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팩 ‘라이징 스타’
협업의 전제는 소통과 표현
김채현_춤비평가

 한팩에서 주최하는 ‘라이징 스타’는 신진 춤 창작자 발굴 프로그램이다(아르코예술극장, 3월). 작년에 시작하여 올해로 두 번째인데, 올해도 여섯 안무가가 선정되었다. 한 사람의 안무자가 타 장르의 현장 예술인 한 사람과 손잡고 협업(collaboration)으로 안무작을 발표케 하는 일테면 기획 안무전이다. 이번에 함께 한 타 장르는 음악, 소리, 연극 연출, 영상, 희곡 분야이다.
 무음악과 내러티브가 없는 안무작이라도 의상을 입어야 한다면 의상 디자이너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춤에서 협업이란 이처럼 온갖 분야를 망라할 수 있으며, 이것이 춤의 고유한 특성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춤은 사실상 협업을 통해 탄생하며 안무자-무용가는 일생을 협업으로 지새우는 존재이고, 신진 안무자일수록 협업 체험은 귀중하다.
 협업이 춤에 원천적인 것이긴 하지만, ‘라이징 스타’처럼 안무자가 중점을 두는 협업 장르를 정하게 해서 여러 안무자의 협업 결과를 동시에 무대에 올리는 기획 프로그램은 매우 의도적이다. 이러한 의도적 협업은 안무자 그리고 짝을 이룬 협업 예술인 간의 공동 작업이기 때문에, 작업의 성과를 판별할 기준이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다. 무대화된 작품을 두 공동 작업자의 작업 성과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이 통상적이긴 하지만, 그런 탓에 작업 성과 가운데 많은 것이 무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협업에서 창작 주체가 공동 작업하는 두 사람이라 해도 협업 결과물을 발표하는 주체는 안무자이고 협업의 결과물도 바로 안무작이기 때문에, 춤 관점에서 결과물을 보기 마련이다. 동시에, 작품을 수용하는 측은 관객이므로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거나 소통력이 약하면 협업도 빛이 바랜다. 당연한 말이지만, 협업은 목표가 아니라 어떤 작품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다.
 여섯 작품 가운데 윤푸름의 ‘존재의 전이’는 움직임의 운용에서 가장 정통적인 모습을 띠고 무대에 구축된 이미지가 성숙하고 장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실험적 모습은 덜 하였다. 가운 차림을 한 세 여성 출연진은 부스러지는 여성상을 재현한다. 여성들 사이에서 젊음과 늙음 가운데 어느 쪽을 권력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해석 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텐데, 이 작품은 그 점을 다시 환기한다. 아마도 엄숙한 이미지의 여성은 오히려 억압받는 연장자이고, 처연한 모습의 두 여성은 지배와 피지배 속에서 갈등하는 쪽이다. 그들 사이의 긴장된 관계를 각자 스러지거나 일렁대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도록 해서 정련된 구도로 조직해내는 데서 이 작품의 큰 강점이 발견된다.
 

 


윤푸름 <존재의 전이> ⓒ한국공연예술센터
 

 금배섭의 안무작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제목을 오히려 ‘들리는 것에 대하여’로 바꿔야 할 만큼 들리는 소리가 강렬하였다. 여기서 소리란 남성의 걸쭉한 육두문자 쌍욕이 대표적이며 여성의 독백과 신음소리(情事 신을 연상시키는 소리)도 한 몫 한다. 이들 소리를 관객은 제각각 암전 상태에서 들어야 하며, 암전이 끝날 때마다 다음의 장면이 이어지므로 이 장면은 계속 반복된다. 그 장면은 다음과 같다. 2개의 가설무대에 큰 액자가 하나씩 뚫려 있고, 왼쪽의 액자에는 붉은 반짝이 원피스의 여성(속눈썹이 과장되어 있고 화장이 짙어 인형을 보는 듯하다)이 느린 종종걸음으로 로봇처럼 지나가고(동시에 그 옆에 고깔을 쓴 도사 같은 승려가 그 무엇인가를 기원하며 포효하다 사라진다), 오른쪽의 액자에선 빨간 팬티의 남성의 버둥대는 하반신만 보이다가 한쪽 발의 양말을 양말을 신지 않은 다른 맨발이 겨우 벗기면 남자는 쿵하고 떨어진다. 그러면 그 액자 앞에 수그려 앉았던 남자가 푹 넘어졌다가 왼쪽 액자 앞으로 기어서 옮겨 앉으며 그 사이에 왼쪽 액자에선 약간의 기묘한 팔놀림이 연출된다. 팔놀림이 끝나면, 남자가 분장한 하얀 장닭이 가설무대 앞을 횡단하는데, 그 거동은 장닭의 두리번대는 모습을 빼닮았다. 그러다 맨끝 암전 부분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암전이 끝나 이어지는 것은 바로 앞의 이 장면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주관에 좌우된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도 그렇다. 이 작품은 그런 것을 환기하는 의도를 강하게 담고 있다. 암전에 이은 몇 차례 장면이 동일하게 반복되어도 암전 속 소리는 다르다. 여기서 동일한 장면을 관객은 동일하게 아니면 소리의 내용과 연관시켜 다르게 수용할 것이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 작품은 인체극에 가까우며, 그의 툭 트이고도 저돌적인 상상력은 아쉽게도 춤화되지 않았다.
 


금배섭 <보이는 것에 대하여> ⓒ한국공연예술센터

 

 

 전성재의 서른 즈음에​〉는 제목의 의미를 충실하게 따랐다. 서른 즈음의 (세대가 아니라) 나이가 느낌직한 정서를 재현한 이 작품은 음악 장르와의 협업을 추구하였고 피아노 연주와 발라드 노래가 사용되었다. 전체적으로 서정적이고 움직임이 다양하게 등장한 반면에 작품의 흐름은 평이하였다. 

 극적 대사를 활용한 이재영의 기타리스트​〉에서 마이크의 역할은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한 어떤 춤보다 절대적이었다. 이 작품은 젊은 세대의 독백을 계속해서 대사로 엮었고 세 출연자는 각자의 꿈, 공상, 푸념, 즉 속내를 마이크로 발설한다. ‘기타리스트’는 춤과 연극 대사를 결합하여 두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출연자들이 해내는 발성, 기타 연주, 움직임은 모두 평균치 이상이었다. 극적 도구 즉 발성을 수용하는 춤으로써 관객과 활달하며 재미난 소통을 이루었다. 그 세대의 페이소스를 짙게 전달하는 그들의 솜씨는 이번 공연을 열띤 코믹 춤극 혹은 코믹 댄스 스테이지로 만들었다.
 

 


전성재 <서른 즈음에>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재영 <기타리스트> ⓒ한국공연예술센터

 


 각자 서울과 베를린에 있는 두 사람이 온라인으로 공연에 대해 소통하다가 직접 만나면 그 소통은 어떻게 될까? 황수현이 안무한 〈
코랩(Co-lab): 서울-베를린​〉은 무대 위에서 일상복 차림의 두 출연자가 노트북으로 각각 영상 이미지를 투사하는 방법을 활용하였다. 무대 위의 실제 행위들과 연결성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이미지 앞에서 그들이 펼치는 모습은 여러 가지다. 처음에는 자기 일에 몰두하였고 그 다음에는 상대방을 따라 행동하거나 각자 일에 몰두하다가 다시 접촉하며 서로의 생각 차이를 확인하고 상대방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를 행동하다가 끝내 뒤엉킨다. 엉켜 뒹구는 도중 두 사람은 상대방의 바지를 벗기고 그와 동시에 무대에 놓인 노트북 등 설치물을 무대 스탭진들이 철거하면서 작품은 끝나가지만, 그에 아랑곳 않는 두 사람은 여전히 엉켜 무대 바닥에서 나뒹굴어 다니는 데 열중할 뿐이다. 그들의 소통이 어떤 식으로 지속될지 관객도 확신하기 어렵게 이 작품은 무대에서 완결되지 않지만, 엉켜 뒹구는 것 역시 소통이자 코랩(공동 실험실?)의 연장선으로 읽혀졌다. 

 애니메이션에서 춤 소재를 발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지경민은 TV 만화영화 속의 움직임과 상황, 이런 것들을 보고 난 후의 감정을 작품화하여 〈애니메이트​〉를 올렸다. 4명의 무용수가 주로 자잘한 움직임으로 끌어가는 이 작품은 농부에게 속아 죽은 사자(獅子)의 사연과 함께 정감있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되는 전체 줄거리는 생각보다 파악 하기가 쉽지 않다. 다양하게 이어지는 자잘한 움직임들이 안무자의 잠재력을 보여준 반면, 내용의 표현은 제삼자가 해독해낼 수 있게 더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황수현 <코랩(Co-lab): 서울-베를린> ⓒ한국공연예술센터

 

 


지경민 <애니메이트> ⓒ한국공연예술센터



*전재_ 한팩 리뷰, 2012. 05.
2012. 05.
사진제공_한국공연예술센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