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이순열 vs 배정혜
춤 인생 70년 맞이한 춤의 연금술사

무용가 배정혜가 춤 인생 70년을 맞아 기념공연(3월 29-30일, 세종 M시어터)과 함께 70년 춤 여정을 돌아 보는 책 ⌜춤 70 years 배정혜⌟를 출간했다.
배정혜는 국립국악원무용단, 서울시립무용단, 국립무용단 등 국공립 단체의 수장을 맡았고, 리을무용단을 창단 한국 창작춤 작업을 주도했으며, 선화예고에서 후학들을 지도, 무용수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춤인생 70년 기념공연에는 그의 손길을 거친 22개의 작품이 제자들에 의해 추어졌으며, 공연 중간중간에 춤비평가들과의 대화 형식으로 지난 70년을 관객들 앞에서 추억했다. 50여년 한국무용사를 풍미했던 무용가 배정혜를 이순열 <춤웹진> 발행인이 만났다. -편집자 주- 




이순열
(이하 이): 공연을 며칠 앞두고 매우 바쁘실 텐데, 공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요. 이번 공연이 시종 전통춤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면 배선생님의 창착춤이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겠군요.

배정혜(이하 배): 공연은 3년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 막상 바쁘지는 않아요. 어떤 공연이든지 누가 와서 보신다고 하면 저는 겁이 나는데요. 다른 분들은 공연을 보러 안 온다고 그러는데, 저는 달라요. 저는 지인들, 특히 제가 존경하는 분들은 이번에 바쁘셔서 안 보러오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웃음) 70주년 기념으로 제자들이 공연을 해보라고 해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내가 70을 맞이해서 무엇을 할까, 사람들이 책을 내보라고 하는데, 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고, 쓰게 되면 안무에 관한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준비를 4~5년 정도해야 될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했을 때, 생각이 났어요. 요즘 전통이 너무 승무, 살풀이 밖에 없으니까 전통 춤사위로 동작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서 이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말씀대로 전통이 모든 것의 뿌리잖아요.

 

70년, 배정혜 춤의 여정 

 

: 배정혜의 춤 여정이랄까 70년을 맞으셨는데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춤의 여정도 일종의 항해 같은 것이죠? 70년을 오롯이 춤 외길로 살아오시면서 그동안의 순풍을 만나기도 했겠고, 역풍을 겪으면서 풍상을 경험하기도 하셨을 텐데,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빛나는 70년을 맞게 되어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여정에 어떤 나침반이나 지침 같은 것은 없었는지? 


: 저는 특별한 지침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단지 춤을 추고 남의 춤을 보다가 ‘나는 저렇게 추면 안 되겠다’가 목적이었어요. ‘뭐가 되고 싶다,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야 겠다’가 목표가 된 적은 없었어요. “그렇게”의 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찾는 것,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이 지침이었어요.



: 대부분의 사람이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가 예술을 추구한다는 것은 조금 더 다른 차원으로 높여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침이 없다고 하셨지만, 뭔가 다르다는 것, ‘어더니스’(otherness), 일상성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다르다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정말 소중한, 배정혜 선생님이 살아온 지침이 아닌가 합니다.

: 솔직히 그런 것 같아요. 뭔가 다름을 추구하는 것, 조금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지 않겠어요? 예술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죠.

: 모든 사람의 춤이 모두 똑같다면 굳이 자신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죠.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휘자, 오케스트라가 전부 똑같다면 단 하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왜 세상엔 수많은 지휘자, 오케스트라가 있을까? 자기가 찾는 꿈, 길을 찾는 것이 예술이 향하는 길이 아닌가, 배 선생님이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속에 예술의 비의(秘義)가 담겨 있군요. 그 동안 시련과 풍상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 시기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얘기는 재미없는 것 같고요. 첫 번째로 춤을 추면서 어려웠던 이야기는 무대에서 잘 추려고 했었는데 잘 못 추었을 때, 제일 속상하고 화가 나요. 또 화가나 조각가는 자기 손을 통해서 완성을 볼 수 있는데 안무는 내가 다 만들어놨더라도 별로 만들었다가도 쓰레기로 전락해보여요. 내 안무를 뜻대로 만들도 무대에서 무용수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니까 제대로 나와 줘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화가가 되고 싶어요. 내 손에서 망치더라도 내 그림을 망치는 것이니까. 춤은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줘야 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다리가 아프다든지 기분이 안 좋다든지 해서 그 안무자가 요구한 것이 안 나오는 순간이 있어요. 그리고 인생에서 힘들었던 순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공연을 다녀와서 출석일수가 부족해서 5년을 더 있다가 고3을 다녔어요. 친구들은 자유롭게 다닐 때 머리 땋고 학교를 다녔으니.



: 연금술은 하찮은 비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것인데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이야말로 연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금술은 화학적으로 항상 실패하지만, 시학, 예술 세계에서는 눈부신 꽃을 피어 왔다고 바슐라르는 말합니다. 비록 실패할 수도 있지만, 아무도 만들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질서, 차원을 만들려고 했던 과정이 예술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되었을 때 가슴이 쓰리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이 이룩하지 못한 꿈, 그 세계가 더욱 높았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쓰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미 도달하려고 했던 목표를 이루었다고 비쳤을 때도 본인은 아직도 미흡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 선생님은 우리 무용사에서도 길이 빛나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요.

: 선생님이 그렇게 인정해주시는 부분에 대해서 송구스럽고 제가 정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저도 눈은 높다 그것만은 인정할 수 있어요.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장 이상적인 눈을 가진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있어요. 남편이랑 같이 춤을 보러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것은 춤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그분과 결혼하기도 결심했어요. 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으로. 제가 사실 그것을 계기로 바 기본을 만들게 되었어요. 몸이 썩어있는 몸이 되어서 감정만 살아있던 춤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남편인 사람이 그것을 볼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게된 거죠.




몸으로 체득한 골과 풍, 정상에서 즐기며 내려오고 싶어

  ​

: 몸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만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몸 구석구석으로 익히는 사람도 있는데요. 제가 배 선생님의 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말로써가 아니라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의식을 초월해서 우리들이 가야할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저도 마음뿐이죠. 내일 모레면 실패할 수도 있어요. 제자 22명에게서 제 춤이 나오지 않으면요. (웃음)

: 실패조차도 참으로 소중한 벽돌 하나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벽돌 하나가 쌓여서 기둥이 되는 것인데요. 배 선생님이 공을 들이셨으니 설령 실패하셨더라도 그 실패한 벽돌이 공을 들인 탑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배 선생님 춤에서 감명을 받는 점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며 지나치는 것, 호흡이 아닌가 하는데요. 춤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춤의 원천, 가장 기본적인 소재가 무엇인가, 골과 풍, ‘프리마 마떼리아’를 제대로 알고 시작했기 때문에 춤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골과 풍은 어떤 것인가요?

: 말씀하셨듯이 춤은 호흡 하나하나를 따지면서 올바른 골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풍은 감성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골에 붙어서 춤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둥이 잘 서야 집이 잘 지어지듯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골과 풍이 이와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제 생각은 그래요. 어떻게 춤을 추지 않는 분이 더 춤에 대해 잘 아시나 놀라워요.

: 골(骨)은 대지(大地)이고 풍은 대지의 호흡인데, 그 호흡과 함께 맥박이 뛰게 되지요. 호흡은 곧 생명입니다. 골격에 깊이 스며들어 풍겨 나오는 모든 것, 멋, 향기, 동경, 꿈 - 그것이 모두 호흡에서 발효되고 푹 삭아 너울거리는 열락의 바람이거든요. 그리고 배 선생님은 그것을 책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세포 구석구석으로 체득을 하고 계신 것이죠. ‘우로보로스(ouroboros)’처럼 음악 속에 춤이 있고, 춤 속에 음악이 있고 함께 어우러져서 밀어주고 이끌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항대립, 양극대립, 높고 낮음, 어둠과 밝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호흡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순환한다는 것을 배 선생님이 몸으로 체득한 것이라고 봐요.

: 몸으로 체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죠.

: 마지막부터 얘기해보죠. 70년 꼭대기에 오르셨는데, 이제는 내리막길이라고 흔히 생각하기 쉬운데 정말 내려올 것인지, 아니면 다시 한 번 날아오르려고 시도할 것인지요?

: 저는 자연에 순응하며 역행할 생각은 없어요. 어렸을 때 춤을 무대에서 많이 추었죠. 안무를 많이 한 편인데, 내려갈 길밖에 없을 때는 그래도 무대에서 제 춤을 즐겁게 추면서 내려가자 생각해요. 늙었으니 춤을 좀 못 추더라도.

: 지금 절 놀라게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정점에 올라가면 내려오는 두 가지 방법이 있죠.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것과 추락하는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정점에서 추락을 해요. 추락인가 자연스러운 하강인가의 문제에서 정말 중요한 해답을 주셨네요. 즐기면서 내려온다. 내려오는 것조차 즐겁다......

: 저를 다스리는 것은 남을 다스리는 것보다 쉽잖아요. 내 몸을 다스리며 춤을 추면 몸이 덜 늙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한번 무대에 서는 데에 천만 원이 아니면 안 선다고 했는데 백만 원까지 내려갔어요. (웃음)

: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죠. 도덕경에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몸을 뒤로 한다는 것이 바로 몸을 앞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 그래서 계속 22개, 32개에 육박할 때까지 계속 추려고 해요. 무대에서 추라는 것은 될 수 있으면 계속 추려고요.




알알이 가득차 터져 나올 안무를 그리며
  

 

: 배 선생님의 작품들 중에는 하나씩 고민해서 구성하고 구축하는, 다시 말해서 짜내고 만들어진 안무가 많았는지, 아니면 속에서 깊이깊이 고여서 터져나오는 안무가 많았는지요?

: 두 가지를 다 경험했는데요. 직업무용단 단장을 할 때는 고여서 나올 시간을 주지 않아요. 이 선생님께서 “배정혜한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하신 것처럼 25년간 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한 셈이죠. 그래서 일부러 제 자신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자유 속에서 고여서 터져 나오는 것, 직업무용단 들어가기 전, 리을무용단에서는 했었죠. 예술은 고여서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인데 일부러 고이게 하고 터져 나온 것처럼 작품을 만들었죠.

: 제도라는 틀 속에서는 규제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 제도를 훌훌 벗었으니 이제는 모든 규격을 벗어나서 다시 한 번 안에서 고인 것을 터뜨리는 새로운 문을 열수도 있지 않을까요?

: 그것은 자신이 없어요. 너무 20년 이상을 시달려왔고 옛날에 송범 선생님이 안무가 안 나오면 단장 끝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그것을 하루하루 느끼면 20여년을 해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나는 하고 싶다’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어왔죠. 이제는 그 틀을 벗어났기 때문에 또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 공연에서 제가 22명에게 작품을 다 줬죠. 한 5명 정도에게 안무를 줘서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개인 무용단은 모이기가 힘들어서 9시 정도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또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생각해요.

: 배선생님은 이제 그 머무름의 정지선에 도달한 듯싶은데, 그것은 피날레와 에필로그 사이의 긴장의 순간과도 같습니다. 배정혜는 여기서 영영 멈추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날아 오를까?
 우리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죠. 배정혜 춤 여정 70년을 마무리하는 공연이 전통춤 일색인데, 전통이란 우리의 원점,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이 빗나갔거나 빗나가려 할 때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원점입니다. 그 원점, 그 원천으로 돌아가 배정혜는 잠시 침묵하려 합니다. 그 긴장이 발레리의 「석류」라는 시를 생각게 하는군요. “가슴 속 깊이 / 알알이 차오른 붉은 정열을 더는 억누르지 못해 / 마침내 살며시 입을 벌린 굳은 석류여.” 얼마 동안의 휴식기를 통해 석류의 굳은 껍질을 깨고 새로운 날개가 솟아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2014.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