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YCAM 레지던스 예술가 10명의 공동창작품 〈True〉
기계적이나 여성(女性)적인, 작용적이나 결합(結合)적인 ‘진화’의 지점
이지현_춤비평가

동기화(synchronization)의 구조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남자는 가벼운 일상복 차림으로 집에 있는 모습이며, 다른 한명은 마르고 키가 큰 체형으로 양복을 갖춰 입고 있다. 그러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무대 우측 3단의 철구조물 위에서 ‘빨간 우비’를 벗고 무대로 내려오기 전까지 무대의 공간은 평범한 남자의 일상공간이다. 평범남(츠요시 시라이, 안무 및 무용)의 방에는 오로지 큰 책상이 있고 그 책상 위에는 액자, 지구본, 책, 시계, 물병과 컵, 접시, 담배와 라이터 등이 올려져 있을 뿐이다. 남자가 컵과 접시를 들어 올리면 마치 고유의 사물이 목소리를 가진 것처럼 그들의 이동과 접촉에선 소리가 난다. 10명의 다른 장르(연극, 무용, 영화, 미술, 공간디자인, 음악, 조명, 컴퓨터 프로그래밍, 영상시각 디자인 등)의 아티스트들이 ‘야마구치 아트미디어 센터(YCAM)’에서의 레지던스 프로젝트를 통해 공동으로 창작한 작품 〈True〉는 이렇게 자신이 인터랙티브한 장르임을 알리며 시작된다.
 이미 1984년부터 ‘dumb type’이란 탈장르 그룹을 이끌고 있는 타카유키 푸지모토(연출 및 조명디자인)의 지휘아래에서 탄생한 이 작품의 공간에는 직경 8미터의 LED조명용 truss가 천정에 달려 있고, 무대 양측에 가로 3단 세로 3단의 아시아 조형물과 그 프레임에 가로로 형광등과 같은 조명기가 달려 있다. 그래서 무대는 전반적으로 원형의 트러스와 무지막지하게 큰 스피커가 주는 압도적인(그 조명과 소리의 세례를 피할 길은 없어 보이는) 느낌과 철제물과 흰 댄스플로어의 깔끔한 느낌이 흐르는 차가운 공간이다. 이것들이 보이는 것이라면 이 무대는 숨어 있는 것들도 많다. 흰 댄스플로어 양측으로는 건축용 금속발판이 깔려 있고, 아시바의 플레임에는 진동장치가 부착되어 있으며, 약간 큰 듯이 보였던 책상의 커버 속에는 프로젝터, 거울, 진동자, 레일과 무수한 선들이 연결되어 무대 위나 책상 위의 움직임과 동기화(synchronization)되도록 짜여져 있다(책상무게 약 150kg). 또 책상의 두꺼운 상판이 공연 중간중간에 마치 과자를 만들기 위해 틀로 찍어내는 것처럼 다양한 크기의 원형으로 오려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그것 자체도 무용수의 움직임이나 공연의 적절한 타이밍에 맞추어 떨어지도록 테이블의 설계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물론 가장 숨겨져 있는 것은 무용수의 옷속 팔에 부착된 2개의 근전(筋電) 센서이다. 센서는 뇌에서의 신호가 운동신경을 통해 근육을 움직이거나 정맥의 맥박에 속도와 힘의 변화를 전달하여 조명이나 소리, 진동을 자극하는 큐가 된다.

 

 

 


 사물과 평범남의 인터랙션이 소리와 움직임에서 조명과 진동으로 얽혀가거나 확산되어가는 중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철구조물 위의 ‘빨간 우비남’(타카오 카와구치, 텍스트, 안무 및 무용)에게 쏠린다. 자극적인 빨간색도 색이려니와 그의 행동은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구조물을 철창처럼 사용하며 불안한 암시를 준다. 우비남(나중에 우비를 벗고 양복남으로 바뀜)은 평범남에 영향받고 있지만 평범남은 아직 우비남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가 내려오고 우비를 벗어 던져 양복차림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독백은 시작된다. 눈과 보이는 것, 즉 감각과 실제가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는 독백의 내용은 사람의 기분과 감정에 대해서도 그 이면의 생리학적, 혹은 신경학적인 과정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이 물질적 과정의 결과이며 그래서 한 낫 감정을 대단한 것인양, 불변의 것인양 바라보는 태도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는 시종일관 평범남과 함께 움직이며 능란한? 한국말(물론 페이퍼가 제공되었다)로 이 독백을 읊는데 그가 구조물 위에서 무대로 내려와 인간의 이면을 들추는 내용을 읊는 장면은 그의 존재가 마치 신이나 절대자 혹은 아직은 미개한 인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선지자의 위치로 인간을 넘어선 어떤 확장된 체제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이는 이 둘의 움직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평범남은 마치 말 할 줄 모르는 로보트나 마네킹과 무표정하고 무력하고 귀여운 태도를 갖는 반면 양복남은 끊임없이 주절거리며 주도적인 움직임으로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박사나 코펠리아의 할아버지와 같은 위치를 점한다. 한동안의 이런 흐름은 무용수와 미디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고조되는데, 무용수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빨라 질 수록 LED는 조명기간의 순차적, 역동적 on/off의 연속에 의한 요란한 변주로 Dancing LED가 되고 음악은 락밴드의 증폭된 음량과 비트가 구조물을 흔들 정도의 진동으로 상승되다가 책상 위 물병 속의 물의 흔들림이 시각적으로 확인될 무렵 책상에서 육중한 원형의 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로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작용(interaction)의 주체


 또 하나의 미디어는 호리존에 투사되는 단어들이다. 눈, 오른쪽, 사진, 초점 등의 영어로 된 단어들은 마치 행성의 쇼를 보여주듯이 글자 뒤에 긴 꼬리를 단 채 휙휙 지나가거나 포물선을 그리며 다가오거나 사라진다. 그 단어들은 소리가 아닌 시각에 호소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약속된 의미(langue)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더 많은 단어들이 더 빠르게 나타나고, 유영하는 움직임이 강해지면 이후에 점으로 변하듯이 단어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저 점들의 연결은 마치 벌떼나 새떼의 군무가 되었다가 후반부에 가서는 두 줄로 나뉘어 염색체의 형상으로 꼬여들거나 단순하고 정갈한 선으로 차분해진다. 물론 그 때쯤이면 음악은 피아노 선율로 바뀌어 있다.

 그 사이 평범남에게는 빨간우비가 입혀지고, 양복남은 그의 얼굴 표정을 이리저리 조각하듯이 직접 손으로 만들거나 고치면서 인간의 표정과 감정이 아세칠콜린 수용체와 도파민의 만남과 헤어짐에서 생기는 그런 것임을 보여주고, 평범남의 표정이 풀리라 치면 겨드랑이를 약간 간지러서 다시 표정을 강하게 만든다. 감정 혹은 표정은 자극-반응에서 생기는 어떤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평범남은 마치 책상 위의 물건들을 바닥에 조물주가 다루듯이 나열하면서 주재권을 보여주고 그 사이 책상에서 떨여져 나온 다양한 크기의 원기둥들을 쌓거나 굴리면서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간다. 이 무렵이 되면 책상 위의 사물들은 이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의미하는 세상만사가 되어 복잡하게 흐트러지고, 평범남은 지구본을 (혹은 수정구)를 손에 쥐었고, 양복남은 실체는 사라지고작은 투사체가 되어 수정체 속에 환영으로 보이거나 호리존 스크린에 그림자의 모습으로 춤추며 지나간다. 이 모든 것이 좀 더 빠르고 복잡하게 엉켜갈 때쯤 양복남이 평범남에게 마치 중요한 지위를 건네주듯 어떤 물건을 건낼 때 조명은 급하게 암전되고 작품은 끝이 난다.
 
〈True〉는 복잡한 듯, 구체적이지 않은 듯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논리정연 함으로 관객을 배려한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미디어들은 무대 위의 예술세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성격의 기계나 과학의 미숙함을 벗고 다소곳하게 이 작품의 주제에 복무한다. 이는 여태까지의 미디어들이 인터랙션하는 작품들에서 그저 미디어들의 결합을 시험하는 정도의 예술이 되기에는 한참 멀은 미약한 주제의식의 작품들에 비하면 상당히 성장하고 성숙된 모습이다. 우리는 그런 작품들의 실험성에 예술성의 자리를 내어주며 인내심을 가질 수 밖에 없이 실험의 길은 멀어 보였다. 그러나 2007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에선 정확히 우주와 인간, 자연 속에서의 인간, 인간의 감각과 감각 너머의 인간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고 있다. 감각이 얼마나 물질적 체계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음에 대한 화두를 역설적이게도 음의 파장, 진동, 빛의 파장과 색, 몸의 움직임, 인지과정을 감각적으로 조리있게 자극하면서 던진다. 

 주제에 잘 통합되어 진 미디어들은 주제없이 덤벼드는 시각적 청각적 무례한 자극이 아니라 지진이라 느껴질 정도의 진동으로 인간 내면에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을 끌어 올리거나 파랑, 주황, 노랑등의 맑은 LED의 현란한 빛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감각을 깨우고, 엄청난 용량의 스피커로 락 음악으로 심장을 주물러 내면의 폭발성(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 있는)을 건드린다. 정교하게 계산된 감각적 자극들이 정확히 무엇을 자극할 것인지에 대한 신경심리학적인 경로를 알고 마음으로 파고 든다. 양복남의 독백에서 드러났듯이 이들의 작업은 인간의 감각, 인지, 기억과 관련된 뇌의 생리적, 신경적 기능에 대한 예술실험심리학 보고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각 미디어들은 ‘이야기’, 즉 주제를 위해 과하지도 넘치지 않게 잘 배치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에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인간이 확고부동하게 위치하고 있다. 바로 그 인간이 대부분의 미디어들의 반응을 이끌어 낼 자극의 시발점이다.

 

 

 


몸의 과제


 연출자인 타카유키 푸지모토는 1984년부터 ‘dumb type’이라는 퍼포먼스와 설치미술, 영상과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형식을 실험해 오고 있다. 이런 그의 노하우가 〈True〉에서 10명의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미디어들이 어떻게 협업할 것인가의 방향키를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20여년 간의 실험에 의해 다져온 빛과 소리, 시각과 청각이 뇌에서 어떻게 감각되고 인지되는 지의 결과들을 이 작품에 투여하였으며, 양복남의 카카오 카와구치는 ‘dump type’에서 이미 활동을 같이 한 이력을 갖고 있는 마임이스트이자 무용가로 춤을 중심에 놓고 다른 미디어들과 어떻게 융합될 것이지에 대한 노련한 견해와 마임적인 요소를 투여하였고, 평범남 역할을 했던 츠요시 시라이 역시 개인적으로 새로운 형식의 무용을 추구하던 무용가로서 그간 사물과 소통하는 춤에 대한 그의 색깔이 〈True〉에서도 여러 사물들을 다루고 배열하는 익숙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보면 푸지모토의 실험과 협업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겸손한 감수성을 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공동작업자의 것을 충분히 배려하고 작품 속에 침해하지 않은 상태로 담아 낼 줄 알며 그것들이 가능한 한 조화로울 수 있도록 큰 주제로 감싸낼 수 있는 여성적 힘이 이 작품 전체를 버티게 해주는 에너지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심한 배려와 인내심 가득한 상호작용의 매너들은 50분을 넘어가면서 부터는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답답한 틀이 된다. 흐름과 흐름을 끊어 내는 일을 소리와 책상의 원기둥 떨어짐으로 단절적으로 만들어 내지만 어느 순간 모든 미디어들이 조화와 반대로 카오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갖고 있음에도 락음악의 리듬이나 힘도 넉넉히 허락하지 못한다거나 조명의 현란한 변주 역시 화이트홀이나 블랙홀의 느낌으로 빨아 들일 수 있음에도 가다 말아 버리는 소극적인 주춤거림으로 멈춰선다.
 또 하나 무용수의 움직임이 모든 자극의 시작점이 되지만 그의 움직임은 다른 미디어들에 순수하게 열려있지는 않다. 이미 너무 촘촘히 짜여져 있는 〈True〉는 무용수를 그 짜여짐속의 하나의 요소로 화해 버린다. 이 작품이 시간이 흐르면서 주제를 전달하는 힘은 강해지나 생기를 잃어가는 원인은 바로 무용수가 미디어들 속에서 열려진 반응을 실시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그렇게 계산되고 유추되어진 것을 보여줌으로서 증폭의 범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에너지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체력은 떨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True〉는 무용과 인간의 몸 움직임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면서 앞으로 춤과 다른 미디어들이 춤의 영역 속에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에 대한 미래적 자취를 정확히 보여준다. 〈True〉​ 덕분에 앞으로 극장에서의 춤은 LED 조명을 보다 싼값에 다양하게 활용하여 이전까지의 조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할 것이며, 무용공연에서의 스피커 용량은 댄스클럽의 것을 뛰어 넘은 푸지모토의 시도에 힘입어 음악과 진동을 동시에 느낄 정도의 것을 사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고, 근전 센서를 부담없이 사용하여 인체의 변화를 보다 민감하게 다른 에너지와 교류토록 할 것이다. 인간의 감정적 에너지, 신체적 활력, 그보다 더 미세한 뇌 전달물질의 변화를 반영할 센서의 등장도 멀지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푸지모토와 9명의 아티스트들의 현실적이고 안정감있으며, 주제있는 실험이 우리의 춤 현실을 구체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일상화되면 우리는 그때 이 10명의 아티스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풀지 못한 마지막 과제는 많은 기계와 계산 속에서 인간의 몸이 보여줘야 할 길이다. 가장 인간 존재적인 솔직한 증폭과 변화는 무엇일까? 그 수많은 스펙트럼에 대한 탐험이 이후의 예술가들이 실험하고 싶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도전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con.act〉(3. 22 -24. LIG아트홀 부산 내 L studio)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양용준과 현대무용가 김정은이 인터렉티브 미디어 퍼모먼스에 대해 ‘게슈탈트’적인 제안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들의 작용이 궁금하다.

2012. 03.
사진제공_LIG 문화재단 (photo by 김상협)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