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아카이브 플랫폼
안무가에게 ‘관점’을 고민하게 하다
이지현_춤비평가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역사와 기억’이라는 주제 하에 소극장 공간사랑을 아카이빙한 전시 〈결정적 순간들〉과 공간사랑에서 초연을 했던 80년대의 공연들에 대한 아카이빙 공연 〈우회공간〉에서부터이다.
 당시만 해도 낯설던 개념이 2015년 ‘아카이브 플랫폼’에 선정된 쌍방, 서영란, 송주호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새로운 창작방식으로 신선한 공연을 선보인 것에 힘입어 앞으로 탄생할 작품들에 기대를 걸게 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3년째가 되는 올해는 홍성민 작가, 김해주 큐레이터와 함께 나 역시 심사과정에 참여하여 일련의 심사와 강연형식의 Pre Talk, 몇 차례의 시연에 대한 피드백을 참여안무가들과 나누는 과정을 함께하였다.
 그 과정에 동참한 것은 첫째는 관객의 위치만으로써는 제작 의도와 결과로 나타난 작품 간의 괴리 혹은 거리감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고, 둘째로는 과연 아카이브 개념이 우리 동시대춤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방식인지를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참여한 위치가 관객보다는 훨씬 내밀한 과정을 볼 수 있는 위치였지만 국립현대무용단의 구체적인 제작진행과 안무자의 창작진행 상의 디테일한 상황을 알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깝거나 상시적이지 않는 관객과 창작자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이번 과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심사과정에서

 올해 이 프로젝트의 지원자 수는 보다 젊은 안무가들에게 어떤 규제 없이 창작하도록 하는 안무랩과 비교해서 볼 때 반 정도 수준이었다. 이에 대한 요인으로는 아카이브라는 규정이 주는 심리적 부담과 더불어 올해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으로 이미 결정된 상태였기에 대극장 무대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경험이 많은 안무가들이 지원을 했음에도 대부분 탈락한 이유는 아카이브 개념에 대한 취약한 이해 때문이었고, 신선한 젊은 창작자들은 계획서 상의 적용된 아카이브를 무대 위에서 구체화하는데 있어서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아카이브를 먼저 받아들인 시각예술 분야와 인접해 있는 퍼포먼스 활동하고 있는 학과의 출신들이 응모한 점이다. 춤을 베이스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국립현대무용단의 프로젝트에서 포용해내는 것에 대한 적합성이나 우려가 논의되었는데 그 역시 실험성이라는 범주 속에서 검토해야할 문제로 열린 자세를 갖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선정된 3개의 작품은 3월 사업공고 이후 결코 짧지 않고, 허술하지 않은 4개월 이상의 치열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창작과정에서

 아카이브가 공연예술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은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감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창작자가 기록, 보관하여 아카이브 박스를 만드는 방식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창작노트, 일기, 창작과정에서 나오는 수많은 기록물들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아카이브를 다른 창작자와 만나게 함으로써 새로운 접촉, 충돌을 통해 창작의 계기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 접촉은 동시대 예술가들 사이뿐 아니라 역사적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 2016 요코하마 댄스 컬렉션에서 아카이브 전시가 이런 방식을 활용하였는데, 한 예술가의 아카이브 박스를 다른 한 예술가와 무작위로 짝지어 줌으로써 그것의 자극으로 새로운 작품이 형성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다시 아카이빙하여 6팀 정도의 작품을 전시장에서 상연하고 있었다.
 흔히 쓰는 또 하나의 방식은 누군가의 작품을 재연, 소환, 인용하는 방식이다. 퍼포먼스를 퍼포먼스 하는 방식으로 올해 다시 초청된 이민경과 조아오 마틴스의 〈2013 봄의 제전〉이 이 방식을 잘 보여 준다. 1913년 니진스키 안무의 〈봄의 제전〉을 이후 안무한 300명 이상의 작품을 수집하고 선별하여 그 중 몇 작품만을 자신의 작품으로 갖고 들어오는 동시에 ‘봄의 제전’의 원래 의미를 이민경과 조아오가 죽음에 이르는 희생 제의를 현재의 춤으로 퍼포먼스 한 것이다. ‘봄의 제전’에 대한 깊은 연구의 과정이자 결과인 이 작품은 어떤 논문보다 생생한 역사적 기록물에 대한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였다.



 



 이런 착한 방식 외에도 아카이빙된 자료를 의심하는 자유 역시 창작자에게 열려 있다. 이미 자료화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이미 그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시각에 한정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 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누락된 것 뿐 아니라 놓친 것, 지나쳤던 것을 다시 소환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복원이자 새로운 해석으로써의 가치를 갖는다. 다른 시각을 복원하고 재맥락화하는 것에서 우리는 인식의 확대와 자유를 맛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미 ‘아카이빙’은 창작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카이빙을 주제로 한다는 것은 보다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아카이브를 다뤄보라는 제안일 것이다. 아카이브를 선택하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수많은 텍스트를 만나야 하고, 그것들을 분류하고 선택해야하는 일은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내가 아카이브를 우리 안무현실에서 의미 있다고 보는 지점은 바로 현재의 현대무용이 주로 자신에게 갇혀 있는데서 비롯되는 감상적 차원의 동어반복이거나 형식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고민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볼 때 이 한계를 돌파하게 해주는 명약은 역사와 사회로 눈을 돌리고, 거기에 수많은 시각이 있음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과도한 감상 혹은 그것과 동전의 양면인 무색무취의 건조함에 빠진 현대춤이 지적(知的)으로 깨어날 좋은 자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객석의 탄생’

 무대 위에는 상당히 압도적으로 보이는 단으로 만들어진 객석이 3면으로 놓여 있다. 보통 무대 위에 객석을 마련하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나 이렇게 대규모의 객석(200석)이 무대를 차지한 것은 처음 경험한다. 그것도 보통은 무대 위에 의자를 놓을 경우 평면적으로 의자를 열을 맞춰 배열하는 얌전한 방식에 비하면 이번 무대는 관객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느낌을 줄만큼 도발적이고 강력하다.
 무대에 앉아 빈 객석을 바라보니 2층 객석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노상 앉아서 보던 객석의자 간격이 그렇게 좁았던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대중시대의 객석은 그야말로 균질화 되어 있고, 몰개성적인 대중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무대 위의 것을 수동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런 ‘위치의 전복’은 거울효과처럼 관객과 공연자 모두에게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게 하고 뒤바뀐 위치에서 다른 역할을 부여 받은 듯한 착각을 동반하는 새로운 객석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윤정아 안무의 〈동시대의 무용공연 향유자와 실존적 매개거리 관계에 따른...〉의 첫 장면은 뒤바뀐 객석을 다시 한 번 도치시켜 객석을 바라보고 현재의 관객에게는 등을 돌린 채 스튜어디스의 안내행동으로 공연에서 주의할 사항 등을 내레이션과 수화식의 동작을 패러디 하였다. 파일럿의 의상처럼 상하의가 붙은 카키색 일체형 의상은 여민하, 최민, 윤정아 3명의 공연자에게 상당히 공식적인 위상을 부여하였고 잘 정돈된 수화식 동작은 매끈하게 관객의 시선으로 미끄러져 들어 왔다.
 학술논문의 제목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작품은 안무자 자신이 박사과정 논문을 준비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공연으로 차용해 온 것인데, 지난 11년간 국립예술자료원 영상자료와 국립현대무용단의 자료 중에서 공연에서 관객과의 실존거리를 기준으로 4가지의 유형별로 분류하여 전개하였다.
 보기만 하는 관객의 위치(유형 1)에서 언어의 개입을 통한 심리적 거리(유형 2), 객석난입을 통한 물리적 거리 축소(유형 3),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짐(유형 4)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관객 속으로 들어가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었다. 유형 3과 유형 4의 작품들은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오브제를 제공하고 작품 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하거나 관객을 데리고 무대를 내려가 극장의 밖에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것으로 진행되며 작품은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부분은 지난 11년간의 작품을 아카이빙하고 유형화하여 안무자의 시각의 새로운 분류법을 관객에게 경험하게 했다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의 사이사이에 공존되는 유형에 대한 풍자와 은유의 표현들이다.
 유형 1이 시작 되자마자 무용수들의 몸의 곳곳뿐 아니라 입에서조차 지름 3센티 전도의 쇠구슬이 동작의 변화에 따라 굴러 떨어진다. 또 궁정의 예법을 설명한 책을 읽음으로써 객석과 관객을 나누는 프로시니엄 무대에 대한 시대적 풍조를 덧붙임으로써 웃음과 냉소를 자아내게끔 유도한다. 이런 장면은 유형별로 틈틈이 끼어들어 객석 뒤 천정에서 시작된 줄이 객석을 가르고 배드민턴 선수 두 명의 공 사이의 네트처럼 공간을 완전히 이분시키는 것 역시 무언가 ‘끼어듬’을 체험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고, 생 무로 시작되어 온갖 잡동사니들을 릴레이로 던져 결국 무대 한 켠을 난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 역시 유형들에 대한 안무자의 해석이자 풍자로 작품 전체에 적절하게 스며있다.
 대극장 무대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하는 윤정아의 감각이 돋보이고 관객과 상호작용하려는 열망이 꼼꼼히 계산되고 축조된 성실함은 이 작품에서 빛이 났다. 오히려 그와 대조적으로 단순한 유형 분류와 물리적 거리감으로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단순한 설정은 마지막 유형 4의 극장이탈로 물리적 거리를 확장하는 시도까지 했으나 새로운 통찰이나 신선한 지적인 자극은 주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혜진 안무의 〈스커트-올로지〉는 민혜경의 뮤직 비디오로 시작된다. 바로 이어진 장면에서 흰 치마를 입은 머리긴 마른 남자 최규태의 영화 원초적 본능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패러디 되는데 담배를 물고 다시 라이터와 담배를 던지는 행위는 영화 속의 도도함을 재연하였으나 성별과 육체적 느낌은 완전히 전복된 것에 최규태의 무표정이 그 장면을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치마에 대한 고정관념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을 은유하듯이 무대 한켠에서 재봉틀은 계속 돌아가고 치마는 만들어지고 있다. 무대 위 몇 개의 장치들- 선풍기가 들어가 있는 계단과 옷걸이, 기둥 위에 올라가 있는 기와지붕의 한옥 미니어처 그리고 의자-이 번갈아 가며 활용되는 와중에 여자 출연자 노화연과 최규태가 성별에 따른 치마의 개수와 착용 년수 등을 마이크로 알리거나 천 하나로 계속 변형되는 치마 패션쇼를 하면서 점차 고정된(stereotypical) ‘치마’에 대해 계보학적 접근을 한다.
 치마에 대해 뒤집어 보기에 성공한 장면은 ‘손 안대고 치마입기’ 장면인데 기네스북의 항목 중 ‘손 안대고 바지 입기’를 패러디한 장면으로 그 행위에서 나오는 부조리함에서 뿐 아니라 안무자가 전하는 ‘왜 손 안대고 치마입기는 없었을까’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와 닿는 장면이었다.
 이 작품의 미덕은 버지니아 울프와 나혜석의 글을 인용하면서 ‘여성을 치마’로 ‘남성을 상투’로 바꾸어 내레이션 할 때 그것이 얼마나 동의어인지를 느끼게 해준 것이다. 그 느낌은 미군부대에서의 공연실황 영상을 전체적으로 그대로 무대로 가져오면서 더 강한 것으로 대체된다. 그 영상의 초점은 옆이 터진 긴 치마를 입은 가수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미군의 표정이다. 그야말로 남성이 치마 입은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동물성으로 좋아하는 날 것의 느낌은 민망하고 잔인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보인다.
 그 사이 노화연의 옷은 벗겨져 풍성한 흰 팬티만 입은 모습으로 객석을 등지고 손은 허리에 댄 채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스커트-올로지〉는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게 붙들고 역사와 문화, 사회사적인 접근으로 양파의 껍질을 벗겨가며 자신의 시각을 하나씩 획득해 가는 과정이 아카이브를 지금의 자신의 관점에 복속시키는 진지함과 저력으로 묵직한 여운을 주었다.


 



 남동현의 〈사적인 극장〉은 빛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극장역사 속에서의 조명의 변화, 화재, 불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의 불과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연유를 더듬어간다. 물론 그 정체를 밝혀가는 존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미약한 자연적 존재인 남동현 자신이다. 마이크를 착용하고 무대적이지 않은 화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남동현은 차분하고 잔잔하다.
 양쪽에 배치된 두 개의 스크린에 슬라이드로 극장의 화재의 역사와 치마에 불이 옮겨 붙은 발레리나 이야기를 일러스트 기록만으로 이어나면서 무대 위에 쌓여가는 것은 감각적 자극이 사라진 무농약, 무공해 식품과 관습적인 무대와 생경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객석의 위치를 바꿨지만 그래도 3면으로 둘러싸인 그것도 내려다보는 무대이기에 이 생경함은 오랫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가스등을 들고 보일 듯 말 듯 한 모습으로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전하던 남동현이 객석으로 내려가 객석을 또 다른 무대로 활용했을 때 관객의 시야는 시원하게 확장되고 살며시 열려진 1, 2층 객석의 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의 빛은 극장이라는 곳을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였다. 원시인의 모습과 동물 모습을 합판에 그려 넣은 것들이 무대 위에 하나씩 등장하고 무대 가운데 옆으로 누운 남동현의 꿈속인 듯, 환영인 듯 두 개의 스크린에서는 자연과 빛에 대한 불균질한 슬라이드가 굉음 속에서 꽤나 오랜 시간 투사된다.
 과연 이 대극장에서 사적인 시도는 얼마나 가능할까? 전반적으로 대극장을 전복시켜 다른 시야와 공간을 경험하게 이번 무대는 다른 두 작품에 비해 남동현의 ‘사적인 극장’에는 적합지 않았다. 육중한 계단식 객석과 갑자기 넓어 보인 저 너머의 진짜 객석은 남동현의 과장없는 무공해의 목소리와 여리디 여린 몸의 느낌과 대조되어 무지막지한 것으로 대비될 뿐이었다. 미약함과 사적인 감성이 이 거친 극장이라는 곳에서 얼마나 고려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반문이 이 작품의 질문이었다면 그 질문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의 질문, 그렇다면 우리의 사적인 것은 어떻게 보호받고 펼쳐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은 작품 안에서는 수많은 언어 속에서는 발견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미약함이나 잔잔함도 묵직함과 다르지 않게 여운이 긴 것으로 체험되었다.
 무대 위에 오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관객보다는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본 바로는 3명의 안무가가 자신의 알고리즘을 찾아가는 여정이 36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날씨만큼 뜨겁고 끈질겼다는 것이었다. 대극장 안무 경험이 없는 3명의 안무가가 압도적인 부담 앞에서 자신이 처음에 하려고 했던 것을 찾기 위해 포기하거나 절충하지 않고 집요하게 해결식을 만들어가게 한 힘이 대극장 사용의 관습이나, 아무나 대극장 무대를 메울 수 없다는 편견까지 깨지는 즐거움을 덤으로 선사하였다.
 물론 국립현대무용단의 무대를 객석으로 다시 건축하고 〈2013 봄의 제전〉 무대와 선정작 3작품의 객석을 하루 만에 다시 건축하는 기민함과 유연함은 어느 프로젝트보다 관객의 입장에서 만족감을 주는 지점이었고(객석이 불편함을 해결하는 인체공학적인 배려가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그런 전체 제작과정에 대한 조직적인 협력이 이 프로젝트를 돋보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 긍정적인 선례가 우리가 갇혀있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깰 수 있도록 오래 작용했으면 좋겠다.




국립현대무용단의 프로덕션 과정에서

 홍승엽 감독과 안애순 감독을 거치면서 안무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흐름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홍승엽 감독이 신생 단체의 낯섬과 어색함으로 생긴 여러 가지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감당하느라 애쓰면서 기초를 닦았다면, 안애순 감독은 프로덕션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 그것을 낯설어 하는 기존의 분위기와 부딪혀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3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프로젝트별 차별성과 작은 성과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안무가들과 낯선 형식과 흐름들에 대한 낯설음이 가시고 있으니 말이다.
 아직 곳곳에서 호흡이 맞지 않고 미숙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어느 단체보다 자신이 던진 주제와 방식에서는 실험적 행보를, 프로덕션 과정에서는 조직적 협력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가야할 길이 멀지만 긍정적이다.
 그래서 단원을 갖지 않는 체제가 다른 단체와 차별되는 국립현대무용단은 몸집을 더 가볍게 하고 유연하게 하는 방식을 흔들지 않으면서 좀 더 시간을 보내봄직하다. 현대무용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지 50년이 넘어가고 있는 가운데 아직 해외 의존적으로 독립하고 있지 못하는 형식이나 의식이 곳곳에서 보이고 국립으로서 공공성과 향유성을 높여나가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지만 10년도 안된 시간 속에서 문제를 헤집고 가는 모습이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뜬금없는 개각, 그것이 불러일으킬 문광부의 방향 불안정, 무용계 내부의 책임의식 없고 자리 쟁탈본능이 결합하여 예술감독 자리가 능력도 없거나, 이정표도 갖지 않은 자에게 맡겨진다면 모든 게 뒤숭숭해지고 또 하나의 국립단체는 세금을 축내면서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비틀거릴 게 뻔하다. 이제 겨우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새로운 시도나 생산, 국제적 흐름과 소통하는 감각이 유지 연결될 수 있을까? 자리보전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예술 외적인 것에 쏟아 붓고 예술은 전시용으로 하거나 대충하는 예술감독들이 즐비한 세태 속에서 지금 한국현대무용의 역사가 과거로 갈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기로(岐路)’ 인 듯하다.
 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공공재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이다. 

2016. 09.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