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1 아르코공연예술인큐베이션 ‘차세대안무가클라스’ 쇼케이스
안무가 부화(孵化)시키기
이지현_춤비평가

 1. 난국(難局 - 복잡성과 결핍감)


 안무(choreography)는 춤이 그리스 시대로부터 발달한 총체극 형식으로부터 왔음(chorus) 알려주는 동시에 당시의 시와 춤과 노래와 극을 에워싸고 있는 신께 드리는 제의와 축제(choreia)의 성격을 뿌리에 갖고 있음을 알려주는 문화사적 단어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필요에 의해 기록되어지는 과정에서 ‘행위와 궤적을 기록한다’는 의미로써 완성되어지게 된 춤의 기록 결과물을 지칭하던 단어였다.
 한번 추고 사라져 버리는 춤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는 이 단어는 춤 고유의 예술성을 창작한다는 의미가 약화되어 있기에 현대무용이 출현하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단어는 만드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composition', ‘make', 'build', ’design', ‘construction' 등의 단어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으며, 안무가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choreographer, choreography by 로 가장 많이 관습적으로 애용되어 지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당대에는 어떤가? 동작을 만들어 내는 좁은 의미로 부터 총체로서의 춤작품의 창작 책임자, 넓은 의미에서는 무대예술로서의 완성자의 의미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의 안무가들에게 안무란 개념은 시시각각 그 내용과 역할이 움직이고 있는 매우 유동적이면서 역동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다양한 작품의 스타일에 따라 그 내용과 영역의 편차가 아주 큰 규정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는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요동치는(fluctuating) 성격 때문에 창작 작업에서의 많은 갈등과 의사소통의 어긋남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충돌과 조합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역할과 영역이 창출되는 결과는 낳기도 한다. 그래서 ‘춤을 창작한다’는 의미로서의 안무는 그것이 춤 예술의 영역에서 가장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미학적 의미라는 큰 틀을 갖는 동시에 그 안에 무수한 요인(factor)의 상호작용은 말할 것도 없고, “상호 간섭해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거나, 예상외의 성질을 나타내거나, 각 패턴이 각 요소 자체에 되먹임 되는 시스템”(W. Brian Arthur)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펼쳐지는 과정에 있는 복잡계(complex system)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06년부터 문광부에서 안무가를 키우는 정책적 지원을 진행하였다. ‘안무가 육성사업’이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이 사업은 많은 논란과 폐지의 위기를 뚫고 여러 변신을 거쳐 ‘2011 차세대안무가클라스’라는 이름으로 올해에도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펄펄 살아서 움직이는 안무, 안무가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논란에 개방되어 있으며, 복잡계의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다양한 요소와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결과의 성패에서 대해 정량적 평가를 할 수 없는 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안무’를 정책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것이 어쨌든 6년여를 버티며 지속되어 오고 있다는 것은 여러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전혀 과분하지 않다. 무용예술이 스스로의 핵심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과 그것을 공적인 논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모색의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기획을 있게 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무용예술가를 키워내는 대학교육과 현장 활동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내, 외적으로 강한 결핍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 사업은 안무교육의 부재에 대한 결핍감과 그것을 넘어선 위기감이 이 사업의 항해를 주도하고 있음을 여러 지점에서 볼 수 있었으며 이런 정확한 자기 방향성은 올해의 사업이 결핍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처방’으로서 자기 정리가 되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다.
 


 2. 실험(實驗-기초교양과 제작과정)


 두 개의 주관기관을 선정하고 치러진 작년 사업에 이어 올해는 작년의 주관단체였던 문화예술기획 이오공감(김서령/이동민)과 새롭게 합류한 한국공연예술센타(이제승/정소은)이 총괄기획을 분담하고, 안애순 한팩 예술감독이 전체 감독을 맡았으며 9명의 안무가가 지난 5월 클라스를 시작으로 1월 쇼케이스까지 약 9개월 동안의 과정으로 진행으로 <9 works in progress 아홉안무가들의 200일, 그리고 끝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라는 다소 긴 이름의 쇼케이스(2012. 1. 17~21, 아르코 소극장)를 결과물로 보여주었다.
 이 과정의 최종 공연물인 쇼케이스는 9개의 안무작을 3일에 거쳐 발표하는 형식이었기에 완성도와 진행된 형식에서 그 자체로 작품비평의 대상으로서는 손색이 없었으나, 공연결과물을 공연이라 하든, 클라스 졸업발표회라 하든, 쇼케이스라 하든 상관없이 이 프로젝트의 특성상 그들의 과정과 공연결과를 연관 짓게 되며 그들이 갖고 있는 기획의도와의 관계속에서 견주어 보는 것이 방식이 이 과정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 사업에 대해 직접 접한 정보는 공식적으로 공개된 부분에 한하며, 자세한 클라스의 과정과 멘토링의 과정 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하려고 했던, 진행했던 내용은 브로셔(책자)를 참조했으며, 쇼케이스(공연) 와 작가와의 대화(이야기)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기획이 갖는 정확한 안무에 대한 현 상황에서의 결핍의 지점들을 해결하고자하는 의도는 사업의 과정에 응축되어 있다. 브로셔에 의하면 1. 사전 워크숍(공감기행-태백한강발원지 등을 도보여행), 2. 클라스(철학, 미학 등/ 실기 워크숍/ 연출, 마임, 음악 등/ 무대기술), 3. 미션플레이(6차에 걸쳐 리서치/ 창작계획 프리젠테이션/ 멘토링/ 시연/ 쇼케이스), 4. 피드백세션(1:1 인터뷰, 그룹토론), 5. 사후워크숍(프로그램 품평회) 등으로 5개의 과정 단락으로 진행되었으며, 20여명의 클라스멘토(인문사회학, 안무 실기, 해외안무가 워크숍, 타장르 워크숍, 무대기술)와 미션플레이멘토(프리젠테이션, 그룹및 1:1 멘토링, 오픈스튜디오, 쇼케이스)를 구성하여 참여 안무가 9명에 대한 적극적인 멘토링을 제공하였다.
 이 과정의 특성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 그 해법에 대한 가설과 그에 따르는 적극적 처방이 마치 한편의 실험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해결과정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어서 흥미롭다. 말하자면 이 기획이 다루려는 문제가 복잡계의 속성을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인간과 예술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면 예측되는 결과와 그리 오차가 없었을 방식이었을 수 있다.
 9개월간의 과정은 창작전 단계와 창작단계로 구분된 것으로 쉽게 말하면 안무 전단계에 필요한 수업(클라스)과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과정(미션플레이, 피드백세션)이 순차적으로 나뉘어 20여명의 전문가들이 ‘통합적 안무교육과정’을 제공하였다. 그 다음으로 공연물을 만드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제작전문인력(창작, 비평, 연출, 음악, 무대기술 등)이 쇼케이스 과정에 멘토링을 통한 ‘제작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투여된 시간과 작업의 양으로 보면 9개월 동안 2년간의 대학원 과정과 맞먹은 물량 input이 제공된 것으로 보인다.
 예년에 비해 보면 철학, 미학 등의 수업은 인문사회학에 대한 강조로 유지 되었고, 실기수업등은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작과정에 대한 투여는 새롭게 더 확충되었고 그러다 보니 강사, 멘토의 수가 늘고 수업의 양이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이 전체의 과정과 내용을 보자면 안무에 대한 전방위적인 처방을 세웠다고 볼 수 있으나 의욕이 너무 과하여 진행 전체에 대한 조절력은 잃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과잉기획과 과잉제공이 이 기획의 한 주체인 안무가들을 압박해가는 형상을 보이며 그 과정에서 창작의 주체인 한 축으로서의 안무가들은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했기 보다는 교육과 제공의 세례 속에 대상자로서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기획에서 주로 사용된 단어와 개념들을 보면, 사유의 확장, 사유의 깊이, 인문사회학, 춤철학에 대한 집요한 탐구, 화두, 긴 호흡, 미션, 피드백, 리서치, 과정중심설계, 언어적 정리, 견고한 논리, 대화, 공유, 긴장감, 고민, 일관된 맥락, 유기적 구성이라는 단어들이 주요한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을 안무과정과 연결시켜 잘 조직화 해놓은 도표들도 돋보인다. 정리해보면 대략 안무가들의 인문학적인 소양과 언어적 정리를 보강해주고, 창작과정에서의 탐구와 리서치, 일관된 맥락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그 과정을 개인별, 집단별로 대화로서 공유하면서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의욕 넘치는 퍼부음에서 웬지 답답함이나 꺼름직한 느낌이 있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 공연을 보고 작가와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 과정과 연관시켜 봤을 때 피할 수 없는 작위적인 느낌이 주는 불편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은 창작과 안무에서 인문학적인 깊이를 지향한다는 것을 풀어가는 방식부터 살펴봐야 할 거 같다. 우리 안무가들에게 그런 부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예술가에게 이미 자신의 생각이 형성되어가는 청소년기도 아닌 2,30대에게 기초적인 인문학 수업을 제공한다는 것에 대한 날것의 느낌을 작년의 이 기획에서도 느꼈다. 그때도 역시 이와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었다. 날고기를 씹었을 때와 비슷한 이 느낌은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이 제작으로 이어진 1년도 안되는 과정에 수업의 형태로 제공하면 이 문제를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그 관점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 이런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 느낌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예술가에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범주와 차원이 다른 요소들을 굉장히 기계적으로 작위적으로 같은 비율로 배치하고 취급하고 있는 것에서 오며, 안무의 과정을 모르는 혹은 그 과정에서의 밖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가능한 동떨어진 것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장기간 형성되어지는 것에 속하는 안무가의 사유와 철학에 대한 결핍문제는 보다 상설적이고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르게 제공되고 지원되어야할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숨에 가능하지 않는 이 부분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나 강조는 그리 건강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 쉽다. 이식된 철학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교육이 어떤 사유의 방식을 학습으로 가능하게 할까? 그래서 어떤 과정을 수료하면 깊이와 사유력이 생길까? 만약 그런 효과가 나온다면 이 이면에 열등감을 같은 양으로 키워놓았든지, 자신을 그렇게 보이도록 포장하는 기술을 개발시켰던지 어쨌든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존재와 분리되는 사고, 감성과 분리되는 이성의 힘을 키울 것이다. 사실 무식한 예술가도 무섭지만, 감수성은 잃고 머리가 앞서가는 예술가, 말만 잘하는 무용가는 더 무섭다.
  다른 한편 제작과정에 대한 것은 쇼케이스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 뒷모습이라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멘토링 시스템으로 진행한 것은 적절하였으나 운영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 그 효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에 단정짓긴 어렵다. 그러나 참가 안무가들의 작품이 많은 외적인 도움이 드러나지 않는 걸로 봐서 가능한한 안무가 고유의 방식이나 감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1 멘토링의 파트너가 누구였지는가 정확치 않은 걸로 봐서는 집단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수준에서 영향도, 책임도 미칠 수 없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멘토링 시스템의 잇점은 무엇일까? 이미 경험이 많고 과정에 대한 노하우를 알 고 있는 선배의 역할과 더불어 당사자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연결해주어 작업에 실질적인 풍부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까지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멘토링이 되어야 도전이 있고, 책임이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3. 결과(結果)


 2011 차세대안무가클라스의 ‘과정중심 설계’가 의미하는 것은 창작과정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만들어 가는 과정에 가능한한 공을 들이겠다는 의지와 그들의 이 작업이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 좋은 점진적이고, 짜임새 있는 과정에 대한 강조를 좀 먹는 부분은 ‘쇼케이스’로 공연을 설정한 부분이다. 앞서 살폈듯이 해를 거듭하면서 안무가 양성 기획은 보다 결과에 대한 용의주도한 실험적인 성격을 갖춰가고 있다. 그것이 지금은 섣부른 부분이 있을지라도 이런 실험성과 도전성은 높이 사야할 지점이다. 그러나 굳이 자신들이 설정한 가설과 치밀한 과정을 지나서 얻어낸 결과물에 대해 ‘쇼케이스’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공연물과 쇼케이스의 가장 큰 차이는 정식으로 입장료를 받고 공연으로 보여줄 만한 완성도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교육과정의 결과를 겸허하게 친지들을 모셔놓고 무료로 발표회를 한다는 의미라면 배우는 과정의 사람들처럼 미숙할 지라도 도전적이어야 하고, 무모할지라도 탐구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 역시 그 미숙함속에서 뿌듯함과 신선함, 기대라는 색다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과정의 체계성과 전문성의 강도, 대상의 연령과 경험정도, 과정전체를 맴도는 긴장감으로 봤을 때 올해의 기획은 특히 과정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쉽게 공적 기금으로 진행한 사업이고, 교육에 초점을 맞춘 사업이기 때문에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무료공연이기 때문에 결과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모양이 되지 않았나 싶다. 또 과정은 교육적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교육결과에 대해 “그것을 입증해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런 실험적인 자세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육내용, 방식, 강사 등 모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가설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한 피드백이 돌아와야 이 실험은 완성된 것이 된다. 당연히 그 결과를 보고 다음 실험에 대해 가설을 수정할 수 있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으며, 원하는 결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나 역시 쇼케이스라는 말을 과잉 해석했는지 이 9작품에 대한 비평을 어떻게 해야할 지 오랜 시간동안 고민했었다. 졸업작품 발표회를 보고 심각하게 비평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는 쇼케이스라면 피드백 정도의 코멘트만 필요한 거 아닌가? 그렇지만 긴 시간, 긴 노력, 많은 돈이 투여된 과정과 그 과정의 결과에 대해 쇼케이스라는 것 때문에 평가를 피하는 것이 옳은가?
 누구나 결과를 드러내는 자리는 두렵다. 서바이벌 오디션에서도 제자나 멘티가 일정기간의 수련기를 거쳐 내 얼굴을 대신하고 나왔을 때 YG도 JYP도 보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표정관리가 안되고 보이지 않는 경쟁심이나 불안이 발동을 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기획자이며 현장 관객의 반응을 예민하게 담아내야 하는 것도 기획자이다. 그 소중한 현장과 실시간의 반응을 결과로 싸안지 않는다면 이 모든 과정을 마감하는 책임은 누가할 것인가? 어차피 그런 과정의 일이라면 굳이 그 두려움을 드러내어 책임을 면해보려는 태도는 필요치 않다. 만약 그 두려움의 근원에 책임에 대해 모호하게 만드는 공적 기금 사용의 관행이 스민 것이라면 그건 더욱 건강치 못하다. 트루먼 대통령의 책상 위 명패에 써있는 것처럼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의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 태도가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 걸러 3일동안 진행된 쇼케이스 공연은 그간 과정의 열기와 노력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진지함이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1작품 당 거의 50분에 육박하는 공연들이 연이어 3작품으로 진행된 공연이었음에도(무대 전환 때문에 인터미션이 15분씩 있었다) 관객들 역시 과정을 지켜보려는 인내와 노력을 아끼지 않아 공연장의 분위기는 어느 공연보다 뜨거웠다. 특히 제일 처음 공연을 한 금배섭의 작품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그런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듯 액자 속 팔과 손, 매달린 다리, 바닥을 주로 쓸고 다니는 여자의 춤, 그리고 닭으로 분장한 남자의 꼬꼬댁 소리가 진행되고 암전시 들려오는 소리의 내용만 바뀌는 시퀀스의 반복은 그런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듯 했다. 금배섭은 아마 성실한 학생이었던 듯 싶다. 강사였던 철학자 강신주씨의 강의 중 내용에서 자극을 받은 듯 객관에 존재하는 것과 주관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다룬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암전 중에 마음을 흔들기로 작정한 소음, 교성,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바꿔 삽입한다. 그의 의도는 “관객 각자의 정서와 생각으로 인해 같은 장면을 각기 다르게 볼”것이라 예측하고 그렇게 구성하였다. 하지만 짜증의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동일한 것을 주관이 다르게 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던진 이 작품은 이미 판명한 명제를 위해 정돈되지 않은 실험환경에 꼼짝없이 노출되었어야 하는 관객에게는 그리 신선한 철학적 실험이 되질 못했다. 그러나 금배섭의 이 프로젝트 과정을 임하는 진지함, 현실적인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꿋꿋함 등은 여전히 신선하다. 그가 조금 모범생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면 이전 작품에서 드러났던 놀라운 감수성과 섬세함, 그 깊이를 이번에 더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금배섭 <보이는 것에 대하여> 김정엽

 


 배준용은 쓰레기 같은 작품​〉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춤의 근원에 대해 철학하기를 원했다면 이 작품은 그 의도에 충실한 배준용식의 버전이다. 배준용은 춤을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에게 춤이란 뭘까에서 떠올리는 춤은 촌스러운 한복을 입고 야릇한 감정을 흘리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미친 짓거리 같은 과잉의 한국춤이거나 숨소리를 숨기지 않고 거칠게 뱉어내며 무용수들끼리 들어야 할 신호에 맞춰 제식 훈련하듯 무식하게 근육을 사용하며 힘자랑하는 현대무용, 발레와 힙합도 이와 비슷하게 풍자(parody)된다. 배준용을 보면 금배섭의 가설이 맞는 게 확실하다. 아무리 같은 교육내용을 전달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배준용의 지금 우리 춤공연장에서 벌어지는 춤들에 대한 그것이 마치 다들 고급예술춤 인양 생각하며 정성을 다하는 행위가 한발만 떨어져서, 한치를 비틀어서 본다면 그렇게 웃긴 모양새일 수 있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면서 무엇이 고급이고 무엇이 싸구려인가를 묻는 질문의 방식과 용기에는 젠체하는 가식이 없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안무가들에게 솔직한 자기의 고민을 풀어 놓는 것을 자극했다면 이 작품은 성공작이다. 만약 개인공연에서 배준용이 이렇게 용감하게 현실의 춤들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어느 작업에서도 우리가 스스로 보기 두려워하는 이 모습을 생짜로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나? 배준용의 방식이 거칠고, 풍자를 처리하고 결론의 몰고 가는 깊이는 떨어진다 해도,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고 본 대로 말할 수 있는 소양이 예술가의 소박한 양심이라면 배준용은 관념으로 가지 않고 거친 소박을 택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배준용 <쓰레기 같은 작품> 김정엽

 


 나연우의 산책​〉은 영상작업이 주를 이룬다. 아르코소극장을 입장할 때부터 다른 출입구로 인도하여 공간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영상 속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 역시 관객이 가볼 수 없는 환기구속 통로이다. 영상을 보기 위해 앉은 바닥도 우리가 익히 봐왔던 무대에 방석을 깔아 놓고 천장에 광목을 느러뜨려 다른 곳에 있는 느낌을 준다. 배우는 1층 입구 구석에 앉아 밀가루 반죽과 광목을 엉겨붙이는 행위를 하고, 반죽을 떼어 자신의 옷 속에 챙겨 넣는다. 들어오는 과정의 복도엔 풍선이 천정에 붙어 있거나 종이조각이 축제의 끝처럼 바닥을 뒹굴고 있다. 환기구 속에서 두 남자의 행위를 카메라는 바닥 천정의 각도를 달리하여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각도를 사용하여 마치 그들이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환상을 일으키며 보여준다. 그러나 처음에 신선한 입장과정과 계산된 소품들의 사용이 흥미를 갖게 하지만 그것을 극장안의 본론에선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 두 남자의 내러티브를 굳이 거부하면서 같은 영상적 질이 반복된다. 작품의 여러 면모에서 보이는 나연우의 작가로서의 스케일은 확인되었으나, 그것을 왜 하는지에 대한 탐구의 깊이가 채워지지 못했다. 나연우가 이 프로젝트 과정에서 그 부분을 도움을 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나연우 <산책> ​김정엽

 


 김보라의 혼잣말​〉은 자신과의 대면에서 건져낸 자기 언어에 대한 탐구의 결과이다. 혼자라는 것의 의미는 관계를 이미 전제로 한 것이자, 관계에서 삼켜버려 안으로 들어와 버린 말이다. 스탠딩 마이크는 키보다 높아 내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은 아닌 채 사방을 에워싼 장병들 같다. 누군가 입에 처넣어준 작은 전등과 사탕은 말은 막고 침은 흐르게 만든다. 뱉을 수 없는 말들은 내장으로 숨어버리고 말 대신 흘러 버리는 침이 틀어놓은 수도꼭지를 타고 내리는 것이 되었을 때 답답함은 폭발 직전의 것이 되고 김보라의 내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 대신 오줌을 흘린다. 얀 파브르의 체액 3부작이 생체실험적인 잔혹의 결과물이었다면 김보라의 체액들은 관념이 물질화된 것으로 말하는 체액들이다. 무대 위에 체액이 등장하면 관객은 동물적 감각으로 자극 받는다. 관객과 공연자 사이에 형성된 어떤 선을 넘으려는 것에 대해 이 프로젝트가 의도했다면 김보라의 혼잣말​〉이 그것을 살짝 보여주었다. 

 이번에 보여준 9개의 작품들에는 미디어에 대한 탐색 작업도 있었으나 그 부분들은 평균을 넘지 못했다. 많은 작품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각, 더 나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용기를 낸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자신에게 충실하게 축을 두고 춤 자체를 개념적으로 다루거나 춤을 통해 개념을 다루려 했던 시도들이 진지함과 집요함을 가지고 진행된 결과로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접근은 덜 된 밥처럼 목구멍과 뱃속에서 곤두서 있는 불편함을 갖고 있는 한계를 가져 교육과정과 제작과정이 이질적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 사이에서 그들이 했을 것은 고민이 아니라 고생에 가까운 것이라면 너무 과한가?

우주의 꿈으로부터 깨어나라.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춤이다
.




 4. 부화(incubating)에서 잉태(conceiving)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input과 그 결과로서의 output을 연장선상에서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의도와 결과의 관계로 본다면 과정은 아직도 교육중심적이어서 제작에 있어서의 성과물은 투입량에 만족치 못한 수준이다. 교육은 상시적일 필요가 있는 장기적인 시간을 요하고, 제작은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과정을 구성하여 결과물 유통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상대적으로 프로젝트 성격을 갖는다. 이 두 가지를 한 과정에 충족시키려 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무리수로 보인다. 9명을 선정하여 결과도 불투명한, 백년지대계로서 백년 뒤에나 좋은 결과를 낼 교육사업만 하기에는 그건 정책적이 아니라 낭만적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결과물만을 함께 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얄팍한 기대라 할지라도 결과물에서 다른 공연과는 다른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안무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는 안무작, 즉 제작과정에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하고 그 결과물 생산에 목적을 둘 수 도 있다.

 이 두 가지의 적절한 균형과 현실적 조건을 조절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춤예술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무용가는 경외의 대상이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세계를 다루며, 신의 영역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일반인과는 다른 육체적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현대에도 남 앞에서 춤을 춘다는 일의 신비함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이 아무리 모자라고 비천한 것이어도 그들에게 쏟아지는 선망의 시선은 빛이 가득하다. 나는 춤예술가들이 갖는 이런 신비함과 선망이 춤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춤예술가들은 이렇게 대접받지 못한다. 스스로도 그럴 뿐더러 밖의 시선도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신비화시키고 추켜세우는 것도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자부심이 사라진 예술가는 더욱 보기 안스럽다. 춤예술가를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한낱 철학도 모자라는 피교육자로 전락시키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우선 그들이 하는 특별한 일과 과정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자극과 창의적인 여유가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야 스스로 결핍된다고 느끼는 것을 제공해줄 과하지 않은 정도의 지원이 있으면 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여러 실험적인 시도와 노력은 높이 사줄만 하나 예술가를 키워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조금 모자랐다. 기계적인 인큐베이팅의 개념을 넘어선 잉태할 수 있는 예술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이 내년 실험에서 보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2. 03.
사진제공_김정엽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