 유가미학과 도가미학은 각각 2수 분화와 3수 분화라는 문화 원형의 특징이 명료하게 발현된 미학적 특징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14 이런 양자의 차이를 전제로 하면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3수 분화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15 진주교방 굿거리춤의 평사위, 휘영청사위, 소고놀이의 3박의 엇박이나 굿거리음악 등에서 보이는 특징들은 ‘초월적, 탈세간적, 영적 세계 중시’를 특징으로 하는 3수 분화 유형의 미학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주교방 굿거리춤에는 삼재론(三才論), 삼신사상(三神思想), 신선 도가사상, 풍류도 등과 같은 3수 분화 유형에 속하는 문화적 요소들이 일정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6
 진주교방 굿거리뿐만이 아니라 한국춤 대부분이 3수 분화적 즉흥성을 담보하고 있으나 논의의 효율성을 위하여 한국춤 일반을 논의하기보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에 국한하여 무의 즉흥성과 창조성을 논의하도록 하겠다.



 2. 진주교방 굿거리춤에 드러난 무(無)의 춤


 1) 무명·무형의 ‘황홀’한 춤

 춤의 있어 무명과 무형은 단순히 이름이 없거나 형태가 없다는 의미로서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피상적으로 노자의 무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춤이란 것이 태생적으로 무명과 무형이지만, 노자가 말하는 무명과 무형의 의미에는 무의 개념, 즉 이름 없음 속에 담겨있는 ‘명’과 ‘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강한 부정을 통하여 긍정을 추구하는 노자의 사상에는 ‘없다’는 의미는 ‘있음’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이다. 결국 무명과 무형이란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탄생되기 직전의 내적흥분과 생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기의 기는 무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명과 형이 있고 없고는 춤의 유형을 규정짓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춤’의 ‘이름 없음’으로 인해 춤은 더욱 많은 다양성과 창조적 탄생을 담보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들 들어 발레의 정형화된 포지션은 이름을 지음으로써 더 이상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무형의 춤을 형태화시켜 순서를 기억하는 것 또한 다양성과 변화무쌍한 춤의 태생적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춤은 죽어 있는 물체가 아니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에 형을 규정지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진주교방 굿거리춤의 움직임은 잠시도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춘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움직임을 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정중동(靜中動)의 ‘중(中)’은 멈춤이 아니라 정과 동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머무름이다. 노자의 사상은 관계성의 철학이다. 명도 없고 형도 없으며 흐름이고 변화이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은 특정의 형(形)에 얽매이지 않고 물 흐르듯 정중동의 움직임을 이어가는 진주교방 굿거리춤의 속성과 많이 닮아 있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이 펼쳐내는,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 구름 같기도 하고 눈송이 같기도 한 춤의 미감은 노자가 설명하는 ‘황홀’의 경지이다. 기로 가득 찬 우주의 진공상태에서 추는 것과 같은 진주교방 굿거리춤의 춤사위는 바람에 따라 허공에 흔들리는 풍선이나 물 위에 떠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상승과 하강17’이나 ‘긴장과 이완18’처럼 이분법적인 춤이 아니라 정과 동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가는 대대적인 춤이다. 이것은 열려진 상태에서의 머무름이며 끊임없이 부유하는 에너지의 유동성이다.
 황홀한 경지에서 내적 충동에 의해 소고춤을 추는 김수악19의 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즉흥춤이다. 춤을 추는 동안 공간을 살피거나 시간을 체크하거나 움직임의 구성을 생각할 틈이 없다. 음악의 흐름에 몸을 얹고 ‘갈까 말까’하며 저정 거리다 ‘에라 가자’하고 즉흥적으로 소고를 두드리는 예인 김수악의 춤은 잊혀져가는 우리 전통의 가치 그 자체이다.
 오늘날 한국 전통춤에 순서를 규정하고 움직임에 이름을 거론하는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제고해 보아야 한다. 한국춤의 즉흥성은 무엇보다 뛰어난 한국춤의 가치이며 특징이다. 춤에 움직임을 규정하고 즉흥을 배제시킨 것은 역사적 굴곡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행해야 했던 ‘인간문화제’ 제도의 병폐라고 본다. 근대를 건너오는 질곡의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우리 것에 대한 보호가 오히려 또 다른 폐해를 불러온 것이다.
 한국 전통춤의 즉흥성은 3수 분화의 풍류사상으로부터 연유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미이다. ‘흥’으로부터 촉발되는 춤의 즉흥성은 무명무형의 황홀한 경지로부터 시작되는 노자사상의 직관성이며 초월성이다. 춤의 순서와 이름을 규정지으려는 우리의 정형화된 사고를 버리고 한국춤이 가진 원래의 창조성에 접근하려는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2) 즉흥과 직관의 춤

 즉흥춤은 무의식으로부터 촉발되는 것으로 그 시작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그 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도(道)를 설명한 노자의 그것과도 같다. “그것(도)을 맞이하여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따라가더라도 그 뒤를 볼 수가 없다.”(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노자』, 제14장) 그것은 느닷없이 드러나고 직관적으로 파고들고 스며든 기와 같은 것이며 물과 같은 것이다. 즉흥성은 긴장된 의식의 드러남이 아닌 풍류와 놀이의 한 유형이며 어떻게 튈지 모르는 전파처럼 산발적이며 직관적인 그 무엇이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의 소고놀이에서 앉아서 소고채로 소고와 마룻바닥, 그리고 소고와 소고 태를 번갈아 가면서 치는 즉흥적 리듬은 3박의 엇박 속에서 노니는 넘나듦이다.20 그것은 계획된 어떤 것도 아니고 준비된 춤의 길도 아니다. 그것은 느닷없음이며 직관적 즉흥이다. 그 놀랄만한 장단의 쪼갬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앞도 모르고 그 뒤도 모른다.
 장단과 장단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노닐면서 소고를 치다가 다시 꽹과리를 잡는 예인 김수악은 강하고 약한 에너지의 가감과 크고 낮은 소리의 강약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소리의 울림을 조절한다. 수치로 따지거나 저울에 달아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 아닌, 무의식적이며 직관적인 방식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간다. 춤과 음악은 흐름이다. 더 강하게 덜 강하게라고 하는 애매모호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즉흥적인 힘의 가감이며 그것은 ‘홀황’과 같은 알 수 없는 ‘무(無)’의 상태이다.
 무형의 춤을 추는 김수악의 제자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예인의 즉흥성이다. “선생님께 배우기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다듬어 정형화하시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이 터져 나오는 대로 즉흥 춤을 추니까 저희는 매번 달라지는 춤을 따라해야 하거든요.”(경향신문, 2007년 6월 21일)라는 전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본 연구자 또한 김수악으로 부터 짧은 기간 춤을 배우면서 예인의 즉흥성을 익히 보았다.21 특히 ‘구음’은 그 자체가 즉흥적으로 내는 소리이기에 음과 음 사이를 넘나드는 미묘함에 매료되기도 한다.
 예인 김수악은 다양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소리에 마음이 촉발되면 즉흥적 몸짓은 더 잘 나오게 된다.

춤꾼은 연주자의 즉흥적인 기량의 발휘로 장단에 자극을 받아 흥분된 상태에서 저절로 춤이 나온다. 악사와 춤꾼이 같은 무대 위에서 반주하고 춤추며 거기에 악사의 적절한 추임새는 춤추는 사람의 즉흥적 표현을 돕는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한다.(최영숙, 2012, p.56)

 김수악은 악사와 생기의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서로 대응되는 연주를 한다. 예인과 악사 쌍방 간의 관계성 속에서 춤의 즉흥성은 그 표현이 더 활발해진다. 음악이 리듬을 타면 춤은 그 위에서 출렁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홀황과 같이 감각기관이 있어 시비를 분간하기 애매모호한 순간이며 오로지 행위자인 춤꾼만이 결정할 수 있는 예술의 경지이다. 김수악이 두드리는 장고소리에서 들리는 힘의 가감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천차만별, 그것 또한 즉흥적 소리의 색감이다. 움직임의 형태만 다른 것이 즉흥적 춤의 다름이라고 여기면 잘못이다. 춤이 다르다는 말에는 형태뿐 아니라 질감과 농도의 차이도 포함된다.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즉흥적 창조성은 사실 그녀만의 특성은 아니다. 형(形)을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은 한국 춤의 일반적인 특성이 된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특성적 틀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 보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예술의 특성이 기계적인 형식이 아니라 무한한 즉흥성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정병호, 2004, p.176)

 ‘멈춤’은 형을 확정짓는 것이며 형이 있다는 것은 이미 실체를 규정짓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춤은 정중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흐름형의 춤이다. ‘중(中)’은 멈추어 있지만 촉발을 위한 준비가 된 상태이다. 그것은 음(陰)인 것 같지만 양(陽)으로 변화되기 위한 끌어당김이 있는 도(道)의 양상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기의 곤두섬이며 에너지의 발현이다. 한국춤에는 짓는다거나 저정거린다거나 어깨춤을 춘다든가 하는 좌우로 움직이는 사위들이 많다. 그 동작과 동작의 사이에는 ‘짓음’이 있다. 이것은 마치 달이 기울면 다시 차는 것과 같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음양의 나선작용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이되는 창조의 시원이다. 중묘지문과 같이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창조이다.

 3) 창조와 사이의 춤

 춤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몸짓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호흡이 아닌 움직임에 생기를 넣는 호흡이며 동작의 흐름을 유도하기 위한 숨고르기의 호흡이다. 호흡이 부드러울수록 춤 또한 유연할 것이며 호흡을 깊고 길게 들여 마시게 되면 그 폭발하는 날숨 또한 강한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호흡이 부드러우면 수평적이며 유연하고 온화한 여성적인 춤이 될 것이고, 날숨과 들숨이 가파르고 호흡이 깊고 넓으면 춤은 수직적이며 굴신이 있고 도약이 있는 강렬한 춤이 될 것이다.
 호흡을 달리 표현하면 맺고 푼다고도 한다. 들숨은 맺음이며 날숨은 풂이다. 이애주는 이런 맺고 푸는 관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춤사위의 기본 원리는 맺고 풂의 원리이다. 즉 맺힘은 막힌 것으로 응어리이며 극복되고 풀어야 할 것이며, 풀림은 막힌 것을 해결해주며 극복되는 과정으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이다. 풀림은 풀었다고 해서 그대도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성숙을 위한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맺고 풂의 반복이 한국춤의 각양각색의 춤사위를 만들어 내는 기본원리이고, 이러한 기본원리는 어떤 형태로든 항상 역동적으로 무한히 변화/반복되어 새로운 춤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애주, 2002, p.255)

 들숨은 수직으로 힘을 올린 상태이며 이는 맺음이라고 한다. 날숨은 수평으로 힘을 느슨하게 한 몸짓이며 이는 풀림이라고 한다. 이 맺고 푸는 중간이 사이이다. 이 ‘사이’는 멈춤이 아니다. ‘사이’는 흐름을 반대로 꺾기 위한 머무름이며 되돌아가기 위한 반작용이다. ‘풀림’이 새로운 성숙(맺음)을 위한 도약이듯 창조는 이러한 사이의 반작용의 결과이다. 허의 여유가 없다면 창조의 도약을 위한 힘을 저장하기가 어렵다. 허는 숨고르기이며 풀림이며 수평의 상태이다. 수평과 수직의 교차 속에서 창조의 천은 짜인다. 창조는 음과 양의 대대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날숨과 들숨의 교차 속에서 이루어지며 맺고 푸는 과정에서 움직임은 형태 지워진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에서 휘영청 사위는 오른손을 머리위로 올려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난 뒤 낙엽이 바람에 흘러내리듯 옆으로 팔을 펼침과 동시에 왼손을 어깨쯤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리는 것으로 순차적으로 안쪽을 향하여 손목을 돌려 옆으로 벌리는 사위인데, 이것은 마치 눈송이와 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한손목이 돌려지면 대대적으로 다른 손목이 돌려지는 춤사위이다. 이것은 마치 음양이 서로 대대적으로 순환하는 듯하며 양손의 에너지가 서로 주고받는듯하며, 양손 사이에는 마치 좌우에너지가 물결을 치는 듯하다. 양 물결이 부딪혀서 충돌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순환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사이’가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에서 ‘완자걸이’는 “양발을 교차로 딛어 완자무늬(卍)를 그리듯이 진행이 되는 보법이다.”(최영숙, 2012, p.42) 완자걸이는 멈추어서서 하는 동작이며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몸짓으로 이는 다음 동작을 위한 머무름이다. 이런 완자걸이는 한국 춤의 보법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새로운 동작을 위한 머무름이며 뒤로 물러섬이다. 일종의 밀고 당기는 형식의 완자걸음은 새로운 보법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기의 머뭇거림인 것이다.
 창조는 때로 긴장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놀이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여기서 긴장이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물체의 긴장이 아닌 흥분이며 기대이고 열정이다. 그것은 마치 가위를 벌려 천에 가져다 댄 그 상태, 즉 천을 자르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그 절묘한 경계의 순간이다. 천을 자르게 되면서 원래 있던 천과 잘려진 천은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창조이다. 이러한 창조의 춤은 “형식이 있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풀어내듯 하고, 격식이 허물어진 듯 보이지만,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춤판을 신명으로 채운다.”(이화진, 2013, p.128)
 굿거리춤의 소고춤부분은 노자의 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의 장이다. 음악연주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춤꾼의 즉흥성은 변화된다. 그것은 주어진 춤의 순서를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아닌, 매번 관계 속에서 변화되는 사이의 춤이다. 소고춤의 ‘소고평사위’는 소고 앞뒤치기를 하는 것인데 이런 즉흥적인 춤사위는 악사의 장고리듬에 따라 무한대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정박보다는 엇박을 많이 사용하며 자진모리장단 한 장단에 소고를 몇 번 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악과 악사와의 사이 속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창조’이다.
 이러한 창조의 풀무질은 김수악의 구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김수악이 구음하면 헛간에 서 있던 “도리깨도 춤추게 한다”(남선희, 2010, p.73)고 할 정도로 구음은 악보도 없고 미리 연습한 것도 없이 그냥 흘러나오는 즉흥적인 소리이지만 조직적으로 짜이고 음표로 표기된 음보다 더 흥이 있고 다양하며 창의적이다. ‘사이’의 절묘함을 직감적으로 터득하고 유와 무를 놀이로서 왕래하며 즉흥과 창조를 가감 없이 펼친 김수악은 예술을 통하여 노자의 사상을 내면화한 예인이었다.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열린 춤이며 수평적인 춤이면서 저정거림과 엇박이 공존하는 자연미와 풍류미가 있는 춤이다. 열린 자연의 춤은 오로지 즉흥 속에서 이루어지며 즉흥은 창조의 바로미터이다.




IV. 결론

 

 본 논문은 노자의 ‘무(無)’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즉흥성과 창조성을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노자의 ‘무(無)’ 사상의 철학적 본질과 특성을 무명과 무형인 도의 입장에서 분석하였다. 이어서 즉흥과 창조의 개념과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였고, 예인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러리춤을 미시적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즉흥은 결국 창조의 바로미터이며 즉흥을 통한 무한한 창조는 무의 생기 즉 허의 빈터에서 품어내는 풀무와 같이 천과 지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힘’이란 것을 밝혔다.
 노자의 ‘무(無)’ 사상을 몇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첫째 ‘무’라는 것은 무명이며 무형이고 둘째 혼돈의 상태로 ‘황홀’하며 셋째 생성의 ‘장’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관점을 더 자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명과 무형은 ‘없다’는 ‘무(無)’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다. ‘명(名)’은 차별 지움과 차이 지움이며 의식의 드러남이지만 무명과 무형은 모호함의 대명사이다. 의식의 상태 즉 ‘이름’이 지어지면 확정된 것이기에 더 이상의 창조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무형이기에 수없는 것들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혼돈의 상태로 ‘황홀’한 것이란 어둑하면서 신비로우며 앞도 없고 뒤도 없는, 감각기관으로는 분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것으로 일종의 ‘초월’상태이다. 이것은 음유하고 조용히 반본하며,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고도의 정적이고 열린 마음의 상태이다. 구름 같기도 하고 기체 같기도 한 이것은 우주적 공능의 상태이다.
 셋째, 생성의 ‘장’이란 위의 두 가지의 가치에 생명력을 주는 것으로 이 생기가 있음으로서 무는 빈 것이 아니라 생기로 가득 찬다. 신비로운 기가 내재된 황홀함 속에서 생명의 힘이 가해지면 즉흥적 창조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생명의 힘은 ‘무’, 즉 ‘없음’이라는 노자의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한국 정신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철학개념이다.
 이러한 노자사상의 중요한 개념인 ‘무’사상에서 비롯되는 즉흥과 창조의 춤은 서구에서 논의되는 신과 인간 중심의 창조의 개념과는 다르다. ‘황홀’한 경지에서 자신마저 망각한 상태에서 추어지는 한국의 즉흥춤은 3수 분화로부터 비롯되는 풍류와 신명의 체현이다. 이러한 풍류적 즉흥춤은 예인 김수악의 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양손을 순차적으로 원을 그리면서 흘러내리게 하는 휘영청 사위나 악사와 관객의 관계 속에서 매번 새로운 춤의 창작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가는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무의 즉흥적 드러남이다.
 그녀가 말하는 말 속에서도 노자의 사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춤도 내가 추는 게 아니고 몸이 추도록 해야 합니다.”(경향신문, 2007년 6월 21일) 노자가 말하는 무위이무불위(無爲以無不爲)는 바로 이러한 ‘저절로’ 되는 것을 말하는데, 김수악은 내가 억지로 추는 춤이 아니라 몸이 저절로 추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몸이 저절로 추는 춤은 소고놀이에서 더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김수악과 연주자 사이에는 경계의 긴장감이 상존한다. 경계의 지점에서 창조의 춤은 그 형을 드러내고 사이의 공간 속에서 춤은 변화무쌍해진다. 김수악과 연주자와의 관계 속에서 소고춤은 시시때때로 변하게 된다. 연주가 춤 속을 파고들고 흐름이 서로 어울리고 감흥이 촉발되면 춤은 무한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 즉흥성은 알 수 없는 ‘황홀’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생기의 드러남이다.
 생명의 신비는 무의식의 이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비한 에너지로 가득한 찬 ‘무’의 공간에서 춤은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흐름은 자유로우며 창조는 거침이 없을 것이다. 노자의 무(無)는 부드러움의 미학이며 느림의 철학이고 물러남과 머무름의 정신이다. 이 여유로운 풍류 속에서 훨훨 춤을 추는 예인 김수악의 진주교방 굿거리춤은 한국미의 보고이자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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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는 ‘창조’를 허의 공간에서 풀무질을 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노자』, 제5장)
2. “황이나 홀은 모두 미묘하고 흐릿하여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를 묘사하는 말들이지만, 황은 너무 밝아서 흐릿해진 상태이고 홀은 어둠 속에서 흐릿해진 상태이다.”(최진석, 2001, p.193) 즉 “이 두 형용사 황홀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낱말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달리 표시한 것이다. 둘 다 경계가 모호하여 무엇이라 분명히 분별하기 어려운 그런 선택 불가능한 무분별의 의미를 나타낸 형용사이다.”(김형효, 2004, p.207)
3. “‘무(無)’라는 범주의 발견만으로도 노자는 중국 철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최진석, 2001, p.28) "노자는 무(無)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먼저 ‘무’라는 개념을 제기한 인물이기에 그렇다."(이권, 2008, p.58)
4. 여기서 말하는 창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설과 다른 의미이다. 무에서 유가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의 속성에 유무는 혼성되어 황홀한 경지, 즉 무의 경지처럼 보이나 그 속에서 유가 있는 것이다. 유와 무는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는 일방향의 것이 아니라 유와 무는 나선형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이는 즉 중묘지문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도가 사물로 전개되는 맥락에서는 ‘무’와 ‘유’를 거꾸로 말할 수 없다. ‘유가 무에서 생긴다’는 것은 도의 無名性이 우선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명제다. 그렇다고 해서 ‘무’가 곧 도이거나 본체인 것은 아니다. ‘무’는 ‘유’와 함께 도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무가 아니다.”(이권, 2008. p.78) 결국, 유와 무는 도라는 황홀한 상태에서 끊임없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스스로의 공능적인 작용 속에서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곧 창조이다. 이것은 철학적 의미의 창조이다. 창세기의 그 창조가 아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이다.”(모종삼, 2011, p.123)
5. “‘중묘지문’이란 구절은 유욕과 무욕의 두 도가 서로 차이 속에서 동거하는 오묘한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문의 여닫이처럼 불일이불이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문은 우리가 말한 상관적 차이처럼 유무를 서로 연결시켜 하나로 이어주기도 하고, 또 서로 떼어놓아 분리시키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김형효, 2004, p.36). “왕필은 말하기를, “천문은 천하의 사물이 그로부터 말미암아 나오는 곳이다. 개합은 치와 난의 전환기를 말한다.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여 천하에 언제나 통하므로 천문개합(天門開闔)”이라고 하였다.”(이강수, 2005, p.67)
6. 『노자』에서 나오는 ‘음양’이라는 개념은 “말하자면 아직 역전의 단계까지 발전하지 않았으며, 세상의 모든 대립하는 것을 포괄하는 보편 개념으로 추상화되지 않았다. (……) 여기에서의 음양은 아마도 기후와 관련이 있는 개념인 듯하다. 음양은 신명과 사시(사계절)를 이어주는 개념이며, 사시 이후로는 기후와 관련이 있는 개념만 나온다. 『노자』의 음양은 추상적 범주가 아니라 밝음이나 어두움 정도의 기후와 관련된 개념일 것이다. 사실 체계화된 음양론에 『노자』가 영향을 받았다면 그 흔적이 단지 이 짤막한 구절 하나에만 남아 있을 리 없다.”(김홍경, 2003, p.148)
7. “실체로서 도를 보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생성론이자 본체론이라고 한다면, 인식으로써 도를 보는 것은 인간과 천지만물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신성렬, 2008, p.23)
8. 노자는 음유하고 조용히 반본(返本)하는 비합리적인 혼돈의 무의 상태를 도(道)라고 명명하자고 했다. 결국 무에 이름을 붙인 것이 ‘도’이다.
9. 이와 관련되는 노자 원문은 다음과 같다.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 『노자』, 제21장)
10.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노자』, 제2장)
11. 현대무용에서도 즉흥무는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흥 동작은 안무의 기본이며, 공연감각을 발전시키는 도구이며 신체의 자연스러운 동작을 발견하는 수단이고, 즉흥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윤선, 1994, p. 225) 역사적으로 즉흥무는 스티브 팍스톤의 접촉즉흥무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동양의 아키이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접촉즉흥무는 도가에 연유한 선사상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으므로 노자와의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다.(안신희, 2003, 참조)
12. 김미숙, 2001, 59-93 참조
13. 우실하, 1998a, 참고
14. 물론 2수 분화와 3수 분화 유형 내부 요소들 사이의 습합이나 내부적 요소들 차이에 대해서도 보다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는 다른 지면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15. 장미라, 2009, 참조
16. 2수 분화로 추정되는 ‘정재’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하겠지만, 본 연구자는 정재연구자가 아니기에 짐작되는 선에서 간단히 서술한다. 유교주의가 정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는 “조선 전기의 정재들이 조선 창업의 정당성을 세우고, 왕조 수성의 기원을 담았다.”(김영희, 2011, p.20) 춤 창작의 기본이념이 유교사상이었으므로 춤사위의 구성이나 보법에 있어서 음양과 오행사상에 맞게 춤이 창작되었다. 자기 극기를 통한 인의에 바탕한 정재의 창제는 제도와 법을 공고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는 유교사상에 합당하게 창제되었을 것이다.
17. 미국의 현대 무용가 도로시 험프리는 춤을 ‘낙하와 상승’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음과 양이 서로 교차한다거나 짓는 사위와 같은 부드럽고 유연한 한국의 춤과는 상당히 다르다.
18. 미국의 현대 무용가 마사 그라함은 춤을 ‘긴장과 이완’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또한 근육의 질을 유연하게 하여 표현 가능한 움직임을 할 수 있는 토대는 만들었지만, 부드럽고 유연한 한국춤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19. 김수악(1925~2009)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 서하리에서 김종옥과 유몽길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9세에 진주권번에 입적하여 예술교육이수,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와 1997년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 굿거리춤>으로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 “음악학자 이보형에 의하면 ‘엇’이란 말은 정상에서 벗어나 주박에 엑센트를 주지 않고 부박에 엑센트를 주는 것이다. 엇모리, 엇중모리라고 해서 장단 명칭으로 쓸 때도 있고, 엇부침이라고 해서 부침새로 쓸 때도 있다.”(정병호, 2004, p.170)
21. 진주가 고향인 본 연구자는 어릴 때 진주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진주검무를 배웠으며 진주시의 문화적인 풍토로 인해 춤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진주를 떠난 지 근 십년 만인 1991년에 다시 진주를 찾아가서 김수악선생님에게 1년 정도 춤을 배워서 1992년, 11월 3일에 김수악류로 당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발표회를 하였다. 진주에서 상경한 김수악선생님께서 공연 때 직접 장구반주와 구음을 해주셨다. 춤을 배우러 다니면서 예인 김수악의 정신세계를 직접 체험하게 되어 춤뿐이 아니라 춤의 정신에 대한 많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후 사람의 정신세계가 몸에 어떻게 체화되어 춤으로 펼쳐지게 되는지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 결국 이 논문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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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