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재혁 〈놀음〉
동래학춤의 격조, 현대춤으로 해체하다
김채현_춤비평가

동래학춤을 현대무용의 소재로 삼는다면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널리 알고 있듯이, 동래학춤은 학(鶴)을 소재로 선비의 풍격과 남성적 기상을 격 있게 간직한 춤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정재혁의 〈놀음〉은 동래학춤의 격조에 주목하였다(아르코대극장, 10. 8~9.)
 동래학춤은 복식미를 잘 살린 면에서도 유다른 바가 있다. 한복 가운데 남성 한복은 바지저고리를 제대로 차려입고 갓과 버선, 미투리로 아래위를 갖춘 데다 도포로 마물러야 제격이다. 남성 한복의 기품을 구현한 춤으로서 동래학춤은 그 평판이 높다. 같은 차림새의 춤이더라도 한량무와 동래학춤은 기품의 높낮이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일까 한복의 미와 격조를 거론할 때 동래학춤도 종종 예시되곤 한다.
 현대무용 계열에서 민속춤을 해체하는 경우가,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전무하던 터에 〈놀음〉은 우선 반가운 시도로 다가온다. 동래학춤에서 다수의 춤사위들을 부분적으로 인용해서 〈놀음〉은 한 무리의 남녀가 놀이에 취해서 흥취를 만끽하는 모습들을 자유자재로 펼쳐보였다. 동래학춤이 선비들의 집단무로서 남성들의 춤인 데 비하여, 〈놀음〉은 남녀 혼성춤이다. 남녀의 어울림에서 쉽게 유추되듯이 〈놀음〉에서 춤꾼들은 바지저고리, 갓, 버선, 미투리, 도포와는 전혀 무관하게 남녀 모두 검거나 흰 티셔츠와 하얀 치마 차림으로 시종일관한다.




정재혁 〈놀음〉 ⓒ김채현




 이에 더하여 안무자는 〈놀음〉에서 우리 양반들의 춤과 서양 귀족들의 음악을 결합하여 재해석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이를 위해 〈놀음〉은 작품 앞과 중반에 바로크 시대 실내악을 과감하게 설정하여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무대가 밝아지기 전 공연 첫머리에서 비발디의 〈트리오 소나타 라 폴리아〉가 장려한 음으로 울려퍼지고, 후반에 들어가선 바흐의 〈소나타〉(BWV 1020)가 청아한 음색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돋운다. 놀음에서 연희판의 놀이를 연상하기 마련인 일반적 감성을 훌쩍 벗어난 음향 구성으로서 일종의 파격이 객석에 전달된다.
 〈트리오 소나타 라 폴리아〉가 울리며 밝아오는 무대에는 검정 정자관에 하얀 도포 차림을 한 남자가 징을 들고 섰다. 공연 앞과 중반의 여러 대목에서 그가 장중하게 징을 침으로써 공연은 흐름을 타는데, 그의 양반 같은 행색은 〈놀음〉이 양반의 정서나 관점을 저변에 깔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정재혁 〈놀음〉 ⓒ김채현




 동래학춤은 학의 거동과 자태를 재현하는 춤으로써 선비들의 기상과 풍류를 상당히 호방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그려지는 학의 동태들이 예컨대 학이 날아 들어오는 모습과 학이 노는 모습, 학이 모이를 어르는 모습, 학이 날아 떠나는 모습 들처럼 동래학춤의 내용을 구성하지만 동래학춤 자체가 구체적 줄거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놀음〉은 동래학춤이 재현한 학의 동태를 모티브로 활용할 뿐 학과는 무관한 놀이로 흐른다.
 치마와 긴팔 티셔츠의 선남선녀는 감정을 자제한 상태에서 자기네들끼리의 놀음을 만들어간다. 그들 사이에서 갈등과 부조화는 감지되지 않으며 간간이 삽입되는 동래학춤의 춤사위들은 놀음을 이어가는 촉매제 같은 구실을 하였다. 아예 처음부터 신은 검정 또는 흰색 운동화는 자기들의 놀음에 탄력을 더해주었다. 타악에 낮은 징소리를 섞은 음향이 메인 사운드로서 미니멀 풍으로 반복되고 또 자진모리 정도로 빠르게 호흡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들은 놀음 속으로 빠져든다. 느린 움직임과 정지하는 모습으로 그들이 놀음을 멈추거나 다시 채비하는 순간이 더러 삽입되며, 놀음이 고조되는 공연 중반에 이르러선 자진모리의 기운이 확연하다.
 그에 잇달아 징치기 양반이 다시 징을 울리자 바흐의 〈소나타〉가 터뜨려진다. 빠른 물살처럼 흐르는 청아한 음과 함께 자진모리의 기운은 지속되고 점차 휘몰이 단계로 갈 기세다. 이 지점까지, 그리고 사실상 공연작 〈놀음〉 전체를 주도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발적 신명이다.




정재혁 〈놀음〉 ⓒ김채현




 소리가 촉발하는 움직임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몸의 자유로운 유희가, 또 이를 통해 마음의 자유로운 유희가 환기된다. 스토리텔링을 배제한 상태에서 〈놀음〉은 춤꾼들이 저마다 노닐도록 하였다. 이처럼 〈놀음〉에서는 움직임의 유희가 뚜렷하였다. 몇몇 구도가 주도하지 않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서 춤꾼들이 저마다의 즉흥성을 발휘한 결과 움직임의 유희도 자연히 이합집산의 구도를 다양하게 취할 수 있었다. 바흐의 〈소나타〉가 끝난 후 공연 말미에 어두워진 조명 아래에서 아쟁과 구음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춤꾼들은 느리게 일렁이는 움직임으로 놀음을 마무리한다. 자유로운 유희가 부각되는 〈놀음〉에서 구도와 즉흥성 사이의 균형을 위해 부분에 따라선 뚜렷한 내적 구도가 더해질 필요는 있었다.










정재혁 〈놀음〉 ⓒ김채현




 바로크 시대 실내악은 동래학춤과는 언뜻 이질적인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양반과 귀족 문화의 시각을 굳이 내세울 법한지 애매한 점이 없지 않으나 여기서 동래학춤과 바로크 실내악을 연관시킨 발상은 흥미롭다. 정교하며 내밀한 질서로 흐르는 비발디와 바흐의 곡들은 매력적인 선율을 타고 중심 구도와 자유로움이 조화를 이루는 느낌을 촉발한다. 공연작 〈놀음〉의 주요 구비에 이 곡들은 역할을 해내었다.
 현대춤의 시대에 현대무용이 현대무용을 맴도는 경향이 여전한 데 비하여 〈놀음〉은 그런 경향을 벗어난다. 근래 들어 민속이나 전통 연희의 일부를 인용하여 그대로 현대무용으로 재구성하는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이 경우에는 생경함이라는 부작용이 목격되곤 하였다. 이와는 달리 〈놀음〉은 민속춤을 해체해서 현대춤의 자산으로 끌어들이는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에서는 또한 종종 눈에 띄는 한국무용의 발 디딤새들이 말해 주듯이 〈놀음〉은 꽤 고심한 흔적을 보였다. 선비의 기상을 주제로 하면서 자유분방한 즉흥성을 춤으로 가미한 동래학춤에서는 학에서 착상한 움직임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놀음〉은 동래학춤의 단순 인용을 넘어 그 주제 움직임들을 현대춤으로 녹여내는 공력(功力)을 펼쳐보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9. 1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