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집-꿈과 무의식의 탐구
권옥희_춤비평가

하늘은 짙은 먹빛으로 검었고, 멀리 보이는 동백섬은 가느다란 햇빛에 희뿌옇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바다는 비를 뿌리다가 농담처럼 슬쩍 얼굴을 내미는 해로 검거나 햇빛으로 반짝였다.
 부산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이 있다. 바지선이나 폐허가 된 공간, 해변 등 부산의 특정한 장소를 찾아 춤을 설계하고 펼쳐놓는 진영아의 작업이다. 〈Incognita movement〉(해운대 백사장, 11월 30일~12월 1일)도 그랬다. 해변에 설계한 공간에 밀도를 더할 ‘집’이라는 주제를 던져놓고 여섯 시간 여를 춤으로 자유롭게 풀어낸 작품은 즉흥 춤의 기록을 다시 쓴 공연이었다.
 해변에 큰 창을 낸 흰색 벽과 계단, 벽 안에(바깥일 수도) 놓인 카펫 위 의자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모래에 기둥을 박은 뒤 매어 단 여러 개의 판이 풍경처럼 흔들리는, 추상도가 높게 변형된 함축적이고 밀도 높은 문은 문자체가 주는 이미지의 배반이었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검정색의 그랜드피아노.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진영아는 삶의 경계, 모래 위에 또 하나의 세계를 지어놓았다. 그 ‘집’에 여자가(노영재)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가 벽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카펫 위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그림은 여자(문은아)가 의자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탁자는 모로 눕고, 카펫은 모래범벅이 되어 바닥을 뒹군다. 또 다른 여자(박정윤)는 모래 위에 얼굴을 대고 마치 죽음처럼 누워있는가 하면 자신의 머리에 모래를 마구 끼얹던 여자(안선희)는 모래에 뒹굴던 카펫을 덮고 스스로 가구가 되어 펼쳐져 있다.
 이들이 춤을 추는 ‘집’이라는 공간은 이들을 숨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 짓눌러버리는 고통이자 고독이 일상이 되어버린 공간이다.
 이렇듯 일상의 작은 하소연에 그칠 듯이 시작된 이야기는 곧바로 개인의 내밀한 역사의 어두운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춤으로 내내 이어진다. 무용수들은 고통스런 감정의 빗속을 헤매다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처럼 환하게 빛나는 곳에서 기억과 현실이 반죽된 춤 보따리를 들고 모래 위를 드나든다.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산책 나온 이들과 무용수들의 구분이 없는, 해변 위 열린 무대는 현실과 현실이 포지티브 필름위에 네거티브 필름처럼 겹쳐있고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안무자(진영아)가 무용수들의 이름을 부를수록 이 겹침은 더욱 완강해진다. 무용수들의 춤이 깊어지고 두터워진다. 안무자의 춤의 전략이며 시간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바지선에서의 작업 〈섬〉에서 넘어오면서 휠씬 더 세련되어졌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직설적인 춤언어와 상징적인 춤언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 모호함의 자리에 두 세계가 은밀하게 겹쳐있다.
 이 훌륭한 무용수들이 추는 춤의 확장력과 현실적 억압의 응축력에서 이야기를 간추리면 바다와 우정을 맺은 진영아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된다. 바다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진영아가 〈Incognita movement〉-‘미지의, 인식되지 않는’ 춤을 바다, 해변에 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감정의 기원은 고통에 있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춤을 오래 보고 있자면 감정의 주제는 변함이 없는데, 춤의 세부는 작고 크게 변한다. 그것은 왜곡된 현실인 것도 같고, 현실의 억압으로 채 완성되지 못한 각자의 춤(삶) 같기도 하다. 이들이 추는 고통의 정체가 무엇이든 고통은 춤을 추는 이들만의 고통이 아니라 누구도 감당해주지 못할 힘과 재능의 그것이다.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오후 5시. 해변에 풀어놓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랬다.
 남자가 삽을 끌고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니, 사각 형의 큰 무대공간이 생긴다. 그 가운데 삽을 꽂는다. 열린 공간과의 경계. 공간의 윤곽은 그림의 액자 같은 힘을 지닌다. 삽이 낸 길 위에 서 춤을 추는 안선희와 박종수의 춤그림자가 길어진다.
 남자와 여자가(조현배와 이혜리)가 집 뒤로 걸어 들어간다. 안아들려는 남자를 피해 여자가 창문을 넘자 남자가 망연자실 쳐다본다. 모래에 엎드려 있는 여자, 발로 모래를 파헤친다. 녹청색 쟈켓을 입고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여자(황정은), 모래위에 가방을 펼친다. 비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춤을 춘다. 자유로운 정신에 고삐가 되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다른 시간을 여는 것, 가능할까. 스스로 춤으로 묻는다. 다시 가방을 닫아 들고 걷는다. 안선희가 관객들 곁으로 가까이 와 서 있다. 결연한 눈빛이다. 돌아서 걷더니 외투를 뒤집어쓰고 머리 위로 모래를 마구 끼얹는다. 자신을 모래에 묻고 말겠다는 듯.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런가하면 채 만개하지 못한 재능, 좌절의 철저함은 그 자체가 꽃(이언주)이 되어 춤으로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남자(조현배)가 위태롭게 지붕을 타는가 하면 여자(이혜리)는 계단 끝에 올라서 아래로 몸을 던질까 생각중이다. 여자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스스로를 질책하는 듯한 표정, 반은 묻는 것 같고 받은 비난하는 듯한.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해변에 다시 비가 내린다. 여자가 외투를 벗어 아래로 던지자, 남자가 옷을 집어 들고 춤을 춘다. 누군가가 문을 민다. 흔들리는 문. 문 그림자가 모래사장에 일렁인다. 무용수들이 춤을 추다가 일제히 외투를 벗어 던지고 바다로 향한다. 녹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박은화가 마른 나뭇가지를 끌고 들어간다. 손으로 모래를 판다. 나뭇가지를 모래에 꽂(심)는다. 스카프를 나뭇가지 위에 건다. 표식처럼.
 박은화가 군무진들이 벗어둔 외투 쪽으로 저벅저벅 걷는다. 외투를 집어 한 곳으로 모은다. 삽으로 모래를 끼얹는다. 한 삽, 또 한 삽, 속도를 더해가는 삽 끝에서 허공으로 나는 모래. 껍데기를 버려야 속을 가질 수 있으며, 자신과도 기억과도 만날 수 있다. 옷 무덤을 발로 밟으며 춤을 춘다. 마치 아래에 눌린 것이 위에 있는 것들을 견뎌내라고. 고통이 으쓱 올라와 조금, 바람이 조금, 지나갈 틈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래에서 어둡게 빛나는 모호한 정열과 고통을 정리하려 애쓰는 날, 비가 내린다.
 깃발처럼 날리는 녹색스카프, 수평선 쪽을 향해 내달리는 무용수들. 박은화가 나뭇가지 아래 눕는다.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환적이지만... 서로 너무 닮은 슬픔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분명 슬픔을 치유하는 힘이 된다. 서로의 춤으로, 춤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간절하게 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를 서로에게 끌어당겨, 서로의 슬픔을 쓰다듬는다.
 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득 “비닐은 내가 걷어줄까?”라고 혼잣말을 한 뒤, 피아노를 덮고 있던 비닐을 걷어내 들고 춤을 춘 박은화(부산대교수)와 피아니스트의 송준섭의 연주는 즉흥의 모범이었고, 무용수들의 외투를 묻는 그의 춤은 이 세상에 몸을 두었지만 다른 세상의 감각을 확보한 뒤에라야 가능한 춤이었다.
 그리고 특별하게 춤추려 애쓰지 않고 마음을 풀어놓은 모든 무용수들의 춤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춤을 추는 이들의 고통, 예민한 감수성의 기질을 가진 이들만이 문득 부딪치는, 그런 알 수 없는 이유에서였을 터. 예술가적 기질과 섬세한 성품을 지닌 이들이 정신적 평화를 느끼는 데 꼭 필요한 춤판이었다. 자연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자리다. 이 춤판이 확장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진영아 〈Incognita movement〉 ⓒRandom Art Project 작은방




 다른 이들이 극장 무대에 있을 때, 진영아는 바지선과 해변에 있었다. 안무가가 지녔을 미적 본능에 의해 특별할 것도 없는 모래와 바다에 매혹되었었다는 점이나 자연이 주는 것이(자칫 누추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극장 무대의 그것보다 휠씬 더 깊다는, 남다른 감각으로 진영아가 자연을 보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만하다. 그녀는 〈Incognita movement〉와 〈섬〉을 통해 사회의 윤리적 금제에서부터 여성적 자기 발현의 강요된 좌절과 창조적 열정의 억압으로까지 그 확장됨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춤을 추던 이가, 춤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바꾼다는 의미이다. 진영아는 집(가족)의 정체(?)를 밝히는 이번 춤작업을 하면서 무용수들과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바람이 넘나드는 문과 집, 바다를 오가며 춤추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또 운다. 무용가에서 춤 작가의 삶으로 건너간 듯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 ​ ​ ​ 

2020. 1.
사진제공_Random Art Project 작은방 *춤웹진